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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5화 (56/120)

55화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그녀가 손목을 빼내자 그가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미라벨은 주의 깊게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도 무심결에 한 행동 같았다.

‘예전엔 한 번도 날 붙잡지 않았는데.’

미라벨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씁쓸히 생각했다.

잠자리를 가지고 나면 리카르도는 그녀를 밀쳐 내기 바빴다. 그런데 그가 붙잡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레나토에 오고 나서부터 말도 안 되는 일들만 계속 생기네.’

미라벨은 깊이 잠든 리카르도를 뒤로하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가운을 여미고 베일을 챙겨 방을 나섰다.

더는 리카르도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있으면 뭔지 모를 감정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그 감정은 증오 같기도 했고, 동정 같기도 했으며, 때로는 동요 같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 미라벨에게는 달갑지 않은 감정이었다. 리카르도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라벨은 완전한 타인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를 외면하고 싶었다.

‘무리이려나.’

복도를 걷던 미라벨은 검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로 정했을 때부터 흔들리게 되리라는 건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레나토는.

평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니까.

“왕녀님?”

창문을 응시하고 있던 미라벨은 곁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시선을 들었다. 서류를 품에 안은 나시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보좌관, 나시르 조아키오라고 합니다.”

미라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르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녀님을 통해 요청하신 건은 대공 전하께 전달드렸습니다. 다만 묘지를 방문하시는 건 폭설이 그친 다음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미라벨은 이번에도 대답을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묘지 얘기를 듣자마자 아르밀라의 무덤에서 보았던 리카르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밀라를 부르며 울던 리카르도.

그는 미친 사람처럼 맨손으로 무덤을 파내며 혼잣말을 무섭게 중얼거렸다.

늘 냉정한 리카르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라벨은 손을 모아 꽉 쥐었다. 엉망으로 망가진 리카르도를 떠올리자 마음이 갑갑했다.

“왕녀님께서 오늘 아침에 대공 전하를 뵙기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시르는 왕녀를 유심히 보다가 외알 안경을 슥 올렸다.

“혹여 대공 전하께서…… 실수를 하시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복도에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 퍼졌다. 나시르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다가 눈썹을 모았다. 그는 왕녀를 주의 깊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소중한 것을 잃으셨기 때문입니다. 왕녀님께도 소중한 것 하나쯤은 있으시겠지요.”

나시르의 얘기에 미라벨은 자연스레 샤를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으며 안겨 오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생각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르는 무언의 대답을 하는 왕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왕녀님께서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나 보군요.”

“보통 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요.”

나시르는 대답 끝에 한숨을 쉬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소중한지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지요. 그러니 왕녀님께서 부디 그분을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소중한 것이라면…….”

“그건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나시르는 미라벨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 그는 왕녀에게서 눈을 돌려 눈발이 휘날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이런 궂은 날에는 걱정이 됩니다. 무사하신지,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목적어 없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미라벨은 나시르가 걱정하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시르는 아르밀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미라벨의 목이 메어 왔다.

나시르는 그녀에게 친절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나마 그가 있었기에 레나토에서 버틸 수 있었다.

미라벨은 새삼, 자신이 두고 떠나온 것이 리카르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시르, 루체, 카타리나 부인…… 그리고 에치오까지.

아르밀라는 레나토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을 끊고 돌아섰다. 이제 그 인연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들은 아르밀라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미라벨은 입술을 말아 물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몰라도.”

“그렇겠지요?”

나시르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 뒤 그는 왕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는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라벨은 나시르의 뒷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 * *

리카르도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하듯 잘게 흔들렸다.

커다란 몸이 푹신한 침대에 닿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녹색으로 장식된 방을 알아본 리카르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님방에 누워 있었다.

왕녀와 대화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기억나질 않았다. 아마 왕녀를 만나기 위해 무리해서 몸을 일으킨 탓 같았다.

‘젠장.’

리카르도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다행히 깊게 잔 건 아니었는지 아직 방이 캄캄했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방을 살펴보고서는 왕녀를 찾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연 리카르도가 정처 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르밀라뿐이었다.

미라벨 왕녀는 아르밀라다.

리카르도는 확신했다.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미라벨 왕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르밀라를 그리워하던 지난 4년 동안 리카르도는 그녀의 모든 것을 세세히 회상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체향, 미소, 걸음걸이, 그리고 말투까지.

리카르도는 집착스러울 만큼 아르밀라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헤아리며 그녀를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세골린데인의 억양이 섞인 왕녀의 우아한 말투는 아르밀라와 똑같았다. 아니, 말투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도 같았다.

그녀가 아르밀라와 다른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하고 있다는 건 상관없었다. 그런 외양은 마법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으니까.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녀의 신분이었다.

아르밀라가 잃었던 기억이 미라벨 왕녀라는 신분이었던 걸까.

복도를 걷던 리카르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휘청였다.

“큭…….”

리카르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불면의 밤이 이어지면서 그는 끈질긴 두통을 얻었다. 두통은 불시에 찾아와 리카르도의 사고를 끊어 놓았다. 뇌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헉…….”

벽에 기댄 리카르도의 넓은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는 벽을 타고서 주르륵 무너졌다.

리카르도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르밀라를, 미라벨 왕녀를 찾아야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서 다시금 말하고 싶었다.

아직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허억!”

가까스로 무릎에 힘을 주던 리카르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바닥을 짚으며 턱을 당겨 물었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그가 잠든 사이에 미라벨 왕녀가 떠나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리카르도는 그렇게 허망하게 그녀를 보낼 순 없었다.

바닥을 바라보던 눈에 실핏줄이 섰다. 그는 안간힘을 주어 팔을 세웠다.

그때였다.

“대공……?”

미라벨 왕녀의 음성이 들린 것은.

리카르도는 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시 왕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왜 그래요?”

왕녀가 무릎을 꿇고 리카르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녀가 닿은 어깨에서부터 온기가 퍼져 나갔다.

리카르도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잇새에서 거친 호흡이 내뱉어졌다. 호흡은 머지않아 규칙적으로 변하며 가라앉았다.

마법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리카르도는 눈을 들어 자신을 고통에서 구원해 준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금색의 베일을 쓴 여인이 그에게 얹었던 손을 떼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리카르도는 황급히 여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쓴 베일을 끌어 내렸다. 리카르도는 베일 아래로 드러난 여인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거머쥐었다.

“날 두고 가지 마.”

“…….”

“내가 다 잘못했어.”

리카르도의 간절한 말에 왕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차갑게 그의 손을 쳐 내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깨셨나 보군요.”

왕녀는 냉정하게 그를 두고 몸을 세웠다.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보자, 홀로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가지 마. 난 당신을 알아. 매일같이 되새겼으니까. 당신은 내 아내잖아. 날 사랑했잖아. 내 것이라 했잖아.”

왕녀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리카르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초조해진 리카르도가 다시 말을 하려는 찰나, 왕녀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리카르도의 눈이 왕녀에게 향했다. 왕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아르밀라라면, 뭐가 바뀌지?”

왕녀의 말에 리카르도는 숨을 거세게 들이켰다. 얇은 베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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