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풀썩, 하고 금빛 베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미라벨의 시야가 밝게 트였다. 당황한 그녀는 고개를 틀며 리카르도의 시선을 피했다.
“가리지 마.”
커다란 손이 다가와 갸름한 턱을 거머쥐었다. 그는 그녀의 고개를 돌리고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밀라.”
갈증이 이는 음성이 리카르도의 잇새에서 비어져 나왔다. 그의 부름에 미라벨의 목까지 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그의 손을 쳐 냈다.
“무례하시군요.”
“모른 척하지 마.”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뿌리치는데도 그녀를 다시 잡았다. 미라벨을 보는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머리카락 색이 달라도, 눈동자 색이 달라도 너는 너야. 난 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붉은 입술, 곧은 코, 커다란 눈까지. 넌 아르밀라잖아. 아니라고 하지 마.”
“그 아르밀라라는 분이 대공의 전처이신가 보죠? 대공이 온전치 않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례는 여기까지만 하세요.”
미라벨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주우려고 몸을 틀자 리카르도가 재빨리 테이블을 넘어와 붙잡았다.
“알고 있었잖아!”
“뭘 말이죠?”
“저 팔찌, 저기에 새겨져 있던 글씨는 이미 다 지워졌어. 그런데도 알고 있었잖아. 아르밀라, 제발!”
리카르도의 절박한 외침에 미라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녀는 팔찌를 보고서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냥. 짐작이었어요.”
“아니. 그건 아르밀라밖에 몰라.”
“우연이겠죠.”
미라벨은 황급히 베일을 썼다. 그녀는 베일을 코끝까지 내리고서 말했다.
“대공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레나토에 오래 머무르지 않겠습니다. 내일 아침 바로 수도로 출발하겠어요.”
“가지 마.”
문고리를 잡는 미라벨을 리카르도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선 늘 서늘했던 그의 몸이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리카르도는 애절하게 미라벨을 안고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듣는 사람의 마음이 미어질 만큼 간절한 애원이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안겨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손에 힘을 주던 그녀가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세요.”
“아르밀라…….”
“놓으세요.”
미라벨의 단호한 말에 리카르도가 아쉬움이 가득한 손길을 느리게 떼어 내었다. 이내 그가 완전히 그녀를 놓자, 미라벨은 문을 벌컥 열었다.
“왕녀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피가 놀란 눈으로 미라벨을 보았다. 핏기가 가신 왕녀의 얼굴을 본 소피가 걱정 가득한 시선을 건넸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미라벨은 소피에게 대꾸도 하지 못하고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리카르도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서.
* * *
미라벨은 심란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흘 전, 레나토에 흩뿌려졌던 빗줄기가 그날 밤 눈으로 바뀌었다.
눈발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굵어졌다. 황량한 정원을 하얗게 뒤덮은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네요. 이러다 레나토에 발이 묶이겠어요.”
벽난로의 장작을 불쏘시개로 건드리던 소피가 근심 어린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바깥을 내다보는 왕녀를 보다가 밝은 목소리를 꾸며 말을 이었다.
“백합 구근이 상하지 않게 단단히 싸 와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
“왕녀님?”
“응? 으응.”
미라벨은 소피의 얘기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숄을 여몄다. 그녀는 이마를 짚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이래서야 한동안은 못 나가겠네.’
레나토에서는 한번 눈이 내리면 폭설로 이어진다.
폭설은 짧으면 보름, 길게는 한 달까지 계속된다. 만약 눈이 한 달 내내 내린다면, 수도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한 달 동안 이곳 레나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눈을 헤치고서라도 세골린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벌써 무릎께까지 쌓인 눈길을 지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세상에, 바람 좀 봐. 오늘도 밤새 춥겠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침대에 넣을 물주머니를 준비해 올게요.”
분주히 움직이는 소피의 말에 미라벨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혼잣말을 했다.
“물주머니…….”
소피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던 미라벨이 눈매를 굳혔다.
레나토에 와서일까. 대단치 않은 얘기에도 자꾸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주님이 대공비라고 해 주니까 진짜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넌 탕파 같은 거야. 가주님의 침대를 데우는 물주머니.’
적의가 가득하던 비앙카의 목소리. 멸시당하던 그때를 떠올린 미라벨이 쓰게 웃었다.
사람들의 잔인한 말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그리고 그것이 모두 사실이어서 더 아팠더랬다.
