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미라벨은 비앙카에게서 몸을 틀고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세 치 혀를 놀리는 재주가 제법이구나. 하지만 내겐 통하지 않아.”
“거짓이 아닙니다. 이는 온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대공비가 사라진 후 대공 전하께서는 정신을 놓았거든요. 그 여자가 전하를 단단히 홀린 거죠.”
비앙카는 아르밀라를 떠올리는지 인상을 썼다.
미라벨은 침착한 얼굴로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없이 있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라벨은 빨리 비앙카를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그래서. 저는 아달베르토 백작의 꿍꿍이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왕녀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너를 대공비로 만들어 주면 나는 아달베르토 백작의 속내를 알아낼 수 있고, 세골린데도 레나토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로구나.”
“예, 맞습니다!”
비앙카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로 가득 찬 그녀를 보던 미라벨은 복도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소피를 보고서 말을 이었다.
“유감이로구나. 나는 너와 거래할 생각이 없다.”
“어째서요?”
비앙카는 당혹스러워하며 미라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비앙카의 눈이 마주친 순간, 비앙카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잠깐, 당신…….”
“요즘도 대공이 너를 아침저녁으로 찾니, 비앙카? 네가 새로운 탕파야?”
“아르밀라……?”
비앙카는 미라벨의 질문에 귀신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소피, 왔구나.”
미라벨은 벌벌 떠는 비앙카를 없는 사람 취급 하며 소피를 맞이했다. 물주머니를 들고 온 소피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앙카를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하녀는 왜 이러죠?”
“잘 들어, 비앙카.”
“히익!”
비앙카는 미라벨이 자신을 부르자 몸서리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라벨은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 소원대로, 대공께 너에 대한 얘기를 해 주겠다. 그러니 돌아가 있으렴.”
“어, 어떻게…….”
“잠깐만요. 지금, 이 하녀가 왕녀님께 청탁을 하러 온 건가요?”
흐느끼는 비앙카를 주시하던 소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비앙카를 노려보다가 미라벨에게 말했다.
“버릇없이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왕녀님의 시녀로서 이런 작태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하녀장을 만나야겠어요.”
“놔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미라벨은 곁눈질로 비앙카를 보았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미라벨 왕녀의 눈에서 아르밀라를 보았다.
미라벨 왕녀가 아르밀라처럼 말했다.
하지만 왕녀가 아르밀라일 리는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머리 색과 눈동자 색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태생부터 왕족인 미라벨 왕녀와 천하디천한 아르밀라에게는 공통점이랄 게 없다.
그런데도 왕녀에게서 아르밀라가 느껴졌다.
아르밀라를 닮았는데, 소름 끼치도록 그 눈빛이 똑같은데.
아르밀라만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그녀는 아르밀라가 아니다.
“어떻게 이러지? 어떻게?”
비앙카는 패닉에 빠져 중얼거렸다. 그녀를 쏘아보던 소피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과연 미친 여자 같기는 하네요. 이런 자가 어떻게 대공저에서 일하고 있는지.”
소피는 혀를 차고서는 비앙카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곤 복도를 걸어가고 있던 하녀를 불러, 하녀장을 데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하녀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타리나 부인이 등장했다. 부인은 난색을 표하며 왕녀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아이가 또 잘못을 저질렀나 보군요. 왕녀님께 하녀를 대신하여 사죄드립니다.”
“그렇게 가벼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에요. 이 미친 여자가 왕녀님께 찾아와 청탁을 했어요. 왜 이런 자를 저택에 두고 있는 거죠?”
소피는 잔뜩 화가 난 어투로 카타리나 부인에게 말했다.
왕녀의 시녀로서 따라왔지만, 소피는 레옹틴 백작가의 영애다. 그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이런 때 어떻게 처분을 내려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이 하녀를 해고하도록 하세요. 추천장 없이 내쫓아요. 그래야 다른 가문에서도 고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한다면 레나토의 성의를 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카타리나 부인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소피가 요청한 처분은 적절했으나, 하녀장이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사용인의 고용 문제는 저택의 안주인이 정한다. 하지만 지금 비토레가에는 안주인이 없다. 보아하니 카타리나 부인에게 안살림의 결정권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녀장 선에서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
조용히 부인을 지켜보던 미라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타리나 부인에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 내일 아침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게. 내 직접 말씀드리지.”
