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어머님.”
국왕은 딸과 시선을 맞추며 우아하게 턱짓을 했다. 그녀가 등장하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어나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미라벨과 할 얘기가 있다.”
국왕의 말 한마디에 소피를 위시한 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샤를을 돌보고 있던 유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모두 방을 비우자, 미라벨이 착잡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세골린데의 국왕, 오펠리 에티에네트.
그녀는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오늘날까지 세골린데의 태평성대를 유지해 오고 있는 군주였다.
오펠리의 판단력은 매 순간 정확했고 명철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세골린데는 진작 제국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오펠리의 치세 속에 세골린데는 평화를 만끽했다. 그렇기에 세골린데의 국민은 왕실을 우러러보았다.
여자인 그녀가 왕위에 올랐다고 불안해하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왕자인 아실이 마탑주가 되었을 때도 국민은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왕녀 루이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명한 군주와 마탑주인 왕자, 그리고 왕위 후계자인 왕녀. 거기다가 사랑스러운 막내 왕녀까지.
세골린데의 왕실은 완벽했다.
막내 왕녀가 사고사를 당하기 전까지는.
“대체 언제까지 내궁에 숨어 살 생각이니?”
오펠리는 온화하지만 강단 있는 어투로 딸을 질책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 살아 돌아왔을 때 그녀는 신께 감사했다.
하지만 미라벨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기쁘지 않았다. 귀하게 키운 딸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낳겠다고 하다니. 당혹스러웠다.
“여전히 샤를의 아버지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
“죄송해요, 어머님.”
오펠리의 추궁에 미라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예전 같았으면 엄한 질책에도 환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딸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로는 한결 어둡게 변했다.
“널 혼내려는 게 아니란다.”
오펠리는 갑갑함을 어쩌지 못하며 말했다.
미라벨이 임신한 것도, 그리하여 샤를을 낳은 것도 그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놀랍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왔는데 그런 게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미라벨의 성격이 예전과는 다르게 변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금방 주눅이 드는 것인지.
“미라벨, 내 딸.”
오펠리는 손을 뻗어 미라벨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보드라운 볼을 매만지고서 살포시 웃었다.
“네가 샤를을 아끼듯이, 나도 너를 아낀단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오펠리의 다정한 말에 미라벨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고서 입을 열었다.
“샤를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낳은 제 아들이잖아요.”
“아이에겐 아버지가 있어야 해. 너도 어릴 때 네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잖니.”
요절한 남편을 입에 올린 오펠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실에게 말해 기억 복원 마법을 걸어 주마. 그동안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러지 마세요.”
오펠리의 질문에 미라벨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잃지 않았으니 아실의 마법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라벨이 과거를 잊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미라벨은 그녀가 두고 온 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살을 에는 차가운 북풍, 경멸이 서린 서늘한 시선, 그리고 위압적인 한 남자.
미라벨을 아르밀라라고 부르며 그녀를 괴롭혔던 잔인한 사람.
그 사람을 잊기 위해 미라벨은 아직도 매일 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여야 했다.
‘난 다 잊었어. 잊을 거야.’
그리움은 때로 과거를 미화한다.
미라벨을 응시하던 리카르도의 아름다운 미소,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던 단단하고 따뜻한 품 같은 것을 추억하고 싶게 만든다.
미소를 지어 주었던 그 입으로 차가운 말을 내뱉고, 따뜻했던 손으로 그녀를 밀쳐 냈다는 사실은 흐릿하게 만들어 놓고서.
“……미라벨?”
리카르도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던 미라벨은 오펠리의 부름에 흠칫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머님, 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미라벨의 여린 몸이 파르르 떨렸다. 침실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데도, 레나토의 한기가 그녀를 에워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내 미라벨이 턱까지 떨자, 오펠리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널 괴롭게 하는 기억이라면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오펠리는 딸을 침대에 앉혀 주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미라벨의 손을 맞잡아 주며 화제를 바꾸었다.
“얼마 전에, 아르칸젤로의 대공이 대공비의 장례식을 치렀다는구나. 오늘은 그 얘길 하러 온 거야. 한때 너와 인연이 있던 자잖니.”
