66화
리카르도는 함부로 미라벨에게 손을 대려던 에치오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에치오는 그에게 잡힌 손을 축 늘어뜨리고서 힘없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알면 됐어.”
리카르도는 짤막하게 말하며 에치오를 놓아주었다. 그가 미라벨에게 가려 하자, 에치오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
“왜 그러지?”
리카르도는 성가시다는 듯이 에치오를 보았다. 주군의 날카로운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진 에치오가 미라벨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챈 리카르도의 눈빛이 더욱 형형하게 빛났다.
“왕녀를 왜 건들려 했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 전에, 주군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말해.”
“하지만…….”
에치오는 난감해하며 왕녀와 리카르도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 모두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가 마지못해 말했다.
“왕녀님의 옥안을 보셨습니까? 아르밀…… 대공비 전하와 똑같이 생기셨습니다. 주군께서도 보시면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실 겁니다.”
에치오의 설명에 리카르도는 침묵했다. 그는 속내가 읽히지 않는 얼굴로 에치오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연이다.”
“예? 하지만!”
“에치오.”
리카르도는 눈썹을 구기며 에치오를 불렀다. 에치오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우연이야.”
더 이상은 말하지 말라는 듯이 못 박는 리카르도의 말에 에치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왕녀와 아르밀라는 판박이다. 눈썰미가 없는 편인 에치오에게도 그리 보일 정도면 리카르도도 단번에 알아봤을 터.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른 척하고 있었다.
리카르도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에치오도 그래야 한다. 주군의 결정에 기사는 무조건 따라야 하니까. 설령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도.
“알겠습니다.”
에치오는 다리를 탁 모으고서 간결히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의혹이나 반감 같은 건 없었다.
무조건 명에 따르겠다는 에치오의 태도에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예, 주군.”
에치오는 리카르도가 걸어 올라왔던 계단으로 향했다. 그가 멀어지자, 미라벨은 비로소 움켜쥐고 있던 치마를 놓았다.
“하아…….”
“미라벨.”
미라벨의 몸이 가늘게 떨리자, 리카르도가 급히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네 시녀가 널 찾아서 서재로 데리러 오던 중이었는데. 그새 에치오와 만날 줄은 몰랐어. 미안해.”
“당신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미라벨은 단호히 말했다. 리카르도가 그녀에게 숱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건 그와 무관한 일이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를 하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잠시만.”
리카르도는 순순히 대답하고서는 그녀가 있던 서재로 들어갔다. 곧 베일을 챙겨서 가지고 나온 그가 미라벨의 머리에 그것을 조심스레 씌워 주었다.
“녹색 방까지 가는 길에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왜 안 물어봐요?”
미라벨은 베일을 펼치며 리카르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베일이 떨어진 곳까지 갔다면 분명 찢어진 지도를 봤을 터. 그런데도 리카르도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내가 궁금해해야 하는 게 있던가?”
“없다면 됐어요.”
미라벨은 맥이 풀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계단으로 향하자, 리카르도가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 에치오가 해치진 않았나?”
“날 해칠 수 있는 사람을 호위로 삼았던 거예요?”
미라벨이 옅게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했다.
“다친 곳이 있다면 말해. 당장 엄벌을 내릴 테니.”
“그럴 거 없어요. 멀쩡하니까.”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말했다. 그녀는 난간을 잡고 내려가다가 멈칫하고서 리카르도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어째서 에치오가 기사단장이 아닌 거죠?”
“아, 그건…….”
리카르도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다가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가 뜸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라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까지 곤란해할 질문이었나 생각하는 찰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너를 놓쳤으니까.”
리카르도의 시선은 미라벨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 너머에 있는, 아득한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그가 말했다.
“내가 너를 잃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에치오를 강등했어.”
리카르도의 대답은 미라벨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음이 무거웠다.
미라벨은 그간 리카르도를 떠나면서 뒤에 남겨 두고 온 것은 돌이켜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레나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이곳을 떠나던 날에 멈춰 있었다.
