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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4화 (65/120)
  • 64화

    미라벨은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가 대공의 집무실로 갔다. 마치 여기에 살던 사람처럼 헤매지도 않았다.

    “왕녀님, 혹시…….”

    집무실에 다다른 왕녀에게 에치오가 질문을 하려는 때였다. 그녀는 습관처럼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였다. 그러자, 안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미라벨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과거 언젠가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리카르도가 차갑게 대답하고.

    딱히 추억할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기억하고 있는지.

    미라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그녀의 뒤에 있던 에치오가 입을 열었다.

    “에치오입니다, 주군. 미라벨 왕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서 리카르도가 등장하고, 그가 밝게 웃었다.

    “왕녀가 날 찾아 주다니.”

    “할 말이 있어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왕녀에게 깍듯이 말한 리카르도는 따라 들어오려는 에치오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졸지에 눈칫밥을 먹게 된 에치오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리카르도는 에치오가 뒷걸음질 치자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았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에치오는 멍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본 거야?”

    주군이 웃었다.

    리카르도가 웃는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왕녀가 중요한 손님이라는 건 에치오도 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만큼의 귀빈이던가.

    아니, 그 이전에 리카르도가 사람을 알아보다니. 거기서부터 놀라웠다.

    게다가 왕녀는 왜 그리 레나토 저택에 익숙해 보이는지.

    내내 방에 처박혀 지낸 줄 알았는데, 서재와 집무실이 어디 있는지 에치오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시녀도 안 데리고 나왔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저택 지리에 훤한지가 의문이었다.

    “뭐야, 대체.”

    에치오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복도의 벽에 기대섰다.

    왕녀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다.

    리카르도가 직접 호위를 명할 때부터 특별하다곤 생각했지만, 이건 특별의 범위를 넘어섰다.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왕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나한테 호위는 갑자기 왜 붙인 거죠?”

    미라벨은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샤를의 얘기나 다른 화제가 떠오르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해.”

    “길게 말할 생각 없어요. 대답이나 하세요.”

    미라벨에게 자리를 권하던 리카르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방문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네가 걱정되어서.”

    “새삼스럽네요. 설마, 잠깐 밖에 나갔다고 그러신 건가요? 제가 레나토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잘 모르시나 봐요.”

    미라벨의 차가운 대답에 리카르도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대답을 했다.

    “건국제 때문에 방문한 귀빈인 거, 알고 있어. 호위를 붙인 건 그래서이기도 해. 귀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

    “이 날씨엔 레나토 밖엘 나가지도 못하는걸요. 저택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안전은 누구도 보장 못 해.”

    “난 왕녀예요. 누구도 날 해칠 수 없…….”

    리카르도에게 따지던 미라벨의 몸이 앞으로 확 잡아당겨졌다. 그녀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리카르도에게 안겼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얄팍한 등허리를 옥죄었다.

    훅 끼쳐 오는 서늘한 향기에 미라벨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서 숨을 깊게 들이켰다.

    “제발.”

    굵직하고 낮은 음성이 간절함을 담아 퍼졌다.

    리카르도를 밀치려던 미라벨은 움찔하고선 그대로 굳었다. 그는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시고서 눈썹을 구겼다.

    “왕녀여도, 대공이어도. 무력한 순간이 있다는 걸 알아줘.”

    “그게 무슨…….”

    “네가 죽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을 때. 난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어. 그걸 또다시 알고 싶지 않아.”

    “여긴 레나토잖아요. 위험하지 않아요.”

    미라벨은 붉게 물든 얼굴이 들킬까 봐서 고개를 틀었다. 그녀의 대답에 리카르도는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숨이 막힐 만큼 미라벨을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에서 결이 좋은 흑발이 살랑였다.

    “저택도 위험해. 지난번엔 마구간엘 갔지. 그리고 지금 네 시녀는 묘지에 갔고. 언제 마수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에.”

    “건물 안까지 마수가 침입할 확률은 낮잖아요. 그리고…… 마수는, 대공이 싹 다 없앴다던데.”

    미라벨의 음성이 차츰 떨려 왔다. 리카르도의 체온에 마음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와 닿는 그의 가슴 너머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덩달아 그녀의 심장 또한 달리기 시작하는 듯했다.

    “마수…….”

    리카르도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나직한 음성에 미라벨은 오싹해졌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뭐가 위험할지는 몰라도, 이대로 리카르도에게 안겨 있는 건 좋지 않았다. 미라벨은 급한 대로 그의 가슴을 밀치며 말했다.

    “아무튼, 저리 가요.”

