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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49화 (50/120)
  • 49화

    루이즈는 미라벨의 반응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레나토의 대공과 약혼까지 했었으니,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게다가 대공이 몇 년째 아프다니까.”

    미라벨은 쓰게 웃었다. 루이즈는 대공이 아프다고 돌려 말했지만, 리카르도에게 붙은 새 별명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레나토의 미친 늑대.

    리카르도는 매년 어떤 날만 되면 혼자 눈산으로 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수들을 전부 죽이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덕분에 주변국은 마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감사해야 마땅하건만, 어째서인지 대공을 미친 자라고 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라벨은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그 이상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일부러 귀를 막고 지냈다.

    “미라벨 왕녀가 살아 돌아왔다니, 제국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야. 네가 죽은 줄 알고 유야무야되었던 협정을 다시 논하고 싶다더라고.”

    “무슨 얘긴지 알겠어.”

    미라벨은 루이즈의 설명에 찻잔을 놓으며 대답했다. 대공과 혼인을 하러 오던 왕녀가 죽어, 제국은 세골린데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하여 협정이 무산되었음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녀가 살아 돌아와 상황이 변하였다.

    자칫하다간 세골린데와 제국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는 형국이다.

    이 경우엔 문제의 시발점인 왕녀가 가서 제국에 예를 표하는 게 맞다. 미라벨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제엔 내가 갈게. 사절단은 언제 출발해?”

    “다음 주. 샤를은 어떻게 할래?”

    루이즈의 질문에 미라벨의 눈동자가 어둑한 빛을 띠었다. 아르칸젤로 제국의 수도로 가려면 레나토를 거쳐야만 한다. 미라벨은 만에 하나라도 샤를과 리카르도가 서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고 가야지. 여행을 떠나기엔 아직 어리잖아.”

    “그래, 샤를은 걱정 마. 내가 잘 보살필게.”

    루이즈는 믿음직한 미소를 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후원에 남은 미라벨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레나토로 간다.

    리카르도가 있는, 레나토로.

    그동안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력은 참 덧없기만 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일이란 그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필 그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 미라벨은 그를 증오함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리카르도와 눈이 마주친 것 하나로 온종일 설레어 하고, 그가 이름을 불러 줬다는 이유로 두근거렸던 날이 있었기에.

    ‘참 바보 같았지.’

    미라벨은 쓰게 웃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결코 리카르도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은 아프기만 했으니까.

    리카르도를 사랑함으로써 미라벨은 더 고독하고 괴로웠다. 그의 눈길 한 번에 가슴이 철렁였으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뿐인가.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곁에 있다는 이유로 주변의 멸시를 받아야 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까지 떠안으면서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줄 때까지도.

    그런 게 사랑이라면, 미라벨은 다시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 같은 건 더는 필요 없다.

    ‘적어도 그거 하나는 배웠네.’

    미라벨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리카르도를 사랑한 기억으로 상처만이 남은 줄 알았는데, 나름의 교훈을 얻었다.

    ‘날 기억이나 할까?’

    아니, 그는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새 그녀를 대신할 다른 여자를 찾아 희생양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얌전히 저택을 지키고 있을 인형 같은 여자는 아르밀라 외에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미라벨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미라벨은 아르밀라가 아니었으니까.

    * * *

    레나토로 향하는 왕녀의 마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실이 마차 전체에 보호 마법을 걸어 준 덕이었다.

    하지만 편안한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미라벨은 덜컹거리는 마차를 탄 사람처럼 불편해 보였다. 그녀와 동행한 소피는 왕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 아프신 건가요? 마부한테 좀 쉬었다 가자고 할까요?”

    “아냐.”

    심란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미라벨은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는 금빛 베일을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소피는 멍하니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세골린데 왕가의 문장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는 베일을 쓴 왕녀는 성서에 나오는 여신같이 아름다웠다.

    다만,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한 것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왕녀의 눈치를 살피던 소피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히 제가 따라왔나 봐요. 그냥 세골린데에 있을걸…….”

    “그런 말 하지 마, 소피.”

    미라벨은 화들짝 놀라며 소피의 손을 잡았다. 소피에게 제국에 함께 가자고 권한 건 미라벨이었다. 레나토에 묻혀 있는 사라와 만나게 해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피는 미라벨의 권유에 고마워하면서도 머뭇거렸다.

