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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41화 (42/120)
  • 41화

    루체는 훌쩍거리며 울었다. 마음 같아선 입을 크게 벌려 우는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가주에게 불려 와 있었으니까.

    음습한 리카르도의 시선이 루체에게 집요하게 붙었다.

    “아르밀라가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나? 잘 생각해 봐라.”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질문이었다. 루체는 모른다고 했지만, 리카르도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루체는 흠칫하며 말했다.

    “저, 정말 몰라요……. 아무것도…….”

    “너는 아르밀라의 몸종이었다. 그런데 모른다고?”

    분노가 서린 질문에 루체는 오들오들 떨었다.

    이소타 협곡을 마수의 피로 붉게 물들이고서 돌아온 리카르도는 저택을 말 그대로 뒤집었다.

    그는 모든 사용인을 소집해 아르밀라에 관한 작은 단서라도 말하라고 추궁하였다. 겁먹은 사용인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아예 한 명씩 따로 불러내었다.

    그리하여 저택의 모든 사용인은 가주와 독대를 하게 되었다.

    집사와 하녀장을 시작으로, 모두가 가주를 만나 대공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대공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는지.

    대공비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리카르도는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끈질기게 물었다.

    여기서 리카르도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용인 대부분은 아르밀라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도 대공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나마 아르밀라와 말을 섞어 본 사용인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들은 가주의 앞에서도 대공비에 대한 적개심을 잘 감추질 못했다.

    그녀의 트집을 잡고 험담을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들은 아르밀라를 천하의 악녀로 여기고 있었다.

    선명한 악의에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주제도 모르고 가주를 사랑해서, 대공비가 되어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나온 궁핍한 이유에 리카르도는 기가 찼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르밀라를 미워했다니.

    심지어 비앙카처럼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는 자도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 리카르도에게 크게 당한 것으로 앙심을 품었는지, 모든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리카르도는 무심히 그녀를 내보냈다. 하녀와 실랑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비앙카는, 상대하는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그녀를 대하느니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찾는 게 나았다.

    골치가 아팠다.

    사용인들과 얘기를 한 건 아르밀라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르밀라가 얼마나 외롭게 지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리카르도가 들여다본 아르밀라의 세상은 숨이 막혔다.

    아르밀라에게는 리카르도밖에 없다. 이 단순한 문장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고백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는 말이라고 여겼다.

    그게 정말로 아르밀라의 세상에는 리카르도밖에 없다는 얘기인 줄은 몰랐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지?’

    아르밀라는 리카르도가 저택을 비운 사이에는 없는 사람처럼 지낸 것 같았다.

    하다못해 정원 산책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가깝게 지낸 이라고는 몸종 하나가 전부였다.

    리카르도는 심란한 마음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르밀라에 대해 아는 건 뭐든 말해라. 작은 것이라도 좋다.”

    “아, 아르미라 님은 가주님을 좋아해요. 많이, 많이…….”

    훌쩍거리던 루체의 말에 리카르도가 입술을 짓씹었다. 몸종이 한 말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전에는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던 사실이었다.

    그게 왜 이제 와 그의 마음을 시리게 하는 건지.

    “또?”

    리카르도는 태연한 어조를 꾸며 대어 몸종을 추궁했다. 그러자 몸종이 다시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더는 몰라요. 아, 아르미라 님 보고 싶어……. 흐에엥, 아르미라 님…….”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애처로운 울음에 리카르도의 잇새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아르밀라의 유일한 편이라는 몸종은 그녀를 도와주기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찾으며 엉엉 우는 루체를 보다가 피로한 눈을 찌푸렸다.

    아르밀라는 이 몸종에게도 사랑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이 넘치는 여자였으니까.

    그런 여자를 도망치게까지 한 건 리카르도였다.

    사랑에 지치게 만들고 슬퍼하다가 떠나게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리카르도였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잘못에 마음이 미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돌이키고 싶었다.

    모든 걸 돌이켜서 아르밀라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가 사랑하고 싶은, 사랑하는 이는 이미 떠나고 없으니.

    “됐어, 나가 봐라.”

    리카르도는 루체를 내보내고서 창밖을 보았다. 저곳 어딘가에서 아르밀라가 헤매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여자다. 새벽에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안기던 아르밀라