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우고의 얘기에 리카르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아르밀라의 주치의를 바라보며 쇳소리를 내었다.
“지금…… 뭐라고…….”
“대공비 전하께서는 아이를, 전하의 후계자를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리카르도는 의원의 설명에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건 불가능해. 난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
이어서 말하려던 리카르도가 흠칫했다. 그가 실수를 했던, 유일한 순간이 머리를 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리카르도는 철저히 피임을 했다. 꾸준히 피임약을 복용하였으며, 관계의 마지막 순간에는 늘 아르밀라를 제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아르밀라를 품었던 무수한 날 중 하루를 떠올리는 그의 거대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카르도는 마수를 토벌하고 돌아온 날, 별관의 침실에서 아르밀라를 강제로 안았다. 정원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녀를 끌고 와서 억지로 품을 파고들어 끝없이 탐했다. 그녀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이성을 잃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안는 내내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늘 피해 왔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실수를 깨달을 순간, 자신의 씨를 남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를 아프게 했었다.
잔인하게도.
‘아악!’
리카르도의 눈앞에 비명을 지르는 아르밀라와, 그런 그녀의 모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사내의 모습이 펼쳐졌다.
사내는 가녀린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여자가 절규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실수를 덮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무시하고 집념에 차 머릿속에 새겨진 하나의 행동만을 반복했다.
악마같이 잔혹한 사내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망연히 그 장면을 보던 리카르도와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리카르도는 휘청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욱!”
리카르도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구역질을 했다.
악마는, 그 잔인한 사내는 리카르도였다. 아르밀라를 억지로 안고, 그녀의 아픔을 외면한 채 그저 제 실수를 지우고자 했던 악마.
구역질을 하던 리카르도는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전하!”
“리카르도!”
리카르도는 바닥을 짚고서 위액을 토해 냈다. 주변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아련히 들렸다. 선명히 들려오는 건 오직, 아르밀라의 절규뿐이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전하! 전하, 제발!’
리카르도는 망연자실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생채기가 났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바닥이 마구 일렁이는 것 같았다. 어지러움 속에서, 아르밀라의 간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지는 게 싫으신 건가요?’
눈물이 맺힌 가련한 초록색 눈동자가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잔인한 행위에 좌절하던 눈빛, 눈물 자국이 선명한 장밋빛 뺨.
‘제가, 부족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리카르도는 이를 뿌득 갈았다. 어떻게 해서든 한 가닥 희망을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는 뭐라 답했던가.
‘누구도 내 아이를 가질 순 없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죽일 거다.’
아아, 아르밀라.
나는 대체 너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준 것일까. 너는 대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일까.
“잘못했어…….”
리카르도는 피 토하듯 말했다. 눈이 뜨거웠다. 심장도, 머리도.
누군가 그의 심장을 마구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리카르도는 애타게 죄를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핏줄이 불거진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리카르도는 아득한 나락에 떨어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죄를 빌었다.
그러나 그에게 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고해를 들어 줄 이는, 이미 그의 곁에 없었다.
그 잔인한 사실이 리카르도를 끝없는 절망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전하!”
잘못을 빌던 리카르도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 *
침대에 누워 있던 리카르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을 보드랍게 감싸는 푹신한 침구의 감촉을 느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좀 더 누워 있어.”
리카르도가 이불을 젖히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발레리오가 심란한 어조로 말했다.
리카르도는 장장 사흘을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거의 자지 않고 지낸 탓에, 육체가 피로감에 무너져 버린 듯했다.
발레리오는 아직도 리카르도가 쓰러지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굳건한 나무 같던 그가 힘없이 무너지다니.
대공비가 임신을 했다는 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던 걸까.
발레리오는 레나토에 와서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측이 보기 좋게 엇나갔다.
‘안됐긴 해.’
발레리오는 자신의 만류에 침대에 기대앉는 리카르도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리카르도가 기절하듯 잠든 사이에 나시르에게서 대공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공비는 소문과는 다른 존재였던 듯했다.
