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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7화 (58/120)

57화

소피는 난색을 표하며 미라벨을 보았다. 토끼털로 된 푸른색 외투를 입은 왕녀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름 단단히 중무장한 차림새였지만, 이 날씨에 나가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기사들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와 쉬고 있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으니까.

“눈이라도 그치면 가시는 게 어때요?”

“날 풀리길 기다리다간 일정이 지체될 것 같아서 그래.”

“그야 그렇지만요.”

소피는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내비치었다.

왕녀는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사라에게 가자고 하였다. 무덤에 간 다음에 곧장 수도로 출발하자는 얘기를 듣고, 소피는 고개를 내저었다.

동생의 무덤에 하루빨리 가 보고 싶기는 했지만, 동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소피는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미라벨의 금발을 정돈해 주며 다정히 말했다.

“사라도 우리가 덜덜 떨면서 찾아오는 건 바라지 않을걸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 나가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랬어요. 왜 그, 미친 하녀요.”

소피가 전한 소식에 미라벨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반응에 소피가 생긋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새 잊으셨어요? 그제 왕녀님을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하녀 있잖아요. 그 하녀가 오늘 아침에 성을 나섰다고 하더라고요.”

소피의 설명에 비앙카를 떠올린 미라벨이 시선을 창문으로 보냈다. 온통 하얀색으로 변한 세상이라, 사물이 분간이 가지는 않았다.

“그랬구나. 비앙카가 쫓겨났구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네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미라벨은 소피의 질문에 움찔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워낙에 인상적인 하녀였으니까.”

“그건 그랬죠.”

소피는 미라벨이 머리에 쓰고 있던 외투의 모자를 뒤로 젖혀 주며 말했다.

“아무튼, 추방당하는 하녀 말곤 오늘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왕녀님도 나갈 생각일랑 마세요.”

소피는 짐짓 엄하게 말하고선 미라벨의 외투를 완전히 거둬 내었다. 미라벨은 초조함을 삼키며 두 손을 꼭 쥐었다.

‘오늘 가야 하는데.’

리카르도는 오늘 아침에 식당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한 미라벨에게 간밤에 대공이 실신했다는 소식을 집사가 전해 왔다.

그래서 미라벨은 그가 누워 있는 틈에 레나토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소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대공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죠.”

미라벨은 한숨을 쉬었다. 예법대로 하자면 그게 맞다. 그녀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협탁의 책을 챙겼다.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그때, 외투를 개며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던 소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님 몸이 무척 약하신가 봐요. 전공(戰功)도 많이 세우시고 마수도 싹 다 쓸어 냈대서 강골이실 줄 알았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미라벨은 소피의 의문을 흘려 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드레스 룸에서 나온 소피가 다시 물었다.

“만찬 때는 어때 보이셨어요? 대공 전하 말이에요.”

“평범하셨어.”

“그래요? 하지만…….”

소피는 하려던 말을 꾹 누르고서 입을 다물었다. 대공과의 만찬을 끝낸 미라벨이 창백한 얼굴로 식당을 나선 걸 기억해 낸 탓이었다.

소피가 알기로 미라벨은 대공을 예전에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눈에 띄게 대공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소피가 대공을 입에 담을 때마다 입매가 굳었으며,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뭐?”

“아뇨, 아무것도.”

소피는 생긋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왕녀의 곁에 앉자 둘 사이에 편안한 침묵이 부드럽게 퍼졌다.

“왕녀님, 왜 이리 서두르려 하시는 거예요?”

책을 읽던 미라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책을 덮고서 차분히 말했다.

“수도에 빨리 가야 빨리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아, 샤를 왕자님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소피는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미라벨에게 몸을 가까이 들이대며 친근하게 말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계신 적은 없었죠?”

“응, 처음이야.”

“걱정이 되실 만도 하겠네요. 왕녀님이 출발하실 때도 계속 우셨잖아요. 왕자님이 보고 싶으시면 수정구를 가져올까요?”

소피의 제안에 미라벨이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실은 아르칸젤로로 향하는 미라벨에게 수정구를 주었다. 수정구는 미라벨과 세골린데 왕실을 연결해 주는 일종의 통신 수단이었다.

수정구를 가동하면 샤를의 모습을 수정구 너머로나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벽시계를 본 그녀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지금은 샤를의 낮잠 시간이야.”

“그럼 나중에 가져올게요.”

소피 또한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샤를이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녀도 그를 조카처럼 예뻐했다.

“애들은 잠깐만 안 봐도 못 알아보게 크는 것 같아요. 왕자님도 그렇더라고요. 왜, 지난번에 제가 본가에 갔을 때…….”

