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리카르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신이 아, 르밀라라면…….”
“내가 아르밀라라고 해도.”
리카르도의 시야 속에서 아르밀라가, 아니 미라벨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미라벨의 파란색 눈동자가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곧은 시선으로 리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아르밀라는 이미 당신을 떠났고, 죽었으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아름다운 입술이 비틀리고, 차가운 웃음이 터졌다. 미라벨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쏘아보았다.
“잊었어? 당신이 죽였잖아. 그토록 애타게 당신을, 당신의 사랑을 원한 사람을 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죽였지. 불쌍한 아르밀라.”
차분하지만 또렷한 음성에 리카르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날렵한 턱이 부르르 떨렸다.
이를 악무는 그에게서는 어떠한 변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라벨의 말 중에 거짓은 단 한 톨도 없으니까.
사람은 목이 졸리지 않아도, 칼에 찔리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박해당하다, 이내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레나토의 주인,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죽였다. 그의 사랑을 갈망하던 여인은 비참하게 죽었다.
거대한 눈산 속에서 홀로.
아르밀라가 죽었다는 건 레나토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죽지 않았어!”
오직, 리카르도만 제외하고.
“아르밀라는 죽지 않았어!”
성난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은 포효가 복도에 울렸다. 리카르도는 벌떡 일어나 미라벨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를 붙잡은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리카르도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절박하게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넌 살아 있잖아. 살아 있는데, 왜…….”
“그렇게 믿고 싶어?”
미라벨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리카르도의 태도에 냉소를 지었다. 아름답고도 차가운 미소에 순간 쓸쓸함이 서렸으나, 그녀는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전히 뻔뻔하구나.”
서늘한 음성에 리카르도의 거대한 체구가 움찔했다. 동시에 미라벨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해.”
리카르도의 무릎이 차가운 복도 바닥에 닿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미라벨의 앞에 무너졌다.
“미안해…….”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행동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이쯤에서 끝내세요. 재미없으니까.”
미라벨의 냉랭한 말에 리카르도가 얼어붙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도망친 아르밀라를 겁박하고서, 그녀를 비웃으며 했던 말이다. 그 말이 화살이 되어 다시 리카르도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거래는 끝났어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내가 도망친 순간, 끝났다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아니야.”
리카르도는 자신을 잘라 내는 미라벨의 선언에 고개를 급히 저었다.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끝낼 수 없었다. 그녀가 끊어 낸다면 억지로 잇고 싶었다.
리카르도는 허겁지겁 미라벨에게 사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줘. 너무 늦어서, 너무 널 외롭게 해서 미안해. 내가 너를…….”
리카르도의 음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너를…… 함부로 대해서…….”
“그만하세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리카르도의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맑고 또렷한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미라벨은 다소 지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후회는 원래 늦는 법이고 그래서 의미가 없죠.”
덤덤하게 말을 잇던 미라벨의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찡그려졌다. 리카르도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서 음산하게 말했다.
“안 돼. 이렇게 끝날 수 없어. 놓아주지 않을 거다. 절대.”
단호한 음성과는 달리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절박한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했다.
그러나 미라벨에게는 그의 절박함이 닿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짜증스레 말했다.
“이거 놔.”
“아르밀라……!”
“아르밀라는 죽었습니다.”
차갑게 말한 미라벨이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움직임에 리카르도가 절망 어린 눈을 들어 올렸다. 미라벨은 우아한 몸짓으로 몸을 낮춘 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잘 들으세요, 대공.”
붉게 충혈된 눈이 미라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샅샅이 살피는 눈동자에 희망이 빛이 꺼져 있는 것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의 후회가 필요 없어.”
리카르도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보랏빛 눈동자에 물기가 일렁였다. 미라벨은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덤덤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다 알고 있었어. 상실감, 고독, 절망이 어떤 감정인지. 그게 사람을 얼마나 좀먹는지 다 알면서도 나를 그 지옥 같은 감정 속에 방치한 거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던 눈썹이 찌푸려졌다. 미라벨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어디 실컷 괴로워해 봐. 그리워하고 슬퍼해. 그래 봤자 돌이킬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렇게 할게.”
미라벨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눈물을 흘리던 리카르도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리카르도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반성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할게.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 제발, 용서해 줘.”
듣는 이의 마음이 저려 올 만큼 처절한 애원이 리카르도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너른 어깨가 안타깝게 떨리고, 바닥을 짚은 커다란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는 미라벨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는 무감한 눈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글쎄요, 대공. 당신이 용서를 바라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나요?”
단호한 여인의 말에 리카르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미라벨은 단호하게 몸을 틀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늘한 복도의 공기가 여린 몸을 에워쌌지만, 그녀는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분노가 그녀의 감각을 온통 집어삼켰기에.
* * *
방으로 돌아온 미라벨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두운 방에 서 있는 그녀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넘쳐흘렀다.
슬픔이 아닌, 분노의 눈물이었다.
‘잘못했다고?’
죄를 빌며 용서를 구하던 리카르도를 떠올리는 미라벨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꿈에서도 그의 그런 초라한 모습은 그린 적 없었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미라벨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침구에 엎드려 흐느끼던 그녀의 잇새에서 다짐을 새기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절대, 절대…… 흐윽, 절대, 용서 못 해.”
모두 선명히 기억한다.
리카르도의 애정 한 자락이라도 받고자 안쓰러울 만큼 몸부림치던 때를.
오직 리카르도만 바라보며 레나토에서 버텼던, 그리고 결국 그에게 버림받은 그때를.
‘주제를 알아야지.’
리카르도의 차가운 미소와 싸늘한 음성을 떠올린 미라벨의 몸이 흠칫하였다.
미라벨은 가슴을 움켜쥐고서 바르게 누웠다. 시야에 검은색으로 물든 녹색 천장이 보였다. 미라벨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시선을 천장에 고정했다.
리카르도가 내뱉은 말들이 떠오를 때면 하는 행동이었다. 과거의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고 심장이 덜컹거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마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상,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아픔이었다.
미라벨은 눈물이 고인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리카르도의 말은 하나같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서 그동안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머릿속에 리카르도의 말들이 마구 휘몰아쳤다. 미라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무덤을 파헤칠 만큼 미쳤다고 해도, 미라벨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린다 해도.
리카르도가 과거에 그녀를 상처 입혔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리카르도와 함께했던 시간 중 추억이라고 아름답게 포장할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미라벨에게 남긴 것 중에서 간직할 만한 건 샤를이 유일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샤를.
샤를의 미소 짓는 얼굴을 떠올리던 미라벨이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아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샤를을 그리던 미라벨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미라벨이 아르밀라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리카르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미라벨은 보석보다도 소중한 아들을 절대로 그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하루빨리 레나토를 떠나야겠어.’
미라벨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라의 무덤을 방문하고, 바로 수도로 향해야 할 것 같았다.
휘이잉.
미라벨의 결심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었다.
미라벨은 눈이 가로로 흩날리는 풍경을 내다보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무리 날이 궂어도 레나토를 떠나야 한다.
리카르도의 곁에 있는 것보단 폭설 속에 파묻히는 편이 나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