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오셨습니까?”
미라벨이 저택으로 들어오자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붙었다. 파올로는 쩔쩔매며 베일을 쓴 왕녀에게 굽신거렸다.
“왕녀님, 묘는 잘 둘러보셨습니까?”
“덕분에.”
미라벨은 간결하게 대답하고서 계단으로 향했다. 지금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파올로는 끈질기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꾸준히 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왕녀님의 묘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 뒤로도요.”
“고맙네.”
미라벨은 퉁명스레 말했다.
그녀는 파올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파올로는 비앙카를 비롯한 하녀들이 아르밀라를 괴롭히는 걸 묵과했다.
때로는 그가 직접 나서서 아르밀라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파올로는 사람을 철저히 신분과 이용 가치로만 판단하는 자였다. 출신을 모르는 아르밀라는 험하게 대하고, 귀한 왕녀에게는 굽실거리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추위에 몸을 녹이시도록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뭐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계단까지 졸졸 따라오는 파올로를 무시하던 미라벨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서 집사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생색을 내는 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게 투명하게 보였다.
“내게 할 말이 따로 있나?”
“예, 그것이…….”
파올로는 주변을 잽싸게 둘러보았다. 복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 제 얘기를 좀 잘 부탁드립니다.”
파올로의 얘기에 미라벨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비앙카도 그렇고, 파올로까지. 왜 다들 그녀에게 대공에 관한 일을 부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정말 모르겠네.”
말끝에 한숨을 쉰 미라벨이 파올로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왜 집사가 손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왕녀님이시니까요.”
파올로는 눈을 빛냈다. 그의 비굴한 모습에 미라벨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르밀라한테는 딱딱하게 굴던 꼬장꼬장한 집사였는데. 그가 이렇게 샐샐 웃으며 아첨을 잘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파올로는 미라벨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레나토의 안주인이 되셨을 분이시지 않습니까.”
“대공비는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아, 그 여자요……?”
미라벨이 일부러 입에 올린 ‘대공비’라는 단어에 파올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찝찝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죽었습니다. 진작에요.”
“그랬군. 어쩌다가?”
미라벨은 팔짱을 끼며 호기심 어린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파올로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집사가 매우 난감했겠어. 대공비가 요절했으니.”
“그렇다마다요. 하지만 그런 여자가 대공비 자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야 낫지요. 아르칸젤로 제국의 대공비는 왕녀님처럼 고귀한 분이 되셔야 하는 법이니까요.”
“……어떤 여자였길래?”
“입에 담기조차 남사스럽습니다만, 여쭤보시니 고하지요. 그저 가주님의 침대를 데우는 여자였습니다. 얼굴 하나로 가주님을 꼬여서는, 온갖 분란만 일으켰습니다. 그 여자 때문에 대공가가 어찌나 소란스러웠는지.”
“그래?”
“예에, 말도 마십시오. 가주님께서도 어쩌다 그런 여자한테 홀리신 건지. 아주 정신을 못 차리시더라니까요. 그나마 왕녀님께서 오시고서부터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계십니다.”
“집사는 그렇다고 하는데, 대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나요?”
파올로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던 미라벨이 돌연 시선을 멀리 던졌다.
파올로는 움찔하고서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계단참 아래에 선 대공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라벨의 뒤를 따라온 리카르도는 파올로가 아르밀라를 모욕하는 것을 고스란히 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입을 나불대던 파올로는 시퍼렇게 질렸다.
“히익! 가, 가주님!”
“죽여야 할 것을 살려 둬 줬더니.”
리카르도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가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자, 파올로가 털썩 주저앉았다.
파올로는 왕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서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도, 도와주십시오, 왕녀님!”
“건드리지 마.”
미라벨은 차갑게 말하며 파올로의 손을 떼어 내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리카르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용인의 문제는 대공께서 해결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대답을 듣고 몸을 돌렸다.
파올로는 가여운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걸 베풀지 않고서 아르밀라를 괴롭혔다.
