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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3화 (64/120)

63화

캐노피가 사방으로 드리워진 침대 안에서 검은 형체가 몸을 일으켰다. 황제였다.

두란테는 시종의 부축으로 겨우 앉은 황제를 멀찍이서 보았다. 그는 지금, 황제의 침실에 놓인 넓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갈수록 야위시는 것 같습니다.”

“쿨럭, 쿨럭!”

대답 대신 돌아온 기침 소리에 두란테가 입맛을 다셨다.

황제는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성치 않았다. 그렇기에 선황제가 서거하였을 때, 계승 서열 1위인 지금의 황제보다 그의 아우인 선대 대공이 거론되었다.

황위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황제는 두란테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 두란테는 그에게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황제는 자신의 목숨만 아니면 뭐든 좋다고 했다.

며칠 후, 선대 대공은 황제의 연인이었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황제는 분노하고 좌절하였으나 그 대가로 황위를 양보받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사건의 당사자들, 그리고 두란테 정도일까.

황제는 황위에 오르고 나서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걸 가지고 싶어 하는 그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이기심 덕에 선대 대공비는 황제의 씨를 품게 되었으며, 끝내 자살했다. 황제는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세기의 로맨스처럼 포장했던 그 대단한 사랑의 말로는 초라했다.

그리고 황제의 말로 또한, 초라해질 예정이었다.

“어서 강건한 모습을 되찾으셔야지요.”

두란테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황실 주치의 말로는, 황제는 길어야 반년이라 했다.

하지만 두란테가 주치의에게 쥐여 준 황금이 있으니 수명은 더욱 단축될 터.

“강건한 모습?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신경질적인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조만간 끝난다.

“있고말고요.”

두란테는 빙긋 웃으며 지팡이로 카펫을 가볍게 두들겼다.

“잊으셨습니까. 아카데미에서 활개를 치시던 폐하는 그야말로 태양 그 자체셨는데.”

“그랬던가.”

“알현실에 황태자를 앉히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아직 너무 이르지 않은지요. 폐하께서 이리 정정하신데.”

“내가, 쿨럭, 쿨럭!”

황제는 한참을 기침해 댔다. 그의 앙상한 몸이 들썩이자, 시녀가 다가가 시중을 들었다.

‘생각보다 진척이 빠르군. 좀 더 천천히 죽이라고 할 걸 그랬나?’

두란테는 알현이 끝난 후 다시 주치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머리를 굴리던 때, 잔뜩 쉰 음성이 귀에 파고들었다.

“내가 이 지경이라. 알현실을 비워 둘 순 없지 않나. 모자란 놈이라도 일단은 황태자이니까.”

“그것참…….”

두란테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초리에 침실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이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이윽고 황제와 단둘이 남게 되자, 두란테가 말을 이었다.

“애석한 일입니다. 황태자 전하보다는 레나토의 주인이 더욱 폐하를 닮았으니.”

“그 녀석도 요즘 성치 않다는데, 쿨럭!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곁에서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쾌유가 느린 듯합니다. 이제 곧 대공비의 3주기지요?”

“그게 뭐?”

“제 여식 줄리아가 대공을 기다리느라 혼기를 꽉 채웠습니다. 그 순진한 것이, 다른 사람은 죽어도 싫답니다. 아비로서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있지도 않은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하던 두란테가 본론을 꺼냈다.

“황명을 내려 주십시오. 줄리아와 대공의 혼인을 폐하께서 천명해 주시면, 대공도 더는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나중에. 그건 리카르도가 나은 뒤 해도 돼.”

“하오나 폐하.”

황제는 몸을 뒤척이고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요즘 내 몸이 부쩍 안 좋아. 주치의를 바꿔야겠어.”

“황실 주치의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입니다. 바꾸시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황명을…….”

챙강!

두란테가 다시금 황명을 청하자, 물컵이 날아와 대리석 바닥에 부딪쳤다.

두란테는 자신과 한 뼘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깨진 유리컵을 아연한 얼굴로 보았다. 황제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내가 아프다는데! 자네는 황명 얘기를 하고 싶은가?”

“송구합니다, 폐하.”

두란테는 목 끝까지 치달아 오르는 욕설을 삼키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허벅지를 꽉 쥐고서 이를 갈았다.

‘이기적인 놈.’

황제는 태생부터가 남에게 떠받들어진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고려해도 심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쉽게 화를 내곤 해, 친우들이 죄다 떨어져 나갔다.

황제의 친구가 두란테 하나뿐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두란테는 성질을 누르며 몸을 납작 숙였다.

“제가, 아비 된 마음으로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주치의를 바꿔야 한다면 그리하셔야지요. 황제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니까요.”