잔인하고 차가운 리카르도, 기고만장한 집사, 퉁명스러운 하녀들과 기사단장인 에치오.
그중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이제 하나도 없었다.
리카르도는 무너졌고, 집사는 해임되었으며, 비앙카는 쫓겨났고, 에치오는 기사단장이 아니다.
레나토는 완전히 변했다. 아르밀라가 살던 무렵의 레나토는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
집사와 비앙카의 일은 후련하였지만, 리카르도와 에치오에게 생긴 변화는…….
‘아니, 내가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에치오뿐이야.’
미라벨은 난간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선을 꽂는 리카르도를 무시하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멈춰 있는 건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리카르도가 변한 것에는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통쾌하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미라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샤를이 여길 온다고?”
녹색 방으로 돌아온 미라벨은 당황하며 소피에게 물었다. 소피는 미라벨을 보자마자 아실이 알려 준 소식을 전했다.
아실은 미라벨이 날을 정해서 말해 주면, 그 날짜에 샤를을 이리로 보내겠다고 했다.
샤를이 하도 엄마를 찾는 탓에 할 수 없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소피의 전언을 들은 미라벨이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보낸다는 건가?”
소피는 옆에서 코를 훌쩍였다. 미라벨을 찾아다니다가 지붕에서 떨어진 눈 폭탄을 맞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네, 아실 왕자님께서 보내 주신대요. 흐엣취!”
소피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재채기를 하고서는 벽난로에 바짝 붙었다.
“우선 이거라도 덮어. 감기 걸리겠다.”
미라벨은 오한이 들어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담요를 받은 소피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킁,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내 표정이 왜?”
“되게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뭔가 걱정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너무 좋은걸.”
정곡이 찔린 미라벨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샤를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반갑고 기뻤다.
하지만 여긴 레나토가 아닌가. 안 그래도 얼마 전 리카르도가 샤를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두 사람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안 되겠어.’
미라벨은 자신을 덮쳐 오는 불안함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소피를 방에 남겨 두고 나오며 급히 말했다.
“나 잠깐 좀 나갔다 올게. 금방 올 거야.”
“예? 또 어딜…… 엣취!”
미라벨에게 질문을 하려던 소피는 온몸을 흔들며 재채기를 했다. 그사이 사라진 미라벨에 소피는 인중을 쓱 쓸고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그렇게 바쁘실까.”
소피는 작게 중얼거렸다. 레나토에 오고서부터, 미라벨이 달라졌다. 뭐라고 정확히 짚기는 어려웠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4년 전 세골린데에 돌아온 이후로 미라벨은 영 기운이 없었다.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햇살같이 환한 빛이 나질 않았다.
맑은 종소리 같던 목소리는 여전히 영롱하였으나 그뿐. 힘이 빠져서 가끔은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처음에 소피는 아실과 루이즈가 워낙에 활기찬 탓에 상대적으로 미라벨이 맥없어 보인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기억을 잃을 정도의 큰 사고도 당한 뒤라서 그러려니 하였다.
미라벨이 예전처럼 반짝거리지 않는 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의 미라벨을 보면, 소피는 가끔씩 예전의 그녀를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전처럼 해맑고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세골린데에 있을 때보다는 좀 더 자기주장이 짙어졌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사람이 힘을 얻는 경우는 두 가지다. 사랑에 빠지거나, 분노에 차거나.
미라벨이 레나토에서 화낼 일은 없으니, 아마도 전자일 터.
‘대공과 잘 어울리셨지.’
소피는 담요를 끌어당기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자신의 기대가 착각이 아니길 바라며, 벽난로에 손을 쬐었다.
“아 참, 수정구.”
몸을 제법 녹인 소피가 잠에 무너지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며 옆에 내려놓은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일단 샤를이 곧 이리로 올 거라는 얘기를 전했다고 보고해야 한다.
소피는 수정구를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녀가 구체 위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우려는 때.
파아앗—
평소와는 다른, 진한 푸른빛이 수정구에서 퍼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