    사라가 미라벨 왕녀의 묘에 묻혀 있다는 건, 미라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소피도 죽은 동생의 무덤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가고 싶다고 해서 가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레나토의 비토레 대공에게 무덤에 묻힌 게 왕녀가 아닌 시녀라는 걸 밝혀야 하니까.

    물론 이미 레나토에서도 미라벨이 살아 있다는 얘기를 접했을 때, 그들이 장례식까지 치러 준 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묵과하고 있는데 당사자가 등장해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다.

    엉뚱한 사람의 장례를 치렀다고 밝히는 건 레나토 측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될 터.

    아마도 레나토에서도 그런 이유로 굳이 왕녀의 묘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왕녀가 나타나 자신의 묘에 묻힌 게 시녀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사실을 다 밝히면 대공 전하께서 크게 화내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왕녀님이나 세골린데에도 피해가 갈 거예요.”

    “그런 생각 하지 마. 사라는 내게도 동생 같은 아이였어. 적어도 ‘사라 레옹틴’의 비석 아래에서 쉬게 해 줘야지.”

    “왕녀님…….”

    “그리고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면 대공도 화는 못 낼 거야. 요새 아르칸젤로에서는 백합이 금보다 더 비싸다며?”

    미라벨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그녀의 위로에 소피도 물기 어린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그래서 정원의 백합을 다 가져오신 거예요?”

    “사라를 만나게 해 달라는 뇌물이지.”

    미라벨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마차의 뒤로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마차 뒤로 백합과 구근을 잔뜩 실은 짐마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활짝 핀 꽃들을 리카르도에게 주며, 사라의 묘에 방문하게 해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러려면 소피의 도움이 필요해. 내가 한 부탁 기억하지?”

    “네, 대공과 말을 섞지 않게 해 달라고 하셨죠? 그런데 왜요? 어차피 뵌 적도 없으시잖아요.”

    소피의 질문에 미라벨은 그녀를 잡은 손을 놓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미라벨은 베일을 눈 밑까지 드리운 후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베일 아래로 드러난 갸름한 턱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쪽에서 보기엔 난 죽다 살아난 사람이잖아. 얘길 나눠 봐야 서로 찜찜하기만 하지.”

    “그러실 수도 있겠네요.”

    소피는 눈을 말똥말똥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은 옅은 한숨을 쉬며 마차의 커튼을 젖혔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화창한 세골린데와 판이한 회색 하늘을 본 미라벨은 커튼을 살며시 쥐었다.

    이제 곧 있으면, 레나토에 도착한다.

    그리고 리카르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차갑고 잔인한, 그 남자를.

    “아…….”

    미라벨은 움칫하며 가슴을 쥐었다. 리카르도를 떠올리자마자,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커튼을 놓고서 가쁘게 숨을 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그는 날 못 알아볼 거야.’

    미라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을 다독였다.

    아르밀라와 미라벨은 다른 사람이다.

    아실의 팔찌가 걸어 준 보호 마법 덕분에, 아르밀라는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하게 되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것 같은 찬란한 금발과 여름날의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를 한 미라벨을 보고서 아르밀라를 떠올릴 자는 없다.

    더군다나 미라벨은 무려 왕녀가 아닌가.

    창녀 취급을 받던 아르밀라를 미라벨에게 갖다 대는 건 세골린데를 향한 모욕이다.

    만에 하나,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알아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베일까지 썼다.

    대부분의 대화는 소피가 대신 해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겠지만.’

    미라벨은 쓰게 웃었다. 굳이 베일을 쓰고 시녀의 입을 빌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터.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괜히 마음 졸일 필요도 없다.

    “왕녀님? 괜찮으세요?”

    미라벨이 거칠게 숨을 쉬자, 소피가 걱정하며 그녀를 살폈다. 미라벨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피를 진정시켜 주었다.

    “괜찮아. 오랜만의 여행이라서 좀 긴장됐나 봐.”

    “역시 조금 쉬었다가 가야겠어요.”

    소피는 하얗게 질린 미라벨의 얼굴을 보고서 마차의 천장으로 손을 올렸다. 천장을 두들겨 마부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천장을 두드리기도 전에,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를 늦췄다.

    그 의미를 깨달은 미라벨은 눈을 크게 뜨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미라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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