“알겠습니다.”
카타리나 부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곧장 아직도 넋을 빼고 있는 비앙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비앙카의 눈은 복도를 벗어날 때까지도 미라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아침 동이 트기도 전, 누군가가 미라벨의 방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마침 잠에서 막 깬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왕녀.”
문밖에서 들려온 굵직한 음성에 미라벨은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벨은 천천히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리카르도가 왜 찾아왔는지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온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방에 있는 티를 내 놓고 대공을 쫓아내기도 뭐했다.
‘아직은 좀 껄끄러운데.’
만찬에서 리카르도와 나눴던 대화가 미라벨의 마음에 무겁게 남아 있었다.
미라벨은 되도록 그를 피할 생각이었다. 어젯밤 비앙카가 건방지게 굴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그녀를 내칠 일이 생기지만 않았다면 쭉 그랬을 것이다.
‘별수 없지.’
문가로 걸어가던 미라벨은 베일을 쓰려다가 내려놓았다.
이미 리카르도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 베일을 쓰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미라벨의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 밝은 빛이 길게 새어들어 와 그녀의 눈을 부시게 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미라벨이 인상을 쓰자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서 차갑게 말했다.
“아픈 사람은 대공이시죠. 눈이 시려서 그래요. 아직 이른 시각이잖아요.”
“그렇지요.”
리카르도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방 안에 들여 주기를 우직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돌아보고서는 꺼림칙한 얼굴로 고갯짓을 해 주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을 성싶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하녀장에게 들었습니다.”
미라벨의 허락을 받아 방 안에 들어온 리카르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미라벨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녀를 처분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미라벨은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르밀라일 때는 비앙카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그녀를 도와주는 이 하나 없었다. 그런데 왕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 하나로 비앙카가 잘려 나가게 되었다.
이게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니.
미라벨은 새삼 아르밀라가 얼마나 천대받았는지를 깨달았다.
그랬다, 대공비인 아르밀라는 하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리카르도의 약점이 아르밀라라는 것은 비앙카의 헛소리임이 분명했다.
“그 대신에.”
리카르도는 헛기침을 하고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라뇨?”
미라벨은 날이 선 어투로 되물었다. 그녀는 간절한 표정의 대공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하녀가 제게 잘못을 했으니 해고는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을 거시다니요.”
사리에 맞는 미라벨의 얘기에 리카르도의 얼굴이 굳었다. 미라벨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만찬 때 대공의 결례를 눈감아 주는 것으로 제 배려는 끝났습니다. 파혼으로 대공의 명예를 실추시킨 바 있으니, 실수 한 번쯤이야 모른 척 넘어가 드릴 수 있지만 거기까지예요.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미라벨의 안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한 깊은 시선에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게 부탁 같은 건 하지 마세요. 들어드릴 생각 없습니다.”
“레나토의 폭설은 쉽게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그러니, 급하게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할 겁니다. 그게 제 부탁입니다.”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겨우 몇 문장을 말하고서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다더니, 여기까지 오는데도 크게 무리를 한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리카르도가 휘청거렸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중심을 잃자, 앞에 서 있던 미라벨이 그와 함께 침대로 엎어졌다.
졸지에 리카르도에게 깔려 침대에 드러눕게 된 미라벨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 내려 했다.
“가지 마…….”
정신을 잃은 리카르도의 목울대에서 새어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손의 힘을 푼 미라벨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레나토에 오기 전에 상상했던 것과 모든 게 너무 달랐다. 특히나 리카르도의 변화는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설마, 정말로 나 때문에 변한 걸까?’
미라벨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아르밀라는 죽었으니까.
입술을 짓씹은 미라벨은 딱딱한 남자의 몸을 겨우 밀치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리카르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