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레나토의 대공비, 아르밀라 비토레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대공비의 장례식은 유독 스산하였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대공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대공비의 관을 노려보았다.
새하얀 관에는 시신 대신에 망가진 팔찌가 들어 있었다.
대공은 피가 검게 눌어붙은 팔찌를 집착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관에 꽃을 바치러 온 조문객들은 팔찌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긴, 그걸 봐서 무엇 하겠는가. 그들에게는 불길한 장신구에 불과한 것을.
고막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 속에서 장례식이 끝났다.
조문객들은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듯이 서둘러 레나토를 나섰다. 식이 끝나고서도 미적거렸던 왕녀의 장례식 때와는 판이한 태도였다.
두란테조차 이번에는 레나토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가장 먼저 마차 위에 오른 조문객이었다.
화려한 사륜마차에 탄 두란테는 심란한 표정으로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나토의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장례식에 어울리는 어둑한 하늘을 찝찝해하며 보던 두란테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노선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였다.
물론 대공이 아프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저런 지경을 뜻하는 줄은 몰랐다.
오늘 두란테가 본 리카르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장례식을 곱씹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괴한 장례식이었다.
관에 시신이 없는 것부터, 상주의 행동까지. 이상하지 않은 것 하나 없었다.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상주인 리카르도의 행동이었다.
리카르도는 장례식 내내 넋이 나간 채로 있더니, 대공비의 관이 신전 밖으로 나갈 때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인 잃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관에 매달렸다. 관에서 팔찌를 빼내려고 하다가 기사들에게 저지당하기까지 했다.
관을 땅에 묻을 때는 또 어땠는지.
삽을 든 기사들이 구덩이에 하얀 관을 놓고서 검은 흙을 뿌리자, 리카르도는 절규하며 관으로 뛰어들려 했다.
그는 관에 들어 있는 거라곤 팔찌 하나뿐이라는 걸 잊은 사람처럼 대공비의 이름을 연신 외쳐 댔다.
그 광경에 조문객들은 다들 말없이 경악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모두 대공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두란테는 쩝 입맛을 다셨다.
‘바로 버리긴 아까운 패인데.’
두란테가 대공에게 미련을 가지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리카르도가 미쳤어도, 그가 제국 최고의 귀족이라는 사실은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미쳤다는 건 좀처럼 외부로 퍼지지 않을 것이다. 조문객들은 다들 레나토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들 중에는 레나토가 무너지면 당장 먹고살 길이 없어지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보좌관이 엄선해서 조문객을 초청한 듯했다.
“흐음.”
두란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대공에게 계속 붙어 있기는 영 찝찝했다. 아무리 국구 자리가 탐난다 해도, 제정신이 아닌 자를 황위에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게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귀한 딸을 미치광이에게 시집보내는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황태자에게 붙을 수도 없고.’
두란테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황제와 선대 대공, 그리고 대공비 사이의 비극을 만들어 낸 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두란테는 과거, 선대 대공의 귀에 형의 애인에게 청혼하라고 속살거렸다. 그녀가 청혼을 거절하거든 형이 황위에 못 오르게 하겠다고 협박하라는 꾀를 낸 것도 두란테였다.
황제와 선대 대공 모두 두란테가 그들 형제 사이에서 수작질을 벌였다는 건 모른다. 그 덕에 두란테는 아직까지도 황실과 대공가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귀족이었다.
황제가 황위에 오르고부터 두란테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는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황제가 건재할 때만 해도 그에겐 걱정할 게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후일을 도모할 때가 되었다.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었으니까.
애석하게도, 황위 계승 서열 1위인 황태자 발레리오는 두란테를 싫어했다. 죽은 전 황후가 아들에게 뭔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란테는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라도 리카르도를 황위에 올려야만 했다.
“역시 줄리아를 대공에게 시집보내야만 하나…….”
두란테는 석연찮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름의 결론을 낸 그는 지팡이로 마차의 천장을 두드렸다.