비앙카가 옳았다. 리카르도에게 있어 아르밀라는 침대를 데우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할 때마다, 리카르도는 차갑게 밀쳐 내었다.
미라벨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얼마 전에 본 리카르도는 그녀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그는 마치 아르밀라를 절절히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말도 안 돼.’
미라벨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마음 한 자락도 내어 주지 않았다. 지금 창밖에서 불고 있는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자였다.
‘아프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미라벨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창가에서 눈을 돌렸다.
실제로, 대공은 사흘 전 그날 이후로 앓아누웠다. 그래서 미라벨은 다시 그와 만나질 못했다.
다행히도.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누워 있는 동안에 흔들렸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가 변한 건 아르밀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 계기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르밀라는 아닐 것이다. 물주머니가 없어졌다고 미쳐 버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똑똑.
“왕녀님, 실례하겠습니다.”
침대로 걸음을 옮기던 미라벨은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베일을 빠르게 챙겼다. 그녀는 베일을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왕녀의 허락에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하녀 하나가 다소곳한 태도로 방에 들어섰다. 그녀를 알아본 미라벨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비앙카라고 합니다.”
미라벨은 얌전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비앙카를 노려보며 턱을 당겨 물었다.
비앙카는 레나토의 사용인 중, 아르밀라를 괴롭히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하녀였다.
그녀만 없었어도 아르밀라의 삶은 덜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비앙카가 아르밀라를 괴롭히지 않고, 리카르도에게 피임약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미라벨은 머리에 떠오르는 가정을 황급히 지웠다. 이미 지난 일에 ‘만약’이라는 건 없다.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순 없으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은 지울 수도 없었다. 비앙카가 아르밀라를 비난하고, 경멸하며 못살게 굴었던 과거는 미라벨의 가슴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미라벨은 서늘한 어조로 하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냉랭한 태도에 비앙카의 몸이 움찔하였다. 미라벨은 피로한 기색을 비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하녀를 부르지 않았는데.”
“왕녀님께 제안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제안?”
왕녀의 음성에 호기심이 어리자, 비앙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일개 하녀가 왕족의 얼굴을 볼 순 없기 때문이었다.
“저를 도와주시면, 저도 왕녀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난 네 도움이 필요 없다. 나가.”
미라벨은 잘라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비앙카가 초조해하며 빠르게 말했다.
“세골린데에 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비앙카가 내뱉은 말에 미라벨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앉고서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말해 봐.”
“대공 전하께서 저를 아내로 삼게끔 도와주시면, 제가 대공 전하와 세골린데 사이를 중재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미라벨은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기가 막혔다.
비앙카가 리카르도를 연모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리수를 던질 정도인지는 몰랐다.
감히 하녀 따위가 외교 관계를 중재하겠다고 나서다니.
“네가 뭔데?”
“예?”
“넌 네가 뭐라도 되는지 아는가 보구나. 기껏해야 대공의 침대를 데울 물주머니나 될 것 같은데.”
미라벨의 비아냥거림에 카펫을 짚은 비앙카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목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대공께선…… 저를 아끼십니다.”
“그럼 널 아낀다는 대공께 가서 직접 말하렴. 대공비로 삼아 달라고.”
미라벨은 잘라 말하고선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을 열고서 축객령을 내렸다.
“정 원한다면 너의 처분에 대해 대공께 여쭈어보겠다.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왕녀에게 한 말들을 상세히 고해 주지.”
“와, 왕녀님!”
비앙카는 허겁지겁 무릎으로 기어 와 미라벨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듯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실은 저는 아달베르토 백작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왕녀님께서도 아시지요? 아달베르토령의 두란테 백작이요. 제국의 백합 판매권을 독점하고 있는 분이시지요.”
비앙카는 이를 빠드득 갈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백작님이 저를 버리셨습니다. 대공 전하를 유혹해 그분의 약점을 알아내거든 제게 큰돈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젠 그게 뭔지 제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비앙카가 쏟아 내는 말을 한 귀로 흘리던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리카르도에게 약점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를 미치게 한 요인이 이미 밝혀진 걸까.
“대공의 약점이라니?”
왕녀가 흥미를 보이자 비앙카가 치마를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다. 그녀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르밀라 비토레, 죽은 전 대공비요. 그 여자가 전하의 약점입니다.”
비앙카의 대답에 미라벨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서 비앙카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