“……아달베르토의 주치의는 어떻지?”

“그럭저럭 쓸 만한 자입니다. 필요하시면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즉시 입궁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해.”

황제는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덧붙였다.

“차도가 생기면 그때 황명을 내리겠다. 내 벗을 위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또 리카르도와 줄리아를 제대로 맺어 주기는 해야 할 테고.”

“역시 생각이 깊으십니다, 폐하.”

두란테는 감동하는 어투를 지어내며 황제에게 절을 해 보였다. 황제는 제법 뿌듯한 듯 헛기침을 하고서는 두란테를 물렸다. 두란테는 순한 양처럼 문밖으로 나섰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두란테가 낯빛을 바꾸며 하인을 쏘아보았다.

“여태 마차도 안 불렀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죄송합니다!”

주인의 기분이 더럽다는 걸 알아챈 하인이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두란테는 하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츳, 하고 찼다.

‘주치의를 만날 건 없겠어. 예정대로 한 달 뒤에 죽게 해야지.’

두란테는 뒷짐을 지고서 느긋이 걷기 시작했다.

변덕이 심한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본래 자존심이 센 탓에, 욱하려는 걸 억누르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다.

다음 주의 건국제에서 대공과 줄리아의 혼인을 발표하고 나면 황제의 쓸모는 다한다.

두란테는 벌써부터 황실의 주인이라도 된 양 복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다, 복도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젊은 귀족과 눈이 마주쳤다. 금발의 귀족은 두란테를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달베르토 백작님! 이곳에서 다 뵙습니다. 폐하를 알현하셨나 보지요?”

“나를 찾으셔서 어쩔 수 없이 왔지. 미켈레 자작은 어인 일인가?”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미켈레의 대답에 두란테가 눈가를 움칠했다. 그는 복도 구석으로 미켈레를 데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래서, 어떻던가?”

“백작님이 옳으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선 저희 미켈레 상단에 관심이 없으시더군요. 백합 판매권을 따고 싶다고 했더니 백작님께 여쭤보라는 답만 들었습니다. 제가 바친 금화도 거절하셨고요.”

“그랬군.”

두란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란테에게 백합 독점 판매권이 있으니, 발레리오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다.

하지만 원칙대로 굴러가기만 하는 게 세상일은 아니다.

미켈레는 뇌물을 바치고서 황태자가 권한을 휘둘러 주길 기대했을 터다.

그러나 황태자는 뇌물을 밝힐 인물이 아니다. 미켈레가 거절당하는 것까지 모두, 두란테가 예측한 대로였다.

“황태자 전하께선 고지식하시지. 그런 분이 제국을 이끄실 걸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져.”

두란테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고서 속삭였다.

“아달베르토 상단에서 판매하는 백합을 미켈레 상단에 일부 나눠 주지. 수수료는 아주 조금만 받고 말일세.”

“정말이십니까?”

꿀같이 달콤한 회유에 미켈레가 눈을 크게 떴다.

백합은 부르는 게 값이니, 수수료를 얼마를 떼든 상관없다. 두란테는 흥분하는 미켈레를 다독이며 슬그머니 말했다.

“그래, 다만 자네가 내게 힘을 보태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해 백작님을 돕겠습니다!”

미켈레의 대답에 두란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리카르도 비토레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국구가 되어 제국을 손아귀에 쥐는 두란테의 미래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미라벨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적갈색 머리의 청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미라벨이 걸음을 멈추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만 따라왔으면 하는데.”

에치오는 왕녀의 요청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오늘 오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주군, 그러니까 대공 전하의 명으로 미라벨 왕녀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왕녀님이 어딜 가시든 제가 따를 겁니다.”

“저택 안에서도?”

“예.”

미라벨은 무뚝뚝한 에치오의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에게 샤를의 존재를 들킨 다음 날, 미라벨은 소피와 함께 마구간으로 갔다. 루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찾으려던 루체 대신에 리카르도와 마주쳤고, 그는 미라벨이 몰래 떠나려고 한다고 오해하였다. 그 결과 에치오가 그녀의 호위로 붙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날 따라다닐 건가?”

“주군께서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에 미라벨은 갑갑함을 느꼈다.

미라벨은 원래 서재로 가려 했다. 자신이 과거에 그렸던 지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지도에는 세골린데의 국경 정보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모국에 독이 되는 물건이니 없애야만 했다.

하지만 에치오가 계속 따라다닌다면 지도를 없애긴커녕 찾아볼 수도 없을 터.

‘이대론 안 되겠어.’

미라벨은 굳은 결심을 하고서 몸을 틀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에치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라벨 왕녀가 무척 익숙한 듯이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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