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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1화 (52/120)
  • 51화

    목욕을 마친 미라벨에게 소피가 몸을 데우라며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노곤함을 느끼며 창가로 다가갔다.

    미라벨은 찻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아실의 마법 덕에 편하게 마차를 탔지만, 그래도 장시간의 이동이라 피로했다.

    “피곤하시죠.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아. 소피 너도 가서 쉬어.”

    미라벨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소피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의 대답에 소피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서 방을 나섰다.

    미라벨은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골린데의 푸른 하늘과 사뭇 다른 어두운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쿠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미라벨은 순간 자신을 감싸는 한기에 어깨를 잘게 떨었다.

    벽난로에 장작을 아쉽지 않게 때는데도, 창가에 선 것만으로 추위가 느껴졌다. 역시 레나토다웠다.

    ‘눈을 좀 붙일까.’

    미라벨은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를 만나게 될 거란 생각에 잔뜩 긴장했더니, 별것을 하지 않았는데도 지쳤다.

    ‘저게 뭐지?’

    침대로 몸을 틀려는 찰나, 미라벨의 시야에 뭔가 잡혔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빠르게 신전으로 향하는 검은 형체.

    정신을 놓은 것처럼 성급히 뛰어가는 형체의 정체는 리카르도였다.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본 미라벨의 잇새에서 흐린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전…….”

    습관처럼 리카르도를 ‘전하’라고 부르려던 미라벨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찻잔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라벨은 시린 눈으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이내 그는 신전 뒤로 사라졌다.

    신전의 뒤쪽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던 미라벨이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덤.’

    신전의 뒤에는 비토레가의 묘지가 있다. 미라벨은 황급히 베일을 찾아 쓰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나시르를 통해 리카르도에게 ‘미라벨 왕녀’의 무덤을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리카르도가 묘지로 급히 가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제대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조바심을 내며 저택을 나선 미라벨은 소피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서 신전을 향해 갔다.

    왕녀의 무덤에 시녀를 묻었다는 게, 레나토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왕녀에게 정식으로 항의하면 될 일인데. 굳이 대공이 직접 묘지로 향할 건 뭐란 말인가.

    신전으로 가던 미라벨의 베일 위로 굵은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짙은 회색 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라벨은 잠시 멈칫하고 저택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저택으로 돌아가도 어차피 가는 길에 비를 맞아야 한다. 그럴 바엔 리카르도가 하려는 짓을 말리고 나서 가는 게 낫다.

    미라벨은 마음을 정하고서 신전 건물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자신이 마주한 광경에 놀라 입을 벌렸다.

    “아르밀라, 아르밀라…….”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의 이름을 되뇌며 작은 봉분을 맨손으로 헤집고 있었다.

    오싹한 광경이었다. 무덤을 파헤치는 사람이라니. 리카르도는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 저러는 거야?’

    미라벨은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리카르도가 헤집고 있는 건 다행히 사라의 묘는 아니었다. 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아르밀라 비토레의 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에 쓰인 자신의 옛 이름을 본 미라벨의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다.

    한때는, 저 이름을 몰래 쓰며 들뜨기도 했었는데.

    아르밀라의 이름에 비토레라는 성(姓)이 정말로 붙었을 때는 꿈결처럼 황홀해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 이름은 비석에만 남게 되었다.

    “허억, 헉…… 아르밀라…….”

    과거의 향수에 잠겼던 미라벨은 거친 리카르도의 숨소리에 다시금 시선을 들었다.

    리카르도는 이제 비에 젖어 질척해진 흙을 맨손으로 파내고 있었다. 이대로 무덤을 아예 다 파낼 심산인 것 같았다.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미라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리카르도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아르밀라’의 묘를 엎는 건 더 두고 보기 어려웠다. 미라벨은 작게 숨을 몰아쉬고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 뭘 하는 거죠?”

    “헉, 허억…….”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 지금 뭘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미라벨이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던 리카르도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요동치더니,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굵은 빗줄기 사이로 보였다.

    “아르밀라……?”

