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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8화 (59/120)
  • 58화

    화병을 들고 온 루체와 미라벨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미라벨은 루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베일을 썼다. 그때,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다.

    “루체!”

    미라벨은 깜짝 놀라며 루체에게 달려갔다. 화병을 떨군 루체가 넋을 잃고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윽, 허어, 엉…….”

    이내 하녀복의 앞치마가 잔뜩 젖은 채로, 루체가 입을 벌리고 울기 시작했다. 미라벨은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루체의 어깨를 황급히 잡았다.

    “여기 앉으면 안 돼, 다쳐.”

    “어엉, 엉, 아, 아르미라 니임!”

    “쉿, 루체. 착하지.”

    루체는 다정한 미라벨의 다독임에 울컥하여 그녀에게 와락 안겼다. 미라벨은 루체가 화병 조각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발을 옮겼다.

    ‘난처하네.’

    만약에 자신이 아르밀라라는 걸 누군가에게 밝히게 된다면, 그건 나시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루체가 바로 미라벨을 알아보았다. 그녀와 붙어 있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 히끅! 보고, 싶었어요!”

    루체는 소파로 옮겨 와서도 미라벨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미라벨은 난감해하며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착하지, 울지 마. 응?”

    “흐윽, 윽, 윽!”

    루체는 미라벨이 시킨 대로 눈물을 삼키려고 애를 썼다. 딸꾹질까지 하면서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루체를 보는 미라벨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진땀이 나는 것 같았다. 루체에게 아르밀라가 아니라고 발뺌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어떻게 설득해서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왜, 히끅! 왜 왕녀님이 됐어요?”

    미라벨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제법 진정한 루체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라벨은 입술을 축이고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난 원래 세골린데의 왕녀야.”

    자포자기한 미라벨의 대답에 루체가 붉게 물든 눈가를 문질렀다. 그녀는 미라벨의 양 볼을 붙잡고서는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아르미라 님인데…….”

    “아르밀라는.”

    죽었어.

    미라벨은 혀끝에 맴도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루체에겐 그런 잔인한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거머쥔 루체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말했다.

    “내가 아르밀라라는 거,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비밀?”

    “응, 루체와 나 사이의 비밀.”

    미라벨은 새끼손가락을 루체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빤히 보던 루체가 심각하게 말했다.

    “제가 비밀을 지키면, 아르미라 님은 더는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은 거죠?”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에 미라벨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는 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체는 미라벨의 조용한 대답을 받고서 비장하게 말했다.

    “그럼 비밀, 지킬게요.”

    루체는 미라벨과 손가락을 걸고서 눈을 빛냈다.

    그녀는 미라벨과 눈이 마주치자 턱이 호두처럼 쪼글쪼글해지도록 힘을 주었다. 울음을 참으려 하는 것 같았다.

    “계속, 아르미라 님 모른 척해야 해요?”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땐 괜찮아.”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알은척해도 돼요?”

    “그래.”

    “헤헤.”

    미라벨의 허락에 루체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미라벨의 손을 잡고서 주물럭거렸다.

    “되게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르미라 님. 다 아르미라 님이 죽었다고 해서 화났어요.”

    루체는 미라벨에게 고자질을 하듯이 종알거렸다.

    “그래서 가주님이 막 화냈어. 아르미라 님 죽였다고 마수도 다 죽이고, 루체한테도 물어봤어요.”

    “물어보다니, 뭘?”

    “아르미라 님 어디 갔냐고요.”

    루체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을 비비며 코를 훌쩍였다.

    “가주님 많이 무서웠어요. 막…….”

    루체는 미라벨의 손이 아프도록 그녀를 세게 잡았다. 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르미라 님 장례식 하고, 붉은 방에서 가주님 봤어요. 너무 무서웠어…….”

    “붉은 방? 거기서 대공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미라벨은 붉은 방에서 보낸 끔찍한 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정신을 놓게 만들 만큼 기괴한 공간이었다.

    미라벨은 혹여 루체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전부 다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주님이, 붉은 방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누워 있었어요.”

