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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1화 (62/120)
  • 61화

    “샤를 왕자님은…….”

    “소피.”

    미라벨은 무심코 리카르도에게 대답하려는 소피를 황급히 막았다.

    소피는 샤를의 존재를 리카르도에게 숨겨야 한다는 걸 모른다. 미라벨은 어리둥절해하는 소피에게 재빨리 말했다.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었거든.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 줄래?”

    “아, 네! 죄송합니다.”

    소피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서 무릎을 굽혔다. 소피가 수정구와 함께 다시 옆방으로 돌아가자, 미라벨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겨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쉬이 넘어가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소피가 자리를 뜨는 동안에도 미라벨에게 고정한 눈길을 옮기지 않았다. 미라벨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다 보셨죠? 이만 가세요.”

    “대답해 줘.”

    “뭘 말이에요?”

    미라벨이 태연히 대꾸하자, 리카르도가 성큼 다가왔다.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바짝 다가온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팔뚝을 거머쥐었다.

    “샤를이 누군지 물었잖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미라벨은 자신을 잡은 리카르도의 손을 쳐 냈다. 힘을 싣지 않은 손짓에도 그는 쉽게 물러났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아 하니 지금의 상황을 소화하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세골린데에 연락해야 하니, 그만 나가 주세요.”

    “세골린데의 남자인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미라벨은 실소했다.

    아무리 샤를의 정체를 모른다지만 말도 안 되는 오해다. 하지만 그걸 굳이 바로잡아 줄 필요는 없었다. 미라벨이 웃자 리카르도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자를 사랑해?”

    “사랑해요.”

    미라벨은 단번에 대답했다. 그게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미라벨에게 샤를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샤를은 그녀의 희망이자 미래였다.

    샤를이 있어 레나토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죽고 싶은 순간을 버텨 냈다.

    리카르도를 증오하여 떠났어도 미라벨의 가슴 깊은 곳에는 그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세골린데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는 때때로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미웠다. 배알도 없이 여전히 리카르도를 사랑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 탓에 한동안 미라벨의 감정은 널을 뛰었다. 리카르도가 보고 싶었다가, 그런 자신이 싫어졌다가, 이런 시련을 겪게 만든 세상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미라벨의 마음을 다잡아 준 건 샤를이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미라벨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

    미라벨이 없으면 안 되는, 미라벨이 세상 그 자체인 아이.

    그 아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 아들을 떠올리는 미라벨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살피던 리카르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왕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저는 결혼에는 뜻이 없어요. 누구 덕에 결혼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어서요.”

    차가운 말에 리카르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미라벨은 죄인처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리카르도에게 무심히 말했다.

    “나가 달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죠?”

    “……그자와 행복한가?”

    “행복해요.”

    미라벨의 대답에 리카르도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참담한 심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다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걸음 소리와 함께 방의 문이 여닫혔다.

    리카르도가 사라지자, 미라벨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괜찮아, 잘했어.’

    샤를의 이름을 리카르도가 듣게 된 건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그 덕에, 미라벨에게 연인이 있다고 그가 오해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다소 어설픈 거짓말이었건만 리카르도는 그대로 믿었다. 아마도 아직 정신을 완전히 다잡지 못한 탓 같았다. 미라벨은 이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 레나토를 떠날 수 있게 되길 빌었다.

    “소피, 들어와.”

    미라벨은 옆방의 문을 두드리며 소피를 불렀다. 소피가 수정구를 챙겨 녹색 방으로 들어오자, 미라벨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우리 샤를을 볼까?”

    소파에 앉은 미라벨이 수정구에 손을 얹고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커다란 진주 같은 수정구의 내면이 일렁였다.

    곧이어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환한 빛이 퍼져 나오고, 수정구 안에 세골린데 왕궁의 풍경이 나타났다.

    “샤를?”

    [어마!]

    수정구를 코앞에 갖다 대었는지, 구슬 가득 아이의 얼굴이 채워졌다. 미라벨은 쿡쿡 웃으며 다정히 말했다.

    “샤를, 오늘도 루이즈 이모 말 잘 들었어?”

    [으응! 어마 몇 밤 지나야 와요?]

    기대에 가득 찬 아이의 질문에 미라벨은 눈썹을 모았다. 그녀는 곁에 앉은 소피와 눈빛을 교환하고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참은 더 여기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줘야 한다. 하지만 아이의 또랑또랑한 눈을 보니 목이 탁 막혔다.

    “샤를, 그게…….”

    [어마, 히잉, 언제 와아…….]

    미라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수정구 너머의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미라벨은 황급히 수정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착하지, 샤를. 엄마가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할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엄마라고?”

    샤를을 달래던 미라벨은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음성에 눈을 크게 떴다.

    리카르도가 돌아와 있었다.

    그 사실에, 그녀의 심장이 철렁하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어깨를 짚었다. 그는 수정구 너머의 샤를을 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우리 다시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왕녀.”

    미라벨은 앉은 자세 그대로 치마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서 수정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리카르도의 흑발을 닮은 아이가 눈물을 매달고서 엄마를 보고 있었다.

    * * *

    미라벨에게 연인이 있다.

    그 단순하고 잔인한 사실은, 리카르도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미라벨은 아름답고 고귀하며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녀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니 연인이 있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어째서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도리어 그게 놀랄 일이었다.

    “젠장…….”

    녹색 방의 문을 등지고 선 리카르도는 비참함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었다.

    가까스로 방 밖으로 나설 순 있었으나, 더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세상이 뒤집힌 것같이 속이 울렁였다.

    동상처럼 굳어 선 리카르도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몇 번 호흡하자 목을 조이도록 바짝 맨 크라바트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도는 신경질적으로 크라바트를 풀고서 움켜쥐었다. 미라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얄팍한 계획으로 치장을 한 꼴이 우스웠다.

    이미 다 늦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향유를 섞은 물에 목욕하고, 머리를 깔끔히 빗어 올리고, 가장 멀끔한 정복을 찾아 입었다.

    리카르도는 비소를 머금었다. 이미 아르밀라는, 미라벨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를 완전히 잊었다. 다른 자를 사랑한다. 그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증오한다는 사실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건 너무 버거운 사실이었다.

    미라벨을 포기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리카르도가 인상을 썼다.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포기한다는 건 살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리카르도에게 미라벨은 인생 그 자체였으니까.

    ‘하다못해…… 두 번째라도 좋아.’

    그렇기에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두 번째 남자라도 되고 싶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치 않았다.

    두 번째면 어떠한가.

    미라벨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과분하다. 이미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리카르도는 마음을 굳히고서 고개를 들었다. 미라벨에게 정부로라도 좋으니 자신을 받아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리카르도는 풀었던 크라바트를 비장하게 묶고서 문으로 몸을 돌렸다.

    파아앗—

    그 순간이었다. 문틈 사이로 찬란한 빛이 쏟아진 것은.

    놀란 리카르도는 문에 얼굴을 기댔다. 당장 들어갈까 했지만, 허락도 없이 들어갈 만큼의 위기 상황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일단은 상황을 보고자 귀를 기울였는데…….

    [어마!]

    들려온 건 뜻밖에도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리카르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미라벨의 음성에 그는 문을 열어 버렸다.

    열린 문 사이로 미라벨과 그녀의 시녀, 그리고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정구가 보였다. 리카르도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마, 히잉, 언제 와아…….]

    미라벨이 사랑한다는 ‘샤를’을 본 리카르도는 숨을 들이켰다.

    수정구 안의 샤를, 그 아이는.

    리카르도의 흑발과 미라벨의 청안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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