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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50화 (51/120)
  • 50화

    세골린데의 왕녀, 미라벨 에티에네트.

    대공의 전 약혼자이자, 세골린데의 사랑받는 왕녀.

    건국제를 위해 그녀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레나토가 오랜만에 들썩였다. 대공이 대공비를 잃은 뒤로 활기를 잃은 저택에 모처럼 들뜬 공기가 감돌았다.

    “그 왕녀님이 엄청 예쁘다면서?”

    “게다가 세골린데는 백합으로도 유명하잖아. 그분이 레나토로 오시면 우리 살림도 필걸? 아, 왕녀님이 대공비가 되셔야 했는데.”

    “대공비는 아르미라 님이에요!”

    왕녀가 머무를 손님방을 청소하던 루체는 수다를 떠는 하녀들의 얘기에 발끈했다. 그녀가 씩씩거리자 하녀들은 익숙하다는 양 말했다.

    “그래그래, 네 아르미라 님이시지.”

    루체는 건성으로 대답하는 하녀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르밀라가 홀연히 사라졌는데도,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아르밀라를 탓하기만 했다.

    그녀 때문에 대공이 미쳤다고, 대공을 홀리다 못해 미치게 했다고.

    “아르미라 님…….”

    루체는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후로 그녀의 몸종이었던 루체는 다시 일반 하녀로 돌아왔다.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루체는 아르밀라를 그리워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또 도망쳤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대공비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에는 하도 울어서 눈이 짓무르기까지 했다.

    붉은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대공을 봤을 땐 너무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지만.

    ‘가주님도 말은 안 하시지만, 아르밀라 님을 걱정하고 계실 거야.’

    대공은 매년 아르밀라가 사라진 날마다 산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광기라고 여겼지만, 루체는 그게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대공 나름대로, 아르밀라를 그리워하는 방식이라고.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친 루체가 울적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웬일인지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귀한 손님이 온다는 걸 하늘도 아는 모양이었다.

    “어……?”

    창밖을 보던 루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의 시야에 황금빛 마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천천히 멈춰 선 마차 앞에 집사와 하녀장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일렬로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베일을 쓴 여인과 시녀인 듯한 사람이 내렸다. 루체는 창문에 바짝 붙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우와…….”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라벨 왕녀의 움직임은 우아했다. 그녀는 고고하게 집사와 하녀장의 인사를 받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치맛자락이 흔들리지도 않게 부드럽게 걷는 자태에 루체의 눈이 반짝였다.

    “신기하다.”

    왕녀를 지켜보던 루체의 볼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꼬옥 쥐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르미라 님이랑 닮았어.”

    루체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게 웅얼거린 뒤 키득거렸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서 몸을 홱 돌렸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후로 의욕을 잃었던 루체가 오랜만에 열의를 띠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 * *

    미라벨의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레나토 저택에 도착하면서부터 과거의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비앙카가 발을 걸어 넘어뜨렸던 기억, 에치오에게 구박을 받았던 기억, 리카르도에게 냉대를 당했던 기억.

    베일 너머로 파올로와 카타리나 부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을 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대공 전하께서는요?”

    미라벨의 곁에 있던 소피가 왕녀를 마중 나온 이들을 보다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파올로와 카타리나 부인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눈짓에 미라벨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왜 저러지?’

    세골린데의 왕녀가 도착했다. 그럼 당연히 가주가 나와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도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로비에 들어설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상당한 결례였다.

    “송구합니다, 왕녀님. 대공 전하께서는 편찮으셔서 손님을 맞이하실 수 없습니다.”

    한참 뜸을 들이던 파올로가 허리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그의 대답에 미라벨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리카르도를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를 만나러 나오지조차 않았다.

    왠지 허탈했다.

    ‘차라리 잘됐지.’

    레나토에 온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리카르도까지 만나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안도한 미라벨의 입술 사이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왕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파올로가 쩔쩔매며 미소를 지었다.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기력을 회복하시는 대로 왕녀님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셨으니,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대신 저희 레나토의 모두가 성심을 다해 왕녀님을 모시겠습니다. 오랜 여행길에 피곤하시지요. 여독을 푸실 수 있도록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우선 이쪽으로.”