주인의 신호를 받은 마부가 마차를 수도 방향으로 틀었다. 탐욕을 실은 마차가 붉은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챙그랑!
화사한 궁전에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침대에 앉아 있던 미라벨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발치에 떨어진 손거울을 보고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심해야지, 샤를.”
미라벨의 시선이 그녀가 안고 있는 보자기로 향했다. 순면으로 된 보자기에는 레이스 모자를 쓴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었다.
“깜짝 놀랐잖니.”
미라벨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겼다.
“꺄륵!”
아기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서 손을 바동대며 웃었다. 맑은 하늘처럼 파란 눈동자에 미라벨의 아름다운 얼굴이 담겼다.
미라벨은 샤를을 보며 아들과 똑같은 파란색 눈동자를 빛냈다. 팔찌의 보호 마법이 풀리며 원래의 색을 찾은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네. 이 개구쟁이.”
“세상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왕녀님.”
샤를에게 먹일 이유식을 가져온 소피는 떨어진 거울 조각을 보고서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다른 시녀들에게 어서 치우라는 지시를 한 뒤 조심스레 미라벨에게 다가갔다.
“우선 샤를 님은 제게 주세요. 다치진 않으셨어요?”
“응, 괜찮아.”
미라벨은 샤를을 소피에게 안겨 주고서 머리에 꽂으려던 핀을 내려놓았다.
잠깐 핀으로 시선을 준 사이에, 샤를이 협탁의 손거울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야말로 찰나의 일이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거울을 떨어뜨렸지 뭐야.”
미라벨은 옅은 한숨을 쉬며 소피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낳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낳는 게 쉬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세골린데에 돌아온 미라벨의 건강은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 탓에 아실과 루이즈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지냈음에도, 아이를 잃을 뻔한 고비가 두 번이나 있었다.
출산 자체도 쉽지 않았다.
마탑주인 아실이 곁에서 마법을 퍼붓다시피 했는데도 샤를을 낳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미라벨은 자신이 중간에 몇 번이나 실신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미라벨이 아니라 아르밀라였다면, 샤를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변의 도움을 아낌없이 받은 덕에 샤를을 낳을 수 있었으니까.
연고도 없는 아르밀라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던 세상이 왕녀 미라벨에게는 다정하고 따뜻했다.
미라벨은 그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때론 씁쓸했다.
“그래도 두 분 다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소피는 샤를을 유모에게 넘겨주고서 미라벨의 머리에 핀을 꽂아 주었다. 화려한 금발에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핀을 신중히 꽂은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예쁘세요. 누가 왕녀님을 보고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소피는 유모의 품에 안겨 이유식을 먹는 샤를을 힐끗 보고서는 작게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혼처를 알아보시는 건 어떠세요?”
“난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제가 다 아까워서 그래요.”
소피는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한숨을 쉬었다. 세골린데의 꽃이라고 불렸던 왕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내궁에서만 지내다니.
그녀가 날이 갈수록 건강을 회복해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있기에, 그 아쉬움이 더 컸다.
건강해진 미라벨은 세골린데를 떠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그때는 마냥 밝고 환해서 반짝였다면, 지금은 한결 깊어진 눈빛으로 사람의 시선을 붙잡았다.
“언젠 빨리 나으라고만 하더니.”
미라벨은 소피를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우아한 손길로 머리의 핀을 매만졌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행동거지만 보면 타라 숲에 쓰러져 있던 자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만 해도,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상처 입은 새 같았는데.
미라벨과 기적처럼 재회하던 날을 떠올리던 소피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이젠 다 나으셨으니까요. 결혼이 부담스러우시면 연애라도 하시는 건 어때요?”
“쉿, 그만. 샤를이 들어.”
미라벨은 소피의 얘기를 잘라 내며 샤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난 샤를만 있으면 돼.”
“그래도요.”
“정말로 난 괜찮…….”
“미라벨.”
소피와 대화를 나누던 미라벨의 파란 눈동자가 문가로 향했다. 그녀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등장한 사람을 보고서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