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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2화 (53/120)
  • 52화

    저벅저벅, 리카르도가 걸어오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퍼졌다. 보라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미라벨을 눈빛으로 옥죄려는 것처럼.

    “이상하군.”

    두 사람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리카르도는 언제 넋이 나가 있었냐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왕녀를 만난 적이 없는데. 왕녀는 날 바로 알아보았지. 그리고…….”

    리카르도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는 미라벨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건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날 잘 아는 것처럼 말했어.”

    이내 리카르도의 손이 미라벨의 베일 끝을 붙잡았다. 그는 흠뻑 젖은 베일 사이로 드러난 금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르밀라와 목소리만 닮은 게 아니군.”

    적발의 아르밀라와는 완전히 다른 머리 색이다. 그런데도 리카르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앞에 선 그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아르밀라와 같은 향기가 나.”

    리카르도의 손이 베일을 넘기자 미라벨의 붉은 입술과 곧은 콧날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윽고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색의 눈동자가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왕녀님!”

    소피의 음성이 묘지에 퍼졌다.

    소피의 등장에 미라벨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몸을 틀고서 달려오는 소피를 불렀다.

    “소피.”

    “식사 때가 되어 찾아갔는데 안 보이셔서 놀랐어요. 하아, 방금 소리치신 거 맞죠? 괜찮으세요?”

    미라벨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던 소피가 리카르도를 보고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대공을 알아보지 못하고서 경계하며 말했다.

    “그쪽은 누구길래 왕녀님께 손을 대려 한 거죠? 이보세요, 이분이 누구신지나 알고…….”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

    잠자코 소피의 항의를 듣고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한쪽 손을 들어 가슴에 얹고서 완벽한 예법으로 미라벨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레나토의 대공, 리카르도 비토레라 합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곁에서 소피가 화들짝 놀라 리카르도에게 예를 취했다. 미라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

    심장이 바닥으로 꺼지는 줄로만 알았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그런 기분은 리카르도를 사랑하던 때에나 느꼈던 것인데.

    ‘그건 아냐.’

    오랜만의 재회에 놀란 게 분명하다. 미라벨은 나름의 결론을 내며 몸을 틀었다. 그녀는 리카르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소피를 불렀다.

    “가자, 소피.”

    “예? 예.”

    소피는 의아한 얼굴로 리카르도와 미라벨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이 묘지를 뜰 때까지도 리카르도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와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미라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남아 상대방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건, 언제나 미라벨이었다.

    그러나 더는 아니다.

    이제 상대방의 뒷모습을 좇는 건 리카르도의 몫이 되었다.

    초라해지는 것도, 망가지는 것도.

    * * *

    다시 씻고서 식당으로 들어온 미라벨은 기다란 테이블 배치를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과 왕녀의 자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원래는 긴 테이블의 끝과 끝에 위치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식사를 하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집주인의 자리 배정에 가타부타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미라벨은 불만을 삼키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리카르도가 등장했다.

    그는 조금 전 묘지에서의 미치광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차려입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몸에 딱 맞는 짙은 남색 정복을 입고서, 크라바트까지 완벽하게 매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보기 좋게 뒤로 넘긴 채였다.

    수척한 얼굴만 아니라면 무덤에서 본 사람과 다른 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리카르도는 예의 바른 말을 미라벨에게 던진 뒤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애피타이저를 가져왔다.

    넓은 테이블에는 리카르도와 미라벨뿐이었다.

    미라벨은 단둘이서 하게 된 식사에 당혹감을 느꼈다. 보통 귀빈이 오면 가주를 비롯해 보좌관과 같은 가신들이 함께 환영 만찬을 하는 것과는 판이한 분위기였다.

    미라벨은 조용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녀는 왜 이런 식으로 왕녀를 대하느냐고 물어볼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원래 미라벨은 레나토에서는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모든 대화는 곁에서 시중을 드는 소피를 통해서 하려 했다.

    리카르도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미 아까 리카르도와 대화를 나눠 버렸다. 이제 와 소피를 통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결론을 내린 미라벨은 한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요?”

    “제가 따로 왕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물렸습니다.”

    리카르도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역시, 무덤에서 흐느끼던 자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그게 뭔가요?”

