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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5화 (66/120)
  • 65화

    아실의 제안에 루이즈가 크게 외쳤다.

    “레나토?!”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는 제게 몸을 기울이는 루이즈를 인상을 쓰며 밀어 내었다.

    “그래, 레나토.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리니까 좀 조용히 말해.”

    “아니, 거기에 샤를을 무슨 수로 보내? 지금 눈 때문에 미라벨도 옴짝달싹 못 하잖아.”

    “당연히 평범하게는 못 보내지. 마법으로 보내려고.”

    “그런 편한 방법이 있었어? 그럼 애초에 미라벨은 왜 마차로 간 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루이즈의 추궁에 아실이 세상 무식한 사람을 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의 반응에 루이즈가 얼굴을 구겼다.

    “모르니까 묻지. 왜 그렇게 봐?”

    “마법으론 한 명밖에 못 보내잖아. 그것도 마력을 쏟아부어야 가능하고. 그런데 사절단을 통째로 어떻게 보내겠어. 루이즈는 나랑 같이 수업을 들어 놓곤 왜 하나도 기억을 못 해?”

    “마법은 내 영역이 아니라니까.”

    루이즈는 머쓱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려서부터 마법에 재능을 보여 마탑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아실과 달리, 루이즈는 마법에 영 서툴렀다.

    마법은 모든 게 같은 줄 알았던 쌍둥이가 각기 다른 개체로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래서. 샤를을 레나토에 보내겠다고?”

    “그래야지. 안 그럼 어떡할 거야. 답이 안 나오잖아. 루이즈도 그것 때문에 나랑 얘기하려던 거 아냐?”

    “맞아.”

    아실의 말에 루이즈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미라벨이 아르칸젤로로 떠나면서, 샤를은 생전 처음 엄마와 생이별하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애착이 큰 샤를에게 그녀와 떨어지는 건 인생 최대의 사고였다.

    미라벨이 떠나던 날, 샤를은 종일 엉엉 울었다. 루이즈와 오펠리가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날 샤를은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천만다행으로 다음 날부터는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열 밤 뒤에 올 거라고 루이즈가 달랜 덕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레나토에 폭설이 내렸다. 날씨로 인해 미라벨의 체류 기간이 점점 길어지자, 아이의 인내심은 이내 닳고 말았다.

    수정구를 통해 미라벨이 달래도 그 순간뿐.

    심지어 어제부터 샤를은 자지도 않고 내내 울기만 하였다. 이러다 실신이라도 할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루이즈는 그녀답지 않게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은, 샤를 어제 새벽에 토했어.”

    “뭐? 왜 그걸 이제 말해?”

    “나 방금 너 만나러 가던 길이었거든?”

    “아……. 응. 그랬지.”

    아실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직 아침을 먹기도 전이었다. 그는 다시 팔짱을 끼고선 루이즈에게 말했다.

    “이러다 애 잡겠다. 빨리 미라벨에게 말하고, 샤를을 보내야겠어.”

    “어머님한텐 내가 고할게. 당장 보내라고 하실 거야.”

    루이즈는 아실에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쌍둥이 동생을 보았다.

    “동생이 마탑주인 거, 꽤 좋네.”

    “참도 그렇겠다.”

    아실은 볼을 부풀리고선 꿍얼거렸다. 루이즈가 야단법석을 떨어서 급하게 마탑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불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란 세골린데 왕실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아끼는 가족은 단연, 미라벨과 샤를이었다.

    * * *

    미라벨은 홀로 서재를 찾았다. 리카르도를 설득하여 에치오를 떨어뜨려 놓자마자 당장에 이곳으로 왔다. 한번 지도를 떠올렸더니 그게 내내 머리에 맴돌아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내가 그걸 어디에 뒀었지?’

    미라벨을 기억을 더듬으며 책장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장서가 가득한 서재를 거닐던 그녀는 이내 한곳에 멈췄다.

    미라벨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그녀가 아르밀라로서 레나토에 지낼 때 공부하던 자리였다.

    ‘이건 여전하네.’

    미라벨은 쓸쓸한 표정으로 다가가 책상을 쓰다듬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여기였어.’

    미라벨은 책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책장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두꺼운 표지의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노랗게 변색한 종이 몇 장이 후드득 쏟아지듯 떨어졌다.

    ‘찾았다.’

    미라벨은 책을 내려놓고서 종이를 서둘러 주웠다. 서툰 글씨로 열심히 쓰고 그린 지명과 지형을 확인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지도를 찢었다.

