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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43화 (44/120)

43화

나시르는 발레리오의 속내를 살피려는 듯 주의 깊게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대공을 견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시르였다.

그럼에도 대공을 만나게 해 준 건, 그가 칙서를 가지고 온 사자이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사자를 거부하면 그야말로 반역이니까.

그러나 황태자에게 이 이상의 정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리카르도를 만나게 한 것으로도 이미 큰 모험이었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아는데.”

나시르의 경계하는 시선에 발레리오가 황급히 말했다. 그는 머리를 헝클이고서는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리카르도가 저 꼴이 되었는데 기쁘지 않아. 오히려…….”

발레리오는 입술을 깨물고서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마음에 걸려.”

“걱정하시는 겁니까?”

어느덧 게스트 룸에 당도한 나시르는 발레리오에게 방문을 열어 주었다.

나시르를 따라 녹색으로 치장된 방에 들어온 발레리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상태로는 자객을 보내지도 못하잖아. 그런데 자객은 꾸준히 나를 찾아왔거든.”

“설마, 전하를 의심하셨던 겁니까?”

나시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제가 지난번 서신으로도 말씀드렸지요. 대공 전하께선 황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신다고. 그런 분이 자객을 보내다뇨. 말도 안 됩니다.”

“자네는 리카르도의 사람이잖나.”

“그래서 제 말은 믿지 않으셨군요.”

나시르는 허리에 손을 짚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는 차분해진 얼굴로 발레리오를 바라보았다.

“이해합니다. 목숨이 위협당하면 모두가 의심스러우시겠지요.”

나시르의 이성적인 반응에 발레리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나시르가 탐이 났다.

발레리오의 주변에는 이런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 더 날이 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리카르도가 가진 것이 더 커 보이고, 더 탐이 나는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대공비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1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럼 설마, 황궁에 오다가 말았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어쩌다 사라졌는데?”

“그게…….”

지금까지는 잘 대답하던 나시르가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의 태도에 답답해진 발레리오가 채근했다.

“국경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공을 저대로 둘 순 없잖아. 대공비를 찾아야 할 것 아닌가.”

“도망을…… 가셨습니다.”

“대공비가 제 발로 저택을 나갔다고? 왜?”

발레리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카르도가 저렇게 망가질 정도로 대공비를 사랑하는데, 그녀는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도망을 쳤단 걸까.

“원래 대공비가 대공을 구해 줬다며. 그래서 서로 사랑하게 됐고. 그런데 사랑이 식은 건가?”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던 발레리오가 중얼거렸다.

“그럼 이혼을 하지, 도망을 칠 건 뭐야. 답 없는 여자로군.”

“그런 게 아닙니다.”

나시르는 착잡한 얼굴로 발레리오를 막았다. 그는 입술을 말아 물다가 외알 안경을 바로 썼다.

“아르밀라 님은 전하를 사랑하셨습니다. 가여우신 분입니다.”

나시르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발레리오를 엄격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행여나 전하께 아르밀라 님의 이름을 말하거나 해서 그분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알았네.”

발레리오는 떨떠름해하며 대답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것도 나시르가 큰 인심을 쓴 거라는 걸 안다.

만약 그들에게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알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하를 믿겠습니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나시르는 부드럽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발레리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에 흔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아들의 이런 유약한 면을 못마땅해했고, 얼음 같기만 한 리카르도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럼 쉬십시오.”

나시르는 깍듯이 예를 갖추고서 방을 나섰다. 따뜻한 녹색 방에 머무르게 된 발레리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성에가 낀 창문을 바라보았다.

* * *

리카르도는 손에 든 술병을 천천히 떨궜다. 그의 발치에 유리병이 뒹굴고, 황금색 액체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집무실의 붉은 러그에 스며든 독한 알코올 향에 리카르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누군가 왔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상관없다. 어쨌든 아르밀라는 아니니까.

리카르도는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까슬한 피부가 손 아래 느껴졌다.

공허한 적막 속에서 리카르도가 손을 떼어 내었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폐한 장원의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르밀라와 함께 보았을 때와 크게 변하지 않은 풍경이건만, 오늘따라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저 장원을 내다보며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때 아르밀라는 기뻐하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리카르도의 아내가 되겠다고 답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행복에 물들어 있었다. 리카르도마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 만큼.

아르밀라는 행복한 신부였다. 적어도 리카르도가 보기에는 그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1년 뒤에는 자유롭게 놓아주겠다는 말에 겁에 질려 매달렸다.

그랬던 그녀가, 얼마 뒤에는 그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떠났다.

리카르도를 버렸다.

창문을 바라보던 리카르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고요한 호수 같던 마음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술로 재워 놓았던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자,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리카르도는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곤 로비를 가로질러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세찬 눈보라가 그를 에워쌌다.

리카르도는 바람을 헤치며 흔들림 없이 걸었다. 그의 걸음은 눈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허한 눈이 산을 바라보았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산을.

그동안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산을 수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짚이는 곳에 전부 사람을 보냈다.

마탑에 갔을까 싶어 그쪽에 연락을 해 보고, 레나토의 민가에 숨어들었을까 봐 모든 가구를 뒤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밀라를 찾을 수 없었다. 작은 단서 하나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피 묻은 팔찌 말고는 리카르도에게 남은 게 없었다.

때로는 그래서 아르밀라가 그의 곁에 있던 게 꿈 같았다.

아르밀라의 흔적이랄 게 저택에 없어서. 조악한 드레스 몇 벌 말고는,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그래서 리카르도는 불안해질 때면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아르밀라의 체취가 묻은 드레스를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면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드레스의 체취는 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갔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리카르도의 바람이 무색하게 체취는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산을 향해 걸어가던 리카르도의 무릎이 눈길에 묻혔다. 리카르도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눈밭에 주저앉았다.

“아르밀라…….”

산을 바라보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굵은 눈물이 흘러 날카로운 턱 선에 맺혔다.

아르밀라를 거부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아르밀라를 내치고, 상처 주고, 그녀를 울게 만든 건 리카르도였다.

그러니 그에겐 그녀를 그리워할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도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그리웠다.

너무도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뭐길래, 리카르도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걸까.

죄책감? 원망? 집착?

아니다. 그런 단어로는 이 지독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 이 괴로운 감정은 고작 그런 게 아니다.

‘사랑해요, 전하.’

눈을 맞으며 앉아 있던 리카르도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아르밀라의 가련한 음성이 귀에 빙빙 돌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전하.

“큭…….”

리카르도는 가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괴로웠다. 누군가 심장을 검으로 헤집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리카르도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사랑은 슬픔이고 분노고 비극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여 그녀를 자신의 성에 가두었으며, 황제는 어머니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사생아의 씨를 뿌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황제를 사랑하여 스스로 목을 맸다.

리카르도에게 사랑은 혐오스럽고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르밀라의 사랑한다는 말은 좋았다. 그 말의 울림이 좋았고, 그 속에 담긴 절박함과 애정이 좋았다.

리카르도는 다시 한번 더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아르밀라에게서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할 텐데.

“제발, 아르밀라…….”

리카르도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르밀라를 찾았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네가 듣고 싶은 것을 말해 줄게. 네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게 해 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줄게. 그러니 제발.

“돌아와.”

갈 곳 잃은 애원이 눈에 휩쓸려 사라졌다. 리카르도는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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