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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2화 (63/120)
  • 62화

    수정구를 바라보던 미라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표정이 무너지자, 수정구 너머의 샤를이 울음을 터뜨렸다.

    [흐에엥. 어마아, 울지, 끅, 울지 마아아.]

    “……소피.”

    “네, 왕녀님.”

    미라벨은 간신히 소피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눈치 빠르게 수정구를 챙기고 일어섰다. 소피는 수정구 안의 샤를을 다독이며 옆방으로 갔다.

    닫힌 문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다가 차츰 잦아들었다.

    이내 샤를의 울음이 완전히 그칠 때까지, 미라벨은 입을 열지 않았다. 리카르도도 마찬가지였다.

    녹색 방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미라벨의 머리가 어지럽게 회전하였다.

    샤를이 연인이라는 거짓말을 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게 들통났다는 건 둘째 치고, 리카르도가 샤를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냐, 아직…….’

    미라벨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임신했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샤를이 자신의 아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할 터.

    “샤를이었군, 이름이.”

    하지만 미라벨의 예측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우리 아이 이름이, 샤를이었어.”

    감격에 잠긴 목소리를 들은 그때에.

    “아뇨.”

    미라벨은 방어적으로 말하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치마를 쥔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우리한테 아이 같은 건 없어요.”

    “미라벨.”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서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창백한 미라벨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고서 입을 열었다.

    “주치의에게 다 들었다. 네가 임신했었다는 거 알고 있어.”

    리카르도의 설명에 미라벨이 흠칫하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서 천천히 말했다.

    “샤를의 아버지는 당신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지?”

    리카르도의 질문에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그는 미라벨을 응시하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몇 살이지? 임신했을 당시 네게는 나밖에 없었어. 그러니…….”

    “아니라고 했잖아요.”

    리카르도의 눈길을 피하던 미라벨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독기가 서린 눈으로 리카르도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누구도 당신의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죠.”

    잔인한 과거를 신랄하게 읊는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그 집념이 어찌나 굉장하셨는지 설마 그새 잊으셨나요, 전하? 내가 그만해 달라고 빌어도 자신의 실수를 덮기에만 급급했으면서?”

    미라벨의 추궁에 말문이 막힌 리카르도의 눈가가 굳었다. 미라벨은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신의 아이는 죽었어. 당신이 죽인 거야. 아르밀라와 함께.”

    리카르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손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쓸고서 말했다.

    “미안해. 아이를 갖는 게 무서워서 그랬어.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사과가 참 쉽네요.”

    미라벨은 시선을 떨구는 리카르도에게 차게 식은 실소를 던졌다. 그러곤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면 내 앞에서 사라지세요. 꼴도 보기 싫어.”

    “미라벨…….”

    “당신의 검은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내가 비렁뱅이가 아니라 왕녀라서 다행스럽겠죠. 당신의 아들이 길거리 여자가 아니라, 왕녀의 핏줄을 받아서 기쁠 거예요. 안 그래요?”

    “무슨, 아니. 난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럼 왜 아르밀라는 안 되고 미라벨은 되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미라벨은 입술을 비틀다가 분노를 토하듯 말했다.

    “당신은 아르밀라의 자식은 죽이려 했잖아. 그런데 왜, 미라벨의 자식은 반기는 건데? 내가, 미라벨이 왕녀라서잖아!”

    “아니야!”

    리카르도는 다급히 외쳤다. 단연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르밀라에게 사랑 표현을 하지 않았던 건 그가 어리석어서였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몰랐으니까.

    그녀를 잃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이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말하든 미라벨은 믿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이랬으니까.

    얄궂게도, 오해하기 딱 좋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의혹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녀를 잃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네가 왕녀이길 바란 적은 없어.”

    리카르도는 간절히 말했다. 미라벨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건 알아. 하지만 내가 그런 건 결단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지.”

    리카르도는 조심스럽게 미라벨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녀가 인상을 쓰는 바람에 마음이 덜컹했지만, 그래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를 잃고 난 다음에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너를 사랑하면서도 그게 사랑이라는 것도, 어떻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지.”

    “사랑?”

    리카르도의 절절한 고백에 미라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리카르도가 가증스러웠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뭐든지 다 합리화될 거로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오산이다.

    미라벨은 ‘사랑’을 혐오하니까.

    한때는 리카르도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아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사랑만큼 미라벨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었다.

    “사랑이라. 편리한 변명이로군요.”

    사랑을 입에 올린 미라벨의 온몸이 차게 식었다. 그녀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당신은 내 사랑을 실컷 짓밟았어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날 사랑했다고요? 당신의 사랑은 필요 없어요. 이젠…….”

    미라벨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찰랑였다. 그녀는 리카르도에게서 등을 돌리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젠 너무 늦었어.”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슬픔을 겨우 삼킨 그녀가 결연히 말했다.

    “샤를에겐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니 세골린데 왕실에 권리를 요구할 셈이라면 꿈 깨세요. 절대 당신을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리카르도는 다급히 일어나 미라벨에게 갔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나한테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제발 내치지만 말아 줘.”

    “부모의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면, 샤를이 당신과 나의 아이라는 말도 입에 담지 말아요.”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싸늘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난 그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1초도 없어요. 샤를은 나만의 아이예요. 대공 전하의 아이가 아니라.”

    “그래, 그 아이는…… 네 아이지. 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그럼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네요. 가세요.”

    미라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맺고서 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간절히 시선을 올렸다.

    “혹시 괜찮다면.”

    “뭐죠?”

    “아이를 한 번만 봐도 될까?”

    “왜요?”

    리카르도의 청에 미라벨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그녀의 반응에 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까 너무 스치듯이 봐서, 그래서 제대로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뭐라고 할지 알고 있잖아요.”

    완곡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모든 게 그가 뿌린 죄의 결과였다.

    리카르도는 쓰게 웃었다.

    그나마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게 어딘가. 그 사실에 감사하자.

    미라벨 왕녀가 아르밀라라는 걸 안 순간, 리카르도의 머리를 스친 건 아이였다. 아르밀라가 품었던 아이.

    리카르도는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서 미라벨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는데.

    미라벨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했다. 리카르도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왕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착각하지 마세요.”

    미라벨은 팔짱을 끼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당신 곁에 있었을 때만 했을까. 난 아주 행복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

    리카르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기운이 나질 않았다.

    아마도 미라벨에게 리카르도가 어떤 의미인지 확인해서일 터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원망하는 사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사람.

    여기에 사랑이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그 사실이 리카르도를 슬프게 하였다.

    * * *

    두란테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황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그가 가는 길 끝에는 황제의 침실이 있었다.

    황제의 병증이 심해져, 일반 귀족들의 알현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귀족회의 원로이자 황제의 친우인 두란테는 예외였다. 그는 황제의 부름 없이도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고하시게.”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선 두란테가 경비병에게 명했다. 그러자 경비병 중 하나가 침실에 들어갔다.

    두란테는 경비병이 나오길 기다리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곧 있으면 대공비의 3주기가 된다.

    그 말은 즉, 대공이 재혼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함을 의미했다. 제국의 고위 귀족은 배우자가 죽고 3년이 지나야 재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시지요, 아달베르토 백작님.”

    경비병과 함께 나온 시종장의 깍듯한 인사에 두란테는 눈을 빛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남은 건 황제를 꼬이는 것뿐.

    두란테는 거드름을 피우며 황제의 침실로 걸어갔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복도에는 스산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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