    쫘악, 쫘아악.

    지도는 미라벨의 손에서 종잇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쓰레기로 변한 지도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감돌았다.

    세골린데의 국경에 대한 정보는 이걸로 완전히 사라졌다. 레나토는 물론이고, 아르칸젤로 제국에서 세골린데를 침범할 수는 없을 터.

    “이봐요.”

    지도였던 종이 더미 앞에서 미라벨이 몸을 돌리려던 차였다. 그녀의 뒤에서 잔뜩 날이 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스릉, 하고 검이 검집에서 나오는 소리마저 이어 들렸다.

    “왕녀님, 거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에치오였다.

    미라벨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곧장 대답을 하지 않자, 에치오가 그녀를 채근했다.

    “뭘 하고 계셨냐고 여쭈었습니다.”

    “검을 거둬, 기사단장.”

    “난 기사단장이 아닌데.”

    에치오는 미라벨의 대답에 더더욱 수상함을 느끼며 다가갔다. 그는 그녀를 향해 겨눈 검을 놓지 않고서 말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나는 세골린데의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다. 레나토의 기사는 귀빈을 이렇게 대하나? 무엄하구나.”

    날카로운 채찍 같은 힐책에 에치오가 움찔했다.

    왕녀의 말이 옳다. 그녀는 귀빈이니 보호를 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비토레가의 저택 지리에 훤하고, 서재의 자료를 훼손하는 귀빈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내가 방금 없앤 자료가 뭔지나 알고?”

    미라벨은 차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몸을 틀자, 에치오의 검날이 바로 목 아래에 닿았다. 하지만 미라벨은 동요하지 않고서 지도 조각을 가리켰다.

    “이건 세골린데의 국가 비밀이야. 국경을 그린 지도더군. 난 왕족으로서 내 나라를 위해 지도를 없앤 거다. 왜 이런 지도가 여기 있는지 추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레나토는 내게 감사해야 할 텐데.”

    “그건…….”

    “다시 한번 말하지. 검을 거둬.”

    왕녀의 위엄이 서린 명령에 에치오가 떫은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미라벨은 그 몰래 안도의 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지금 일은 없던 걸로 해 주겠다. 돌아가.”

    “……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뭐?”

    “내가 기사단장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요, 왕녀님.”

    에치오는 거뒀던 검을 치켜들고서 휙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 끝에 금빛 베일이 걸려 벗겨져 나갔다.

    미라벨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붕 떠올랐다가 한들한들 흔들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베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왕녀를 쏘아보던 에치오의 동공이 차츰 확장되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지?”

    미라벨은 자신을 알아보고서 동요하는 에치오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자네의 무례함을 대공께 고하겠어.”

    미라벨은 에치오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에치오는 그녀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내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에치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에치오는 미라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금발을 보며 혼란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잠깐만. 잠깐만요, 왕녀님.”

    “……변명은 됐어.”

    순간적으로 에치오의 이름을 부르며 대꾸할 뻔했던 미라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 전에도 그를 습관적으로 기사단장이라고 불러 트집이 잡히지 않았나. 더 이상의 실수는 안 된다.

    “놔라.”

    “왕녀님의 옥안을 한 번만 더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알던 사람이랑 무척 닮으셨습니다.”

    “누구?”

    미라벨은 복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질문에 에치오가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불쌍하고 요령도 없는…… 그런 여자요.”

    에치오의 설명에 미라벨은 피식 웃었다.

    불쌍하고 요령도 없다니. 아르밀라를 묘사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수식어가 또 있을까.

    미라벨이 그대로 가만히 서 있자, 에치오가 초조해하며 말을 이었다.

    “주군을 많이 사랑했던 여자였습니다. 주군께서 그 여자를 애타게 찾으셨어요. 혹시, 그 여자를 아십니까? 아르밀라라고 하는데.”

    “몰라.”

    미라벨은 잘라 말하고서 어깨를 틀었다. 에치오의 손을 떨쳐 낸 그녀가 복도를 걸어가자, 그가 따라오며 말했다.

    “혹시, 먼 친척일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했어.”

    “한번 알아봐 주시면……!”

    에치오가 다시금 미라벨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에게 닿으려는 찰나, 갑자기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한기와 함께 등장한 사내가 에치오의 손목을 비틀듯이 움켜쥐고서 경고하였다.

    “만지지 마라.”

    에치오는 자신의 손을 거머쥔 사내를 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리카르도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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