    잔뜩 쉰 음성으로 아르밀라의 이름을 내뱉으며 리카르도가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미라벨은 집요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물러나려 하자, 리카르도가 헐레벌떡 뛰어와 붙잡았다.

    “가지 마.”

    “이것 놓으세요.”

    “내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가지 마…….”

    리카르도는 무릎을 꿇으며 미라벨에게 애원했다. 미라벨은 자신의 팔을 거머쥔 그의 앙상한 손을 보며 경악했다.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던 리카르도의 몸에는 근육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해쓱해졌으며, 피부도 눈에 띄게 거칠어진 채였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정신 상태였다. 리카르도는 벌벌 떨면서 미라벨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잘못했어. 제발, 가지 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는 미라벨의 기억 속에 있는 리카르도답지 않았다.

    늘 냉철하고 이성적인 남자였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라벨은 아연하여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레나토의 미친 늑대라고 불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미쳤다는 뜻인지는 몰랐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더 뿌리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서 그를 살폈다.

    이채를 띠던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것을 발견한 미라벨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울다니. 리카르도가 울다니, 말도 안 된다. 그의 추한 꼴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미라벨은 목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

    미라벨의 서늘한 음성에 리카르도의 너른 어깨가 흠칫했다. 그녀에게 매달려 있던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보여, 미라벨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입니다. 그대는, 제 짐작이 맞는다면 비토레 대공이지요?”

    “왕녀……?”

    “그래요.”

    미라벨은 간결하게 대답하고서는 리카르도를 뿌리쳤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르밀라의 목소리였는데.”

    “아르밀라가 누구죠?”

    미라벨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대꾸했다. 그녀의 질문에 리카르도의 턱이 벌어졌다. 그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미라벨 왕녀라고.”

    미라벨은 으슬으슬해지는 몸을 떨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베일이 얼굴에 달라붙어, 더 쓰고 있기 곤혹스러울 만큼.

    미라벨은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왜 무덤을 파헤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하세요. 요사스러운 사술이라도 부리려는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런 게 아냐.”

    리카르도는 고개를 떨군 채로 대답했다. 그는 반쯤 헤집어진 무덤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왕녀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 그래서…….”

    리카르도는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서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조금 전까지 주눅이 들어 있던 사람 같지 않게, 무덤으로 다시 달려갔다.

    “팔찌. 아르밀라의 팔찌를 보여 주겠다. 그러면 왕녀가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다.”

    “……뭐라고?”

    리카르도의 말에 미라벨은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아르밀라의 팔찌를 찾는데 무덤을 파헤치는 걸 보면 그걸 시신 대신에 묻었다는 소리 같은데.

    이미 장례까지 치른 자의 무덤을 헤집으면서까지 미라벨에게 팔찌를 보여 주려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대공!”

    “다들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아르밀라의 것은 팔찌밖에 남지 않았어. 잠깐만 기다려 줘. 금방 꺼낼 테니까.”

    “그만해요.”

    “아르밀라를 찾게 도와줘. 분명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거야.”

    “그만해!”

    미라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질렀다.

    리카르도가 왜 미쳤는지,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리카르도 비토레는 잔인하고 냉혹한 자여야만 했다.

    아르밀라는 깔끔히 잊고, 예전처럼 지내는 변함없이 차가운 자여야만 했다.

    이런 리카르도는 모른다.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지고, 부서진 리카르도는…….

    “이러지 마.”

    미라벨의 음성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며 말했다.

    “아르밀라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굴지 마.”

    천천히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차갑게 굳어 갔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원망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

    미라벨의 서늘한 비난에 리카르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빗속에 선 그가 미라벨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왜 왕녀가 그런 말을 하지?”

    리카르도의 눈이 언제 흐릿했냐는 듯이 빛났다. 그는 예리한 눈길로 미라벨을 바라보며 캐물었다.

    “왜?”

    “그건…….”

    미라벨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리카르도의 모습에 놀라, 평정심을 잃고서 마구 말을 쏟아 내 버렸다.

    철저히 ‘미라벨 왕녀’로서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서.

    미라벨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사이, 리카르도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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