    미라벨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먹으려다 고개를 들었다. 리카르도는 포크와 나이프를 쥔 그녀의 손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식사를 다 끝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카르도는 말을 마치고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예법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깔끔하고도 우아한 태도였다.

    하는 수 없이 미라벨도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긴 코스 요리가 이어졌다. 갑오징어 샐러드를 시작으로 줄줄이 나온 요리들은 하나같이 공이 많이 들어가는 것들이었다.

    미라벨은 레나토에서 지내는 동안 이렇게 거창한 요리가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식당에서 식사한 적도 없었다. 아르밀라는 대공이 식사를 마친 뒤에 루체가 주방에서 가져온 음식을 방에서 먹었으니까.

    그때 그녀가 먹었던 음식은 다 굽거나 찌는 단순하고 투박한 조리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 미라벨의 접시에 올라온 것처럼 소스로 점을 찍어 모양을 내거나 채소를 반짝이게끔 졸인 음식은 없었다.

    ‘주방장을 바꾼 건가.’

    미라벨은 무심히 생각하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대충 먹고 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니까.

    이윽고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로 셔벗이 나오자, 시중을 들던 하인들이 일제히 식당을 나섰다.

    “이제 말씀하세요.”

    식당에 리카르도와 단둘이 남게 된 미라벨이 셔벗 스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먹으려다 만 셔벗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뇨, 맛있었어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미라벨은 덤덤히 틀에 박힌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연한 미소를 지었다.

    “세골린데는 이런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급히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로군요.”

    “왜…….”

    미라벨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삼켰다. 리카르도가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금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나요? 대공은 저를 반기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미라벨은 신랄하게 말하고서 물을 마셨다.

    리카르도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 자체가 그녀에겐 고역이었다.

    거기다 점잖은 척 구는 가증스러운 모습이라니.

    하지만 지금 미라벨은 세골린데의 왕녀로서 이곳에 와 있다. 그러니 기분이 나쁘다고 대공에게 막말을 퍼부을 순 없었다. 그녀는 찬물로 열을 식히고서 말을 이었다.

    “물론 대공께서 제 방문을 반기지 않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세골린데는 대공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를 찾기 위해 추적대까지 만들어 노력하셨다죠. 하여 사과의 의미로 백합을 가져왔습니다. 받아 주셨으면 해요.”

    리카르도는 조곤조곤히 말을 이어 가는 미라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베일을 뚫을 정도로 뜨거웠다.

    미라벨은 노골적인 눈길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쨌거나, 용건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보좌관님께 들으셨겠지만 제 무덤에 잠들어 있는 건 제가 가장 아끼던 시녀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그녀의 무덤에 인사하고 제대로 된 비석을 세워 주고 싶어요.”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러곤 잠시 침묵하다가 재킷 안쪽에서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그 전에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손수건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리카르도의 손끝이 떨렸다. 미라벨은 미간을 좁히고서 그가 내놓은 것을 응시하였다.

    “이게 뭐죠?”

    “제 아내의 물건입니다.”

    리카르도의 대답에 미라벨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까 리카르도가 묘지를 파헤치던 걸 떠올린 탓이었다.

    ‘설마.’

    미라벨의 가슴이 다시 빠르게 뛰고, 그녀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미라벨이 말없이 손수건을 보고만 있자 리카르도가 그것을 펼쳐 보였다.

    “……!”

    미라벨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손수건에 싸여 있던 것은 그녀의 짐작대로 아르밀라의 팔찌였다.

    하지만 팔찌는 미라벨의 기억과 달랐다.

    리카르도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뭇거뭇한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팔찌의 중앙에 박힌 루비에도 흙먼지가 끼어 있었다.

    “여기에 세골린데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걸 봐 주셨으면 합니다.”

    미라벨은 입을 가렸던 손을 재빨리 내렸다. 순간 너무 놀라 리카르도 앞에서 의연하게 굴기로 한 것도 잊어버렸다.

    팔찌도, 리카르도도 너무 불편하다. 미라벨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팔찌를 힐끔 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스물두 번째 해를 축복하며’라고 쓰여 있네요.”

    미라벨이 말을 마치자마자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베일을 확 걷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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