오펠리의 입에서 나온 얘기에 미라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공비의 장례식이라니.
‘아르밀라’의 장례식을, 리카르도가 치렀다는 걸까.
‘설마.’
미라벨은 혼란스러워하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오펠리가 놀라 물었다.
“미라벨? 왜 그러니?”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미라벨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며 말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표정 관리가 잘 되질 않았다.
“아실을 불러오마. 회복 마법을 걸면 괜찮아질 거야.”
“아뇨, 그냥 좀 잘게요. 어제 샤를이 밤새 울어서 잠을 잘 못 잤거든요.”
“그러게 샤를은 유모랑 같이 자게 하라니까.”
오펠리는 미라벨의 변명에 혀를 찼다. 난산으로 고생을 해서인지, 미라벨은 아이에게 유독 정이 깊었다.
원래 세골린데 왕실의 여인은 출산하고 나면 유모들에게 아이를 완전히 맡긴다. 가끔 육아실에 들러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미라벨은 그러질 않았다.
그녀는 유모도 한 명만 두고, 늘 아이 곁에 붙어 있었다.
오펠리는 그런 양육 방식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미라벨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미라벨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당분간은 유모를 늘리렴. 그래야 네가 푹 쉴 수 있어.”
“네, 그럴게요.”
미라벨은 정신없이 대답하고서는 오펠리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누웠다. 그녀가 편안히 눕자 오펠리가 침실을 나섰다.
“푹 쉬렴.”
홀로 방에 남은 미라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리카르도는 제국의 대공이다. 그의 소식은 세골린데까지 전해져 들어올 것이다.
해서 미라벨은 사실 그동안 마음을 졸이며 리카르도의 결혼 소식을 기다렸다.
그때쯤이면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외부에 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리카르도는 결혼을 하면 아르밀라를 완전히 잊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미라벨이 그를 잊고자 1년이 넘도록 바동대고 있는 것과 달리.
“흑…….”
미라벨의 잇새에서 억눌러 놓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르밀라의 장례를 치렀으니, 리카르도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아마도 곧.
그러니 이제 미라벨 왕녀는 대외적으로 나설 수 있다.
샤를을 위해서도 잘된 일이다.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이상하게 가슴이 저려 왔다.
미라벨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한때 그를 사랑하며 설레고 행복해하던 미라벨은, 이제 그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게 되었다.
미라벨은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아르밀라라는 과거는 다 잊었다.
잊을 것이다.
리카르도의 얼굴도, 그의 음성도, 모두 다.
* * *
리카르도는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온몸이 무거웠다. 누가 그의 기운을 빨아들인 듯, 사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리카르도가 가물거리는 눈에 초점을 잡으려 하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저,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나시르의 외침에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리카르도는 멍하니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박였다.
사람들은 검은 방으로 들어와 잔뜩 긴장하며 리카르도를 지켜보았다.
며칠 전 대공은 대공비의 장례식이 끝나자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하녀 루체였다.
붉은 방을 관리하러 들어온 그녀는 방 안에 쓰러져 있는 가주를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대공이 붉은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던 것이다.
루체의 비명에 방으로 들어온 자들은 리카르도의 모습에 경악했다.
핏빛에 물든 리카르도가 흐릿한 미소를 짓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르밀라를 가둬 두었던 그 방에서, 그는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조금만 더 출혈이 있었다면 쇼크사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눈을 뜬 리카르도는 의원의 말을 망연히 들으며 시선을 내렸다. 흰 붕대가 감긴 손목을 본 그가 아릿하게 웃었다.
“하다못해, 같은 날에 죽고 싶었는데.”
리카르도의 눈에는 자신을 살린 자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대공의 발언에 무거운 적막이 검은 방에 감돌았다.
방에 들어온 발레리오는 할 말을 잃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대공비의 장례를 치르라고 종용한 건 리카르도가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게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발레리오는 참담한 심정으로 물었다.
“끝내겠다는 게 이런 거였나?”
발레리오의 차분한 질문에 리카르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목의 붕대를 거칠게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