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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44화 (45/120)
  • 44화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거셌다. 요란한 덜컹거림에 자고 있던 발레리오가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고서 창밖을 보는 그의 눈에 무언가 검은 형체가 들어왔다.

    ‘뭐지?’

    창문에 붙어서 보고서야 형체의 정체를 알아차린 발레리오는 조용히 경악했다.

    리카르도가 눈을 맞고 앉아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만큼 추운 날씨에, 그것도 기온이 제일 떨어지는 이 새벽에.

    “미쳤군!”

    발레리오는 황급히 가운을 걸치고서 방 밖으로 나왔다. 곧장 리카르도에게 향한 발레리오는 그의 양어깨를 쥐고서 외쳤다.

    “리카르도!”

    발레리오는 인상을 썼다. 거센 바람에 눈조차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리카르도는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 동상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 발레리오는 리카르도의 몸을 흔들었다.

    “괜찮나? 리카르도, 정신 차려 봐!”

    “……놔둬.”

    발레리오의 이가 딱딱 부딪칠 때가 되어서야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발레리오를 바라보며 어깨의 손을 쳐 냈다.

    “방해하지 마.”

    “여기서 뭘 하는데?”

    “기다리고 있어.”

    “누굴…….”

    리카르도에게 물어보려던 발레리오가 멈칫했다. 어제 낮에 나시르에게 들은 얘기를 떠올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어나. 이러다 큰일 나겠군.”

    발레리오는 강제로라도 리카르도를 일으키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뿌리라도 박은 것 같았다.

    식사도 변변찮게 한다면서 무슨 힘이 어디서 나는지, 버티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결국 발레리오는 그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대로 밤을 새울 셈이야? 여기서 기다린다고 대공비가 올 것 같아? 진짜로 그렇게 믿는 건 아니지?”

    추위에 인내심이 고갈된 발레리오가 외쳤다. 발레리오는 가운을 여미며 소리를 질렀다.

    “벌써 1년이 지났다며! 미련한 짓 그만해! 젠장, 나까지 얼어 죽겠어!”

    “……발레리오.”

    발레리오의 외침에 리카르도가 음산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리카르도는 발레리오가 레나토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돌아온 리카르도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발레리오에게 물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환장하겠군!”

    발레리오는 눈이 쌓인 바닥을 발로 찼다. 그는 씩씩대다가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이제야 내가 눈에 들어와?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건가? 이런 놈이 아르칸젤로의 대공이라니!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아주 좋아하시겠어!”

    발레리오의 비아냥에도 리카르도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오는 덜덜 떨면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나온 걸 눈치챈 호위대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 알겠으니까, 들어가서 기다리자고.”

    발레리오는 기사들에게 대공을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장정 넷이 매달린 뒤에야 리카르도를 옮길 수 있었다.

    * * *

    “장례식이요?”

    아침 일찍 황태자에게 호출된 나시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황태자가 내놓은 의견에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안 됩니다. 아르밀라 님 이름만 나와도 저택이 뒤집히는데요. 대공비 전하의 장례식은 못 치릅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둘 건가?”

    발레리오는 다리를 꼬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보기에 리카르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그가 아닌 누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리카르도가 미친 건 발레리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가 아르칸젤로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만 아니라면.

    “하루빨리 대공비의 죽음을 인정하고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해. 곧 있으면 건국제도 있잖나.”

    “건국제…….”

    발레리오가 꺼낸 화제에 나시르가 곤란해하며 턱을 매만졌다.

    제국의 건국제는 연중 가장 큰 행사다. 리카르도는 황궁의 축하 파티에는 가지 않지만, 이곳 레나토에서 국경을 넘어 방문하는 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외국의 귀빈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은 레나토의 영주로서 리카르도가 지고 있는 책무 중 하나였다.

    작년에는 미라벨 왕녀의 명복을 기린다는 이유로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르다.

    발레리오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나라야 굳이 레나토를 거치지 않고도 들어올 수 있지만. 세골린데는 어쩌려고? 가뜩이나 왕녀 일로 관계도 껄끄러운데. 대공이 넋이 나가서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겠어.”

    “세골린데라면 앞으로 2년간 건국제에 오지 않을 겁니다. 미라벨 왕녀님의 죽음을 3년간 애도하겠다고 했으니까요.”

