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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9화 (60/120)

59화

“왕녀는 어디에 있지?”

조바심이 묻어난 질문에 나시르가 눈을 굴렸다. 그가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리카르도가 눈을 부릅떴다.

“대답해라, 나시르.”

“저는 말렸습니다.”

나시르의 대답에 리카르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설마, 그새 떠난 건가?’

왕녀는 한시라도 빨리 레나토를 떠나고 싶어 했다. 눈이 멈추면 가 달라고 리카르도가 부탁했지만, 그녀가 그 청을 받아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젠장.’

리카르도는 저택의 정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람이 몰아치며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가 엄습해 왔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사를 불렀다.

“파올로!”

“예, 예, 가주님.”

“말을 준비해라. 당장.”

“예?”

파올로가 당황하여 되묻자, 리카르도가 초조함에 문을 움켜쥐었다.

“어서!”

“하지만 가주님, 갑자기 말은 왜…….”

파올로가 굼뜨게 굴자, 리카르도의 인내심이 끊겼다.

리카르도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붙잡는 나시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외침을 무시하고 마구간 쪽으로 달려갔다.

초조했다. 겨우 아르밀라를 만났는데, 놓칠 순 없었다.

“전하!”

나시르는 온 힘을 다해 리카르도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대공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결국 나시르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 리카르도를 향해 크게 외쳤다.

“왕녀님은 묘지에 가셨습니다!”

나시르의 얘기를 들은 리카르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눈이 흩날리는 길 위에 서서 가슴을 들썩였다.

리카르도가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시르가 힘겹게 달려왔다.

“전, 전하. 허억, 헉!”

가까스로 리카르도에게 온 나시르가 그의 발치에 구두를 놓아 주었다.

“우선, 이것부터 신으십시오.”

리카르도는 그제야 자신이 맨발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신발을 신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묘지에 갔다고?”

“예, 눈이 그치거든 가시라고 했는데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얘길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나시르는 난처해하며 대공을 보았다. 얇은 흰 셔츠는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풀어 헤쳐져 있는 데다가, 아래는 검은 바지를 입은 게 전부다.

외투를 두 겹씩 입어도 이가 부딪치도록 추운 날씨인데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건 생각하지 못했어.”

혼잣말을 한 리카르도가 나시르를 보았다. 그는 차분해진 눈으로 나시르를 보며 물었다.

“그다음에 바로 수도로 출발한다고 하던가?”

“그러시려고 했는데, 눈 무게 때문에 라그나르 다리가 무너져서요.”

“다리가 무너져?”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설명에 눈을 가늘게 떴다.

라그나르 다리는 수도와 레나토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엄밀히 말하면 ‘유일’한 다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겨울에는 그랬다. 다른 다리들은 눈이 쌓이면 그 아래에 파묻히기 때문이었다.

“언제 무너졌지?”

“어젯밤에요. 그 소식을 전해 드렸더니 왕녀님께서 무덤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셨고요. 저택 안에만 계신 게 갑갑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리 보수 작업은?”

“이 날씨에 보수하려면…….”

대공에게 보고를 하던 나시르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마음을 읽은 리카르도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눈이 녹아야 가능하겠군.”

“예. 그렇습니다.”

“지금은 눈산을 넘기도 어려울 테니 세골린데로도 가지 못하겠고.”

“그렇지요.”

나시르의 대답을 듣자마자 리카르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시린 눈으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다행이야…….”

“네?”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친절한 설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한참을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그는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야지.”

리카르도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이 말했다. 그러고서는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미라벨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서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소피와 함께 사라의 묘에 찾아와 있었다.

눈사태로 인해 아르칸젤로의 수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무너지고, 세골린데로 돌아가는 것 또한 요원해졌다.

일이 자꾸 꼬였다.

가뜩이나 루체에게 들은 얘기 때문에 심란한데. 이곳을 바로 떠날 수 없다니.

“감사해요, 왕녀님.”

생각에 잠겨 있던 미라벨은 소피의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내가 소피와 사라에게 고마워해야지.”

미라벨은 소피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피가 원한다면 묘를 이장해 줄게.”

미라벨의 제안에 소피가 말없이 묘를 바라보았다.

왕녀의 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던 곳에는 이제, ‘사라 레옹틴의 묘’라는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피는 새 비석을 쓰다듬고서는 씁쓸히 말했다.

“마음 같아선 데리고 가고 싶어요. 하지만 편히 잠들어 있는 사라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소피는 비석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사라를 데리고 눈산을 거슬러 가는 것도 큰일일 테고요.”

“그래.”

미라벨은 소피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토에 사라를 두고 가야 한다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소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라의 가족인 소피의 뜻에 따라 주고 싶었다.

“언제든 사라를 보고 싶으면 레나토로 와. 대공의 보좌관에게 얘기해 놓을게.”

“대공 전하가 아니라요?”

소피의 질문에 미라벨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라벨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소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누구든 상관없겠죠. 레나토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요.”

“그래. 그리고 보좌관이…….”

“제게 말씀하십시오.”

소피에게 대답하던 미라벨은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음성에 입을 다물었다.

정복을 차려입은 리카르도가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미라벨이 몸을 돌리자, 그와 그녀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리카르도는 그 순간 잠깐 눈매를 좁혔다가 곧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레나토에서는 눈이 그치거든 외출하시는 게 좋습니다. 하늘이 변덕스러우니까요.”

리카르도는 가슴에 손을 얹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정중하게 말했다.

미라벨은 치마를 움켜쥐며 그를 응시하였다. 그녀가 말없이 대공을 바라보고만 있자, 둘 사이의 분위기를 살피던 소피가 앞으로 나섰다.

“그렇네요, 날이 변덕스러우니 우산이라도 가져와야겠어요. 대공 전하, 잠시 왕녀님과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리카르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피가 미라벨에게 눈짓을 하고서 자리를 떴다.

미라벨은 소피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드는 것보다 소피가 더 재빨랐다.

“대화 나누고 계세요!”

소피는 미라벨과 대공 사이에 감정의 기류가 흐른다는 걸 잡아낸 듯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달콤한 핑크빛이 아니라는 건 미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닌데.’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멀어지는 소피를 보았다. 그녀는 나중에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내 걸음을 옮겼다.

미라벨이 소피가 간 방향으로 발을 디디자,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라벨을 막아선 리카르도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미라벨이 옆으로 가려 하자, 그가 다시금 막으며 말했다.

“시녀를 기다리시지 않고요.”

“당신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미라벨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리카르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미라벨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레나토에 머무르시는 동안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요?”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그를 지나쳐 가려 하자, 리카르도가 손을 뻗었다.

거칠지만 차가운 손이 미라벨의 손을 거머쥐었다.

미라벨은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굴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가 눈을 내리깔자 속눈썹이 하얀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리카르도는 신자처럼 경건한 태도로 미라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발. ……미라벨.”

리카르도의 짙은 부름에 미라벨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리카르도는 줄곧 미라벨을 왕녀, 혹은 아르밀라라고 불렀다.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부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붙잡힌 손을 거두었다. 고작 이름 좀 불린 것으로 흔들릴 거라면, 진작 흔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흔들릴 거였다면, 애초에 그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스쳐서 걷기 시작했다. 그를 완벽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미라벨!”

미라벨이 저택을 향해 걸어가자, 애처롭고 안타까운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미라벨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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