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리카르도가 붕대를 찢을 듯이 쥐자 하얀 붕대에 붉은 물이 들었다.
겨우 지혈해 놓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자, 나시르가 기함하며 외쳤다.
“그만하십시오!”
나시르의 외침에 에치오와 발레리오도 각각 리카르도의 팔을 한쪽씩 붙잡으며 말렸다. 리카르도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씩씩대다가 이를 갈았다.
“이거 놔.”
“안 돼.”
발레리오의 목소리에 리카르도가 미간을 구겼다. 그는 곁에서 들려온 단호한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를 발견한 리카르도가 버석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 황실에 돌아가면 황제께 고해. 대공이 반역을 꾀한다고.”
“왜? 그렇게 해서 사형이라도 선고받으려고? 미친 짓은 자네 혼자 해.”
발레리오는 역정을 내며 리카르도를 놓아주었다. 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더는 못 봐 주겠군.”
발레리오는 붕대가 반쯤 풀어진 리카르도의 손목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자네가 싫어서 도망친 여자라며. 그런 여자의 장례식을 치른 날 죽으면, 죽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대공비라면 저승까지 따라온 놈에 질색하면서 도망칠 것 같은데.”
발레리오의 신랄한 말에 리카르도가 턱을 당겨 물었다. 발레리오는 그를 쏘아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난 이 꼴을 더 못 봐 주겠으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해.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겠다.”
발레리오는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문 앞에 우뚝 섰다. 그는 굳은 채로 앉아 있는 리카르도를 돌아보고서 말했다.
“살아. 살아서 그 여자가 원하는 게 뭘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 그게 속죄라는 거야.”
발레리오의 말에 리카르도가 움찔했다. 낮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기 시작했다.
발레리오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사이, 리카르도는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시르, 지난 1년간의 회계 장부를 가져와라.”
“……예?”
나시르는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갑자기 회계 장부라니, 무슨 일인가.
그러나 그의 주인은 차분한 어조로 다른 이들에게 차례로 명을 내릴 뿐이었다. 하나같이 아르밀라가 사라진 이후로 멈춰 있던 행정과 관련된 명령들이었다.
그제야 나시르는 한숨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리카르도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나시르는 그렇게 믿으며 리카르도가 명한 장부를 챙기러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믿음이 단단히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머지않은 날의 일이었다.
* * *
“샤를!”
“왕자님! 거기 서세요!”
세골린데 왕실, 왕녀궁의 후원에 미라벨과 시녀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 아장아장 걷던 아기 왕자님은, 이제는 따라잡기 힘들 만큼 재빠르게 후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라벨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그녀는 곁에서 소매를 걷어붙이는 소피에게 부탁을 했다.
“소피, 가서 샤를 좀 데려와 줘.”
“저도 그러고야 싶죠. 하지만 저걸 보세요.”
소피는 난처해하며 흑발의 왕자님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꺄르륵 웃으면서 팔랑거리는 나비들 사이를 쏘다니는 아이가 그녀의 시선 끝에 있었다.
“엄청나게 활기차다니까요. 누굴 닮으셨는지.”
별생각 없이 마지막 말을 덧붙인 소피가 아차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미라벨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커다란 파란 눈을 보던 그녀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샤를, 이리 오렴.”
미라벨이 두 손을 벌리자, 도도도도 뛰어다니던 샤를이 방긋 웃고서 그녀에게 달려왔다.
소피는 자신이 한참 쫓아다니던 왕자님이 미라벨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 샤를은 엄마라면 껌벅 죽는 시늉도 할 아이였으니까.
“어마!”
쪽, 하고 부드러운 아이의 입술이 미라벨의 뺨에 닿았다. 미라벨은 아이와 뺨을 비비며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개구쟁이!”
“어마, 샤르 나비 잡아 조요.”
“그건 안 돼. 나비는 자유롭게 날게 놔둬야지. 그게 나비를 아껴 주는 방법이야. 알았지?”
미라벨은 샤를의 오뚝한 코를 꾹 누르며 자상하게 말했다. 아이는 엄마의 말뜻을 이해하려는 듯이 큰 눈을 깜박이다가 와락 그녀에게 안겼다.
“웅!”
알아들었다는 건지, 아니면 마냥 좋다는 건지.
미라벨은 따끈한 체온의 아이를 마주 안아 주며 쿡쿡 웃었다.
올해로 세 살이 된 샤를은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만,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짓궂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았고 미라벨에게 찰싹 붙어 있는 걸 좋아했다.
“어마 사랑해여.”