    “2년 뒤라고 해서 리카르도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하는 말이야. 더 심각해진다면 모를까.”

    발레리오는 심각한 얼굴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가 보기에 리카르도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2년도 짧았다. 이미 지난 1년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지 않았나. 술에 전 몸을 회복하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릴 터.

    “의원은 지금 대공의 상태를 어떻게 진단했지?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하던가?”

    “그게…… 모릅니다. 전하께서 진료를 거부하셔서요.”

    “기가 막히는군. 당장 의원을 불러.”

    발레리오의 얘기에 나시르가 하인에게 명을 내렸다. 하인을 내보낸 그는 감동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대공 전하를 걱정하시는군요.”

    “황태자로서 제국을 걱정하는 거야.”

    발레리오는 찝찝해하며 대답했다. 지금 리카르도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로서도 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리카르도가 곤경에 처하면 통쾌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가 두란테와 함께 자멸하길 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리카르도가 엉망으로 망가진 걸 보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아는 리카르도 비토레는 저런 인간이 아니야. 대공은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자여야 해. 그래야 마음껏 미워하지 않겠나.”

    발레리오는 변명처럼 말하고서 나시르에게 눈짓을 해 주었다. 나시르는 그의 신호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시르와 발레리오가 걱정한 것과 달리,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장례식을 하자는 얘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의문을 품었다.

    “그걸 왜 해야 하지? 발견된 건 팔찌밖에 없는데.”

    “피 묻은 팔찌 말이지?”

    발레리오의 질문에 리카르도의 거대한 몸이 움찔했다. 그는 사촌을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죽었다는 증거가 되진 않아.”

    “1년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았으면, 죽은 거야.”

    발레리오의 거침없는 얘기에 나시르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도의 눈이 짐승의 것처럼 번뜩였다. 금방이라도 황태자의 목을 졸라 죽일 것 같았다.

    그러나 발레리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

    “장례식을 치러 줘야 대공비도 하늘에서 편안하게 지내지. 자네가 붙잡고 있으면 편히 쉬지도 못해.”

    발레리오의 설득에 리카르도가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의 턱이 당겨지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집무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발레리오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찾을 수 있는 곳은 다 뒤져 봤다며. 적당히 하고 보내 줘.”

    “아르밀라는 죽지 않았어.”

    “아니. 죽었어.”

    발레리오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리카르도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

    목이 조일 정도로 거센 힘이었지만, 발레리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쯤은 각오하고 있었던 듯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대공비의 장례를 치러 줄 생각이었나? 2년 뒤? 아니면 3년 뒤에?”

    “아르밀라는 살아 있어!”

    리카르도는 성마른 포효를 했다. 그러곤 이내 발레리오를 내던지듯이 놓고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주먹을 중심으로 쩌적, 하고 두꺼운 나무 상판이 갈라졌다.

    “절대, 죽지 않았어. 죽었다 해도 내가 다시 살려 낼 거다.”

    벌게진 눈으로 으르렁대던 리카르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문가에 선 자를 발견한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주치의가 여긴 웬일이지?”

    “제가 불렀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안 하신 지 오래되셨으니까요.”

    리카르도는 책상에서 손을 떼어 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고고한 걸음걸이로 의원에게 걸어가 말했다.

    “의원이 말해 봐라. 다들 대공비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고들 하는데.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장례식을 치러야겠어?”

    우고는 대공의 질문에 벌벌 떨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우고는 진료 가방의 손잡이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여잡았다.

    대공비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고는 망연자실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공비가 임신했다는 걸 대공에게 알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이제라도 대공에게 알려야 하나.

    머리와 양심을 괴롭히는 고민으로 우고는 매일 번민했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대공이 의원을 찾지 않아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차였는데. 대공이 우고를 찾는 것도 모자라, 직접 그에게 질문까지 던졌다.

    지난 1년간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우고는 무거운 짐을 덜어 내기로 했다. 대공비의 비밀은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버거웠다.

    “실은 전하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대공비 전하의 몸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우고가 꺼낸 이야기에 대공은 물론이고 황태자와 나시르까지 주목했다. 우고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입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사라지셨을 당시, 임신 중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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