“실례합니다, 왕녀님.”

소피가 재잘거리며 얘기를 하려는 때,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피는 미라벨과 시선을 주고받고서 문을 열었다. 소피가 문을 여는 사이, 미라벨은 베일을 챙겨 썼다. 소피가 미라벨을 대신하여 손님을 상대했다.

“하녀장이로군요. 무슨 일이시죠?”

카타리나 부인은 딱딱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었다.

미라벨은 몸을 틀어 부인을 보았다. 며칠 전 스치듯이 보았지만 제대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부인은 그새 흰머리가 많이 늘어 있었다. 하지만 곧은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제 물의를 일으킨 하녀를 추방하였습니다. 왕녀님께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원이 줄어들면서 하녀들의 담당 구역을 새로 배정하여서요. 오늘부터 녹색 방을 이 아이가 담당하게 될 겁니다.”

카타리나 부인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자, 낯익은 얼굴이 미라벨의 시야에 들어왔다. 루체였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녹색 방을 둘러보던 루체의 옆구리를 카타리나 부인이 꾹 눌렀다. 그러자 루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왕녀님. 루체예요.”

“요령은 없지만 순하고 성실한 아이입니다. 그럼.”

카타리나 부인은 무뚝뚝하게 말하고서 예를 갖춘 뒤 모습을 감췄다.

졸지에 녹색 방에 남게 된 루체는 뺨을 긁적이다가 눈을 굴렸다. 순수함이 잔뜩 묻은 그 행동에 미라벨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녹색 방은 처음인가요?”

“아뇨, 지난주에도 청소했고, 그전에도 청소하러 왔어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하던 루체가 다시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

“잘 부탁해요, 왕녀님. 루체 열심히 할게요.”

“나도 잘 부탁해요.”

“왕녀님 상냥하다…… 아르미라 님이랑 닮았어.”

“누구?”

황홀해하던 루체의 중얼거림을 들은 소피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미라벨이 황급히 소피를 저지하려 하였지만, 이미 질문을 내뱉은 뒤였다. 루체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아르미라 님 몰라요?”

“모르는데.”

“됐어, 소피. 루체, 그만…….”

“대공비 전하요! 엄청 엄청 예쁘고 엄청 엄청 상냥해요. 왕녀님처럼!”

루체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동그란 원을 그려 보였다.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를 표현하려는 것 같았다.

“이만큼이요!”

“아…… 그래?”

루체의 설명에 소피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공비가 죽었다는 건 소피도 잘 아는 바였다. 소피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협탁의 화병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루체. 화병에 물 좀 갈아 줄래?”

“네!”

루체는 활짝 웃으며 화병으로 다가갔다. 화병에는 미라벨이 세골린데에서 가져온 싱그러운 백합이 꽂혀 있었다.

“예쁘다…….”

루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백합의 향기를 맡고서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루체가 사라지자, 소피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착한 애 같네요. 눈치는 조금 없어 보이지만요.”

“눈치는 소피가 빠르니까 괜찮지 않아?”

“그거야.”

소피는 피식 웃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미라벨이 들고 있던 책을 챙기며 말했다.

“이 책을 벌써 두 번째 읽고 계신다는 걸 알아챌 눈치가 있긴 하죠.”

소피는 책을 탁 접고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공의 보좌관이 하는 말이, 여기 서재에 세골린데어로 된 책이 은근히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서 읽으실 만한 것 좀 챙겨 올게요.”

“같이 갈까?”

“아뇨, 좀 쉬세요. 눈 좀 붙이시든가요.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소피는 미라벨의 눈가를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쓸고서 말했다.

“왕자님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봐요. 이따가 저녁 먹기 전에 수정구 가져올게요.”

“고마워.”

소피까지 자리를 비우자,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베일을 벗었다.

레나토에 오기 전에는 길어야 이틀 머무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일을 쓰고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베일을 썼다 벗는 게 은근히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안 쓸 수도 없고.’

미라벨은 섬세한 자수가 놓인 베일로 시선을 주었다. 그나마 베일이 있어, 레나토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리카르도야 제정신이 아니니, 그녀를 아르밀라라고 해도 누구도 믿지 않을 터.

‘그래도 불안한데.’

미라벨은 베일을 손에 들었다. 소란이 커지지 전에 레나토를 벗어나야 하는데 일이 자꾸 꼬이는 것 같았다.

“왕녀…… 님?”

눈이 휘날리는 창밖을 보던 미라벨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녀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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