    파올로에 이어 카타리나 부인이 왕녀에게 말하며 다가왔다. 미라벨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서 카타리나 부인의 안내에 따랐다.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 복도로 가는 내내 미라벨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왕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베일을 쓰고 오길 잘했네.’

    그나마 베일이 주변의 시선을 차단해 주어 부담이 덜했다. 미라벨은 레나토에 머무르는 동안 베일을 절대 벗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푹 쉬십시오. 식사가 준비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수건 가져왔어요.”

    녹색 방에 들어선 미라벨이 카타리나 부인에게 고갯짓을 해 주려던 때였다. 하녀복의 소매를 걷어붙인 루체가 수건을 잔뜩 안고서 등장했다.

    ‘루체!’

    루체를 본 미라벨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의 이름을 외치게 될 것 같았다.

    “수건 많이, 헤헤. 왕녀님, 안녕하세요. 저는 루체예요.”

    루체는 수건을 욕실 앞 바구니에 놓고서 치마를 들어 왕녀에게 예를 표했다.

    인사를 한 루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베일 너머로 미라벨과 눈이 마주친 루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어? 아르…….”

    “이만 나가 보세요.”

    미라벨은 루체의 입을 막으며 황급히 말했다. 레나토에서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루체가 아르밀라의 이름을 내뱉으려 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네에.”

    루체는 다시금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다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루체와 카타리나 부인이 나가자 미라벨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나토에서 체류하는 동안,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 * *

    집무실에 온 나시르는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에 인상을 썼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가지고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리카르도의 시선은 나시르가 아닌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산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나시르는 가주의 날카로운 턱 선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리카르도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는 건 이제 그의 일상이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원래 체력이 좋은 덕인지, 리카르도는 보기 싫게 야위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안색은 별개다. 리카르도의 창백한 낯빛은 딱 병자의 것이었다. 나시르는 푹 꺼진 그의 눈가를 보다가 짙은 알코올 향에 난색을 표했다.

    “오늘만큼은 술을 드시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

    “왜?”

    나시르의 얘기에 리카르도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왜 그래야 하지?”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질문에 안도했다. 대답을 해 주는 걸 보니, 오늘은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당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실망스러웠지만.

    “미라벨 왕녀님이 방문하시는 날이니까요.”

    “그랬나.”

    리카르도는 무심히 대꾸했다. 무려 왕녀가 방문했다는데도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나시르는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때, 리카르도가 원래대로 돌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가 업무에 다시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시르의 착각이었다.

    리카르도는 의무적으로 일할 뿐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술에 취해 지냈으며, 심지어는 간혹 행방불명이 되곤 했다.

    그럴 땐 붉은 방이나 아르밀라의 무덤에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그곳에서 아르밀라를 목 놓아 부르며 울곤 했다.

    “알겠으니 나가 봐.”

    나시르는 축객령을 내리는 리카르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알았다곤 했지만, 그는 나시르의 얘기를 하나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지금 꿈쩍 않고 앉아 있는 게 그 증거였다.

    한숨만 쉬며 나시르가 방을 나서지 않자 날 선 보랏빛 눈빛이 그에게 붙었다.

    “왜.”

    “왕녀님께 인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

    곧바로 무성의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시르는 하는 수 없이 왕녀가 요청했던 사항을 대신 전달하기로 했다.

    “왕녀님께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가 보고자 하십니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게 세골린데 왕실의 시녀라고 하더군요.”

    “……무덤?”

    “네, 대공비 전하의 무덤 옆에 있는…….”

    나시르가 대공비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리카르도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언제 멍했었냐는 듯,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왕녀는 세골린데 사람이지.”

    “예? 그야 당연히…….”

    “아르밀라의 팔찌에 세골린데어가 새겨져 있었다. 왕녀가 그걸 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거야.”

    “하, 하지만 가주님. 팔찌는 이미…….”

    나시르가 당혹스러워하며 대답하려는 때였다. 리카르도가 그를 집무실에 남겨 두고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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