말을 할 줄 알게 된 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엄마도 샤를을 사랑해.”
미라벨은 샤를이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것도 제 아버지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샤를이 있어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잊을 수 있었다. 동시에 샤를 때문에, 리카르도를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리카르도를 빼닮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때때로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 때문에.
“너는 그 사람을 하나도 닮지 않았어. 그 사람은 잔인하기만 하거든.”
미라벨은 샤를을 꼬옥 껴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소피가 아이에게 씌워 줄 양산을 가지러 간 것을 확인한 뒤였다.
“누가 그렇게 잔인한데?”
하지만 등 뒤에서 루이즈가 다가오는 것은 미처 몰랐다.
미라벨은 흠칫하며 루이즈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왔어? 깜짝 놀랐네. 귀족 회의가 빨리 끝났나 봐?”
루이즈는 화제를 돌리는 동생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 됐어.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야.”
루이즈는 후원의 티 테이블에 앉으며 시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시녀들이 스콘과 티포트를 테이블에 놓고서 사라졌다.
“이리 와서 차 좀 마셔. 샤를도 이리 오고.”
루이즈는 손뼉을 짝짝 치며 샤를에게 말했다.
아이는 환하게 웃고서 루이즈에게 걸어갔다. 루이즈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샤를을 무릎 위에 앉힌 뒤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풍성하고 긴 금발을 두껍게 하나로 땋아 한쪽으로 넘긴 아름다운 동생을 보던 루이즈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왜 그렇게 봐?”
“아냐, 아무것도.”
루이즈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빙긋 웃었다.
미라벨이 돌아온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그녀가 사라졌던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샤를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미라벨이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루이즈는 다른 방향으로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샤를도 제법 컸으니 연회에 나가 보는 게 어때? 널 만날 수만 있다면 샤를을 친아버지처럼 키우겠다는 자들이 줄을 섰잖아.”
루이즈의 권고에 찻잔을 들던 미라벨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붉은 수색의 차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혼자서도 샤를을 잘 키울 수 있어.”
미라벨은 3년 전, 자신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세골린데의 국민은 죽은 줄 알았던 왕녀가 살아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아기 왕자님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졌음은 물론이다.
미라벨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자가 있으면 몰라도, 샤를이나 미라벨에게 더러운 소문을 갖다 대는 자는 없었다. 왕실이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도 미라벨은 자신을 세골린데 사교계로부터 고립시키고 있었다.
“고집하곤. 넌 연애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는 언니는.”
“나야 뭐. 워낙에 바쁘니까.”
“나도 바빠.”
미라벨은 차분한 표정으로 루이즈에게 대꾸하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새콤한 루이보스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레나토에 살 때는 차의 향을 음미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할 호사였는데. 이제 이런 건 그녀의 흔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았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루이즈는 동생에게 백기를 들고선 스콘을 작은 조각으로 떼어 내었다. 그녀는 스콘에 딸기잼을 묻혀 조카에게 먹여 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미라벨, 너. 아르칸젤로에 잠시 다녀오지 않을래?”
“……거기는 왜?”
“곧 있으면 건국제잖아. 우리도 올해부터는 가야지.”
“작년에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
“그땐 건국제가 안 열렸으니까. 왜, 백합 구근값이 갑자기 올라가는 바람에 제국이 시끄러웠잖아? 내전이 일어날 판국에 건국제나 할 순 없었겠지.”
루이즈는 무심히 대답하고서 찻잔에 설탕을 넣었다. 그녀가 찻잔을 스푼으로 젓는 사이, 양산을 챙긴 소피가 돌아왔다. 소피는 루이즈에게서 샤를을 넘겨받고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무릎 위가 가벼워진 루이즈는 치마를 툭툭 털고서는 마저 말했다.
“구근 하나로 제국 수도에 저택을 살 수 있을 만큼 그 값이 올랐다는데. 뭐, 어쨌든. 작년에는 그 난리가 나서 건국제를 못 했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한다고 했거든. 그래서 우리한테도 초청장이 왔고.”
미라벨은 루이즈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말없이 찻잔을 꼬옥 쥐었다.
이제는 제법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르칸젤로의 이야기가 나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이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 툭 튀어나오면 더욱.
“내가 가야 해?”
“아실은 마탑으로 가야 하고, 나는 다음 달까지 귀족 회의에 참여해야 하거든. 그렇다고 어머님께서 직접 제국에 행차하시긴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
미라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루이즈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말했다.
“왜, 레나토 때문에 그래?”
루이즈의 질문에 미라벨의 얼굴이 굳었다. 찻잔을 쥔 손에 세게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