그래서 미라벨도 위기에 처한 그에게 동정심을 베풀지 않기로 했다. 방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차분하였다.
* * *
대공저는 집사의 갑작스러운 해임으로 한동안 어수선하였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새로운 집사를 금방 구하였다. 파올로의 해고를 진작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했다.
아달베르토령 출신이라는 새 집사는 유능한 자 같았다. 미라벨이 머무는 녹색 방이 전보다 훨씬 더 정갈하게 꾸며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곧 있으면 샤를이 저녁 먹을 시간이네.”
“네, 수정구를 가져올까요?”
목욕을 마친 미라벨의 얘기에 소피가 기민하게 물었다. 소피는 왕녀의 탐스러운 금발을 정성껏 빗질해 주며 말을 이었다.
“어제는 엉엉 우셨죠. 오늘은 좀 금방 진정되셔야 할 텐데.”
“여기에 더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 줘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져.”
“그러실 만도 하죠.”
소피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그녀는 레이스가 목선을 감싼 잠옷 차림의 왕녀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샤를 왕자님도 왕녀님과 이렇게까지 오래 떨어져 있는 게 처음이니까요.”
“그건 그래.”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미라벨의 머리를 땋아 준 소피가 남은 리본을 내려놓고서 방 밖으로 나갔다. 화장대 앞에 앉은 미라벨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한 달 넘게 여기에 있게 되려나?’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긴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다리가 무너진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보수 공사가 안 된다면 세골린데로 돌아가기라도 할 텐데,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건국제는 물 건너갔네.’
미라벨은 입술을 모으며 생각했다. 황제를 만나 협정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이래선 힘들다.
게다가 세골린데에서 가져온 백합 구근이 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일이 어그러지려니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십니까?”
미라벨의 고민을 가르고 리카르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문가에 기대서 있는 그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미라벨은 가운을 여미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거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 시각에 여인의 방을 찾아오시면 안 되지요.”
“제 방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리카르도는 바르게 서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며칠 전 보았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미치광이 흉내는 그만둔 건가?’
미라벨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집사를 정리하던 때에도, 제법 제정신처럼 보였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가던 길 가셔요.”
“고민이 있으시다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있기야 하죠.”
미라벨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한 리카르도의 얼굴이 굳었다.
“대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데, 레나토를 바로 나갈 수 없으니 그게 고민이에요. 이걸 어떻게 도와주실 거죠?”
신랄한 말을 들은 리카르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어.”
미라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절절한 고백을 들었다.
리카르도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손을 내렸다.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어…….”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
한바탕 울고 난 사람 같은 음성에 미라벨이 눈을 돌렸다.
차라리 미치광이 흉내를 낼 때가 나았다.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애절하게 구니, 마음이 갑갑했다.
“그만 가세요.”
미라벨의 축객령에 리카르도의 커다란 몸이 움찔했다. 그는 미라벨을 아련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보고 갈게.”
“싫어요.”
“용서해 달라고 하지도 않을게.”
리카르도는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떨궜다.
“그래도 안 될까.”
미라벨은 간절한 부탁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리카르도가 저자세로 구니, 그녀 스스로가 못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작 악인은 리카르도인데도.
“일단 나중에…….”
“왕녀님, 많이 기다리셨죠?”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다시 한번 내치려는 때였다.
녹색 방과 이어진 방에 있던 소피가 수정구를 품에 안고서 등장했다. 그녀는 문 뒤에 서 있는 리카르도를 미처 보지 못하고서 말했다.
“샤를 왕자님이 아까부터 왕녀님을 기다리고 있었대요.”
“샤를?”
리카르도가 소피가 말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미라벨의 가슴이 철렁했다.
‘침착해, 미라벨.’
미라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도망친 당시 임신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우고에게 부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미라벨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미라벨의 시선을 피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샤를이 누구지?”
소유욕과 집착이 가득한 질문이었다.
미라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초조해하며 소피가 안고 있는 수정구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