    “넌 몰라. 우두머리를 잃은 마수 무리는 민가를 습격하기도 해. 그러니 안심할 수 없어.”

    “우두머리가 왜 없는데요?”

    “내가 죽였으니까. 네 복수를 하려고 죽였거든.”

    리카르도를 밀치던 미라벨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손을 내리자 그가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

    “난 우두머리가 널 죽인 줄 알았어. 그래서 이소타에 가서 죽여 버렸지. 죽인 우두머리의 내장을 파헤쳐 네 흔적을 찾으려 했어.”

    여전히 미라벨을 품에 안은 채 리카르도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턱을 가만히 쥔 그가 고통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어. 내게 남은 건 피투성이의 팔찌뿐이었지.”

    “…….”

    “이후로도 매년 네가 사라진 날이 되면 마수 토벌을 나갔어. 그래야 그나마 살 것 같았으니까.”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올해는 달라. 이번엔 눈산에 안 갈 거다. 내가 산에 간 사이에 네가 떠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 그러니까, 마수에 대비해 네 호위가 있어야 해.”

    미라벨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슬프게 웃었다.

    “알아, 넌 금방 떠나야 한다는 거. 내게는 네게 뭔갈 요구할 자격 같은 것도 없다는 거.”

    미라벨은 입술을 짓씹었다.

    마음이 아팠다. 리카르도가 슬퍼하는 걸 보면 통쾌해야 하는데, 그렇질 못했다. 그를 사랑하는 아르밀라가 미라벨의 마음 한구석에서 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이 가엽지 않으냐고.

    ‘천만에.’

    미라벨은 세게 입술을 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잔인하다.

    아르밀라를 농락하고,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달콤함에 혹해 눈물이 일상이었던 때를 잊어선 안 된다.

    리카르도에게 넘어가는 게 그가 원하는 바다. 미라벨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그 사실을 되뇌었다.

    “잘 알고 있네요. 당신에겐 날 구속할 자격이 없어요.”

    “구속이 아니라 보호야. 그리고 나보단 에치오가 덜 불편하잖아.”

    리카르도의 대답을 들은 미라벨이 힘주어 그를 밀어 냈다. 비로소 그와 떨어진 그녀는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누구든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불편해요. 그게 레나토의 사람이면 더욱 그렇고요.”

    “미라벨, 부탁이야.”

    “정 그러면, 제가 저택 밖에 나갈 때만. 레나토 영지 내에서만 호위를 붙이는 걸로 하죠. 저택에 있을 땐 당신이 날 지켜요.”

    “내가 그래도 돼?”

    미라벨의 요구에 리카르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목울대를 위아래로 움직이던 그가 손을 내리고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널, 지켜도 돼?”

    “손님을 보호하는 건 가주의 의무잖아요?”

    “맞아. 그렇지.”

    리카르도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채를 띠는 눈동자를 보며, 미라벨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레나토에 돌아온 이후로 이토록 생기를 띠는 리카르도를 보는 건 이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 * *

    루이즈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녀 앞에 놓인 서류가 팔랑거릴 정도로 크게.

    “어떡하지.”

    날아가려는 서류를 잽싸게 잡은 루이즈는 이내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오펠리가 보면 체통 없이 군다고 혼낼 일이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다.

    “아, 미치겠네!”

    루이즈는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때, 마침 집무실로 들어오려던 아실과 그녀가 이마를 딱 부딪쳤다.

    “윽!”

    “뭐야, 아실!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허리를 굽힌 아실은 쌍둥이 누이의 외침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불쌍한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난 분명히 노크했어. 근데 머리가 뭐로 되어 있길래 이렇게 단단해? 으, 아파.”

    “뭐로 되어 있긴. 너랑 똑같은 걸로 되어 있지. 엄살 부리지 마.”

    루이즈는 아실에게 혀를 차고선 몸을 휙 돌렸다. 그녀는 집무실의 소파에 털썩 앉고서 동생에게 손가락을 까닥해 보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집무실은 문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는 애가.”

    “어떤 의미론 이번에도 머리가 아프게 되긴 했지.”

    아실은 꿍얼거리고선 루이즈 옆에 앉았다. 그가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자, 똑같이 팔짱을 끼고 있던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됐고. 어쨌거나 마침 잘 왔어. 너한테 가려고 했으니까.”

    “날 왜 찾았는데?”

    “샤를 말이야.”

    루이즈의 대답에 아실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루이즈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샤를 때문에 찾아온 건데.”

    “너는 왜?”

    루이즈의 질문에 아실이 입술을 오므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샤를을 레나토에 보내면 어떨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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