    “……뭐?”

    “아르미라 님 장례식 치렀으니까 가주님도 다 끝내고 죽으려는 거라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루체의 설명에 미라벨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피를 흘리고 누워 있었다니? 그게 무슨…….”

    “가주님이 손목을 그었어요. 이렇게!”

    루체는 손날로 손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래요.”

    “그 사람이…… 그랬다고?”

    미라벨은 루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썹을 움칠하다가 눈을 찡그렸다.

    리카르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니.

    들으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리카르도가 엉망으로 망가진 걸 보았을 때는,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가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친 걸로 생각했다.

    그는 모든 걸 제 손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는 자였으니까. 아르밀라가 리카르도의 통제를 벗어나 사라졌으니, 그 성미에 버티지 못한 것쯤으로 여겼다.

    미라벨이 아르밀라라는 걸 알고서 좌절한 건, 그녀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세상에 의지할 곳 없는 아르밀라를 대하듯이 미라벨을 마구 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미라벨에게 무릎을 꿇은 게 아닐까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놓친 걸 붙잡으려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아르미라 님?”

    미라벨이 하얀 이로 붉은 입술을 지그시 물자, 그녀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피를 본 루체는 깜짝 놀라며 미라벨을 크게 불렀다.

    “아르미라 님!”

    “……난 괜찮아.”

    이내 정신을 차린 미라벨이 루체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는 루체가 내민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고서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멍했다. 어제 보았던 리카르도의 절망 어린 모습이 가슴을 꽉 틀어막았다. 속이 답답해진 미라벨이 혼란스러워하며 인상을 썼다.

    ‘설마, 그게 다 진심이었다고?’

    미라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리카르도가 과거에 아르밀라에게 했던 일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까.

    미라벨은 이마를 짚고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후후, 하고 숨을 내쉬자 루체가 고개를 틀며 미라벨을 보았다.

    “아르미라 님, 아파요?”

    “미라벨이라고 부르렴, 루체.”

    “둘만 있을 때도?”

    “둘만 있을 때도.”

    미라벨은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며 루체에게 말했다.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체를 보던 그녀가 머뭇거렸다.

    미라벨은 그동안, 아르밀라가 사라지고서 리카르도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금방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나토에 와서 본 리카르도와 루체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녀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았다.

    미라벨은 루체에게 그간 리카르도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야 할지 말지 갈등했다.

    그런 걸 들어서 뭐 하겠는가, 들어 봤자 심란하기만 할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그에게 그녀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왕녀님?”

    “혹시 더 얘기해 줄 수 있어? 그동안 대공이 어떻게 지냈는지.”

    결국 미라벨은 호기심에 져 버렸다. 그리고 루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는 자신의 호기심을 탓하게 되었다.

    * * *

    리카르도는 눈이 휘몰아치는 산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몸집을 한 마수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마수의 앞에는 아르밀라가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마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르밀라!”

    리카르도는 다급히 소리치며 아르밀라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다리가 눈에 푹푹 잠겨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사이에도 마수는 아르밀라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쳤다.

    “피해, 아르밀라!”

    리카르도의 외침에 아르밀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은 리카르도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어서!”

    리카르도의 부름에도 아르밀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응시한 채로 눈물을 똑, 하고 흘렸다. 추위에 발갛게 익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이 그녀의 턱에 맺혔을 때.

    “크르르릉!”

    마수가 아르밀라를 낚아채었다.

    “안 돼!”

    리카르도는 절규하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시야가 확 밝게 트였다.

    “허억, 허억, 헉……!”

    잠에서 깬 리카르도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곁에서 나시르가 뭔가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이불을 움켜쥐고서 턱을 세게 물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악몽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하지만 리카르도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죽지 않았다.

    미라벨 왕녀로서 살아 돌아왔다.

    “왕녀는?”

    리카르도의 목에서 갈라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왕녀를, 아르밀라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나시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늘 대답이 준비된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나시르의 행동에 수상함을 감지한 리카르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보좌관을 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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