소문에서는 대공을 홀린 요부쯤으로 묘사되었는데.
대공비는 순수하게 리카르도를 사랑했고, 그에게 의지했으며, 그를 맹목적으로 따랐다고 한다.
그녀는 리카르도의 차가운 성정을 어떻게든 보듬으려 했다고 했다. 그런 여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리카르도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여인이 아이까지 배고 있었다니, 누구든 제정신을 잡고 있기 힘들 터.
“당분간은 쉬도록 해. 나시르에게 레나토를 맡기고…….”
“장례식을 치러야겠어.”
“뭐?”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보던 리카르도가 내뱉은 말에 발레리오가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대공비의 장례식을 권했다는 사실도 잊고서 말했다.
“장례식이라니, 갑자기? 아니, 왜?”
발레리오의 질문에 눈산을 응시하던 리카르도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발레리오를 바라보는 이의 눈동자는 죽은 자의 눈처럼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카르도는 버석한 입술을 열며 나지막이 말했다.
“끝내야 하니까.”
“……그래.”
발레리오는 꺼림칙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리카르도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대공비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발레리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시르에게 전하지.”
리카르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발레리오가 방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문이 닫히자 그는 창백한 낯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가 아르밀라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차가운 눈바람이.
* * *
대공비의 장례식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장례식을 치른다는 얘기에 당황하였으나, 이내 침착하게 움직였다.
하여 리카르도가 깨어나고서 일주일 뒤, 저택 내의 신전에 장례식장이 마련되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린 카타리나 부인은 근심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눈길이 조문객을 맞이하는 대공에게 향했다.
리카르도는 검은 정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반쯤 미쳐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위태로운 분위기만은 여전해, 조문객들은 감히 그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괜찮아야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부인의 곁에 서 있던 파올로가 작게 속삭였다. 그는 대공비의 장례식이 거행된다는 얘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장례식이 이토록 빨리 준비된 것은 그가 적극적으로 나선 영향도 컸다.
“이제 레나토도 예전처럼 돌아올걸세. 가주님의 방황도 이걸로 끝나는 거야. 오, 아달베르토 백작님이 오셨군!”
후련한 얼굴로 말하던 파올로가 반색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카타리나 부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하녀들이 하얀 리넨을 옮기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나토도 오랜만이로군.”
하녀들을 향해 가는 부인의 뒤로, 두란테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그는 파올로의 안내를 받으며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언 1년 만이로군요. 저희 줄리아는 그새 사교계에 데뷔했습니다. 대공께선 관심도 없으시겠지만요.”
리카르도는 무감한 눈으로 말없이 두란테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보란 듯이 대공에게 무시당한 두란테는 입술을 씰룩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거창하게 할 일인가 싶군요. 시신도 없는 장례식이라니. 차라리 적당히 정리하고 대공비는 없던 걸로 하는 게…….”
“백작! 여기서 보는군요.”
리카르도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두란테에게로 돌아오던 때였다.
“레나토에서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마침 백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나시르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발레리오가 다급히 다가왔다. 그는 두란테를 리카르도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이끌고 오며 말했다.
“나라면 이쯤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발레리오는 두란테의 어깨를 움켜쥐고서 조용히 경고했다.
“대공비의 장례식에서 백작의 장례까지 치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
두란테는 발레리오의 발언에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 와중에도 리카르도는 모두에게서 동떨어진 것처럼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 이질감이 드는 그의 모습에 두란테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대공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이유로 아달베르토령의 레나토 기사들이 철수했으니까.
하지만 저건, 단순히 몸이 좀 안 좋은 게 아니지 않은가.
리카르도의 상태를 뒤늦게 파악한 두란테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었다. 그가 입을 꾹 다물자 발레리오가 손을 놓았다.
“적어도 지금은 대공을 도발할 때가 아닙니다.”
발레리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백작이 제게 목숨을 하나 빚지셨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두란테는 발레리오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장례식의 시작을 알리는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