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미리 말씀드리지만, 대공 전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황궁에도 그래서 가지 못하신 거고요.”
“알아. 자네가 그렇게 써서 보냈잖아.”
발레리오는 무심히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대공이 황궁으로 오려다가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보좌관이 보낸 편지에 이내 대공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건강에 문제가 생긴 적이 없던 대공이다. 그런 그가 말 머리를 돌릴 정도라면 크게 아픈 게 아닌가.
해가 지나도 대공이 황궁에 오질 않자, 황제는 직접 그를 보러 가겠다는 얘기까지 꺼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국경 지역에 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발레리오는 그를 대신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 방문하리라는 언질을 미리 하지 않은 것은 작은 심술이었다.
“여긴 여전히 춥군. 이런 곳에 사니 병이 들지.”
발레리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는 봄꽃이 피다 못해 지고 있건만, 레나토는 봄기운 한 자락 느껴지질 않았다.
수도에서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바보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여기에 오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발레리오가 작게 기침을 하자, 그를 안내하던 나시르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원래는 불을 세게 때워 놓는데.”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대공 전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요. 밤낮으로 저택의 불을 켜 놓았더니 장작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럼 장작을 더 패면 되잖아. 여긴 남아도는 게 기사고 일꾼 아니었나?”
“그게…….”
나시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발레리오는 그의 반응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잡아내었다.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군.’
발레리오가 아는 나시르 조아키오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답을 찾아내는 인재였다.
그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입학해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할 때도 교수들이 아카데미에 남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발레리오도 나시르를 영입하기 위해 그에게 아쉽지 않은 제안을 했었다. 결국 나시르가 택한 건 발레리오가 아니라 리카르도였지만.
“다 왔습니다.”
어느새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한 나시르가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그는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대공에게 황태자의 방문을 알렸다. 발레리오는 나시르의 얼굴을 예리한 눈길로 살폈다.
대체 이곳 레나토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들어가시지요.”
발레리오는 나시르가 열어 준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했던 레나토행이 뜻밖의 즐거운 발견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며.
* * *
발레리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공의 집무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도둑이 들었나 싶게, 책과 물건이 사방에 마구잡이로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담배 연기까지 지독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오는 연기가 자욱한 집무실에 들어서며 손을 휘저었다. 그는 집무실의 탁한 공기에 기침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눈바람이 들이닥치며 무거운 벨벳 커튼이 펄럭였다. 연 순간부터 후회하게 되는 맹추위였다. 발레리오는 인상을 쓰며 창문을 닫았다.
“……나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잔뜩 쉰 음성에 창문을 닫던 발레리오가 흠칫했다. 몸을 틀자 책상 앞에 널브러진 술병과 수척해진 리카르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설마 그걸 다 마신 건가?”
“나가라고.”
리카르도는 발레리오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황태자를 보았다. 날카롭게 빛나던 보랏빛 눈동자가 허공을 보는 듯 흐리멍덩했다.
발레리오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재킷 안쪽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황제 폐하의 칙서를 가지고 왔어. 나갈 땐 나가더라도 이건 전해야 해.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은 아르칸젤로 황제의 칙서를 받들라.”
발레리오가 두루마리를 펼치며 명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죽 의자에 권태롭게 늘어져 앉아 발레리오가 있는 쪽을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리카르도 비토레, 어서 황제 폐하의 칙명을 받들라.”
“읽어 봐.”
“뭐?”
“읽어 주러 온 거잖아. 읽어 보라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발레리오는 기가 찼다.
상태가 안 좋다더니,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사자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그것도 황태자를.
“자네 미쳤나?”
발레리오의 핀잔에 리카르도가 공기가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몸을 들썩이면서 웃기 시작했다.
“크크큭…….”
“리카르도?”
“그래, 난 미쳤어. 미친놈이지. 아르밀라를 두고 떠나선 안 됐는데. 족쇄라도 달아 놨어야 했는데. 망할…….”
리카르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들들 끓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거 아나? 그 여자는 내가 싫다고 했어. 분명 날 사랑한다고 했었는데. 언제부터 내가 싫어졌을까? 왜 내가 싫어졌을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발레리오는 당황했다. 그가 알던 리카르도는 흔들림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더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리카르도는 영락없는 폐인이었다.
원래도 날카로운 인상이었건만 살이 내려서 예민해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입술을 버석하게 말라 있었고, 잠도 자지 않는지 눈 밑은 퀭하게 변해 있었다.
“아르밀라, 내 아내 말이야.”
발레리오의 질문에 대답하던 리카르도의 눈이 돌연 번뜩였다. 보랏빛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돌더니, 그가 벌떡 일어났다.
리카르도는 발레리오가 뒷걸음질 칠 틈도 주지 않고서 그에게 불쑥 다가갔다. 그러고는 황제의 칙서를 낚아챘다.
“리카르도!”
“여기 쓰여 있는 이름. 이 이름……. 아르밀라 비토레. 이게 내 아내야.”
리카르도는 황제의 칙서에 적혀 있는 이름이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발레리오는 아연실색했다.
황제의 칙서는 그동안 리카르도에 보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아르밀라 비토레를 정식 대공비로 인정할 수 없으니, 두란테 아달베르토의 여식인 줄리아 아달베르토와 혼인하라는 명이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 비토레라는 이름만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것 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자네 아내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데?”
당혹감이 서린 질문에 리카르도가 칙서에서 천천히 얼굴을 떼어 내었다. 그는 발레리오를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몰라.”
“……뭐?”
“모른다고.”
리카르도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칙서를 떨구고서 손을 덜덜 떨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해쓱해진 얼굴을 덮었다.
“찾을 수가 없어. 산을 뒤지고 또 뒤졌는데, 마수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기사를 풀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찾을 수가…….”
리카르도는 천천히 무너지며 주저앉았다. 그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제발, 아르밀라…….”
발레리오는 리카르도의 흐느낌에 조용히 경악했다.
리카르도가 울다니.
리카르도 비토레는 누가 제 목을 베어 낸다 해도 태연하게 굴 인간이었다.
그런 자가 이토록 형편없이 무너지고 자신을 잃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봐, 리카르도…….”
“황태자 전하. 이만 나오시지요.”
혼란스러워하던 발레리오가 리카르도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을 때였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시르가 조용히 문을 열고서 그를 불러내었다. 발레리오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발레리오는 평생 리카르도를 증오하며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애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한 몸에 받는 대공이 미웠다.
발레리오가 가지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관심부터 보좌관까지도 모두 다 리카르도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발레리오는 리카르도에게 측은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리카르도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 * *
“대체 대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집무실 밖으로 나온 발레리오는 혼란스러워하며 나시르에게 물었다. 나시르는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며 건조하게 말했다.
“모른 척해 주십시오.”
“어떻게 이걸 모른 척해? 언제부터 이랬나? 설마, 지난 1년 내내 저 상태였나?”
“이건 절대로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아르칸젤로의 국경은 굳건해야 하니까요.”
나시르는 대답을 피하며 말했다.
“가벼운 감기를 앓고 있다, 그 정도로 황제 폐하께 고해 주십시오.”
“……알겠네.”
발레리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이니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듣자 하니 대공비가 사라진 것 같던데. 대공이 대공비에게 푹 빠졌다는 게 사실이었군.”
발레리오의 혼잣말에 나시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상심이 크십니다.”
“저건 ‘상심이 크다’고만 할 게 아니지 않나. 대공비는 왜 사라진 거야? 누가 납치라도 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일이 더 쉬웠을 텐데요.”
나시르는 한숨을 쉬고서 발레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화제를 바꾸며 몸을 돌렸다.
“여독을 푸셔야지요. 환궁하시기 전까지 지내실 곳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리로.”
“나시르.”
발레리오는 복도를 걸어가는 나시르를 붙잡았다. 이런 찝찝한 상태로 황궁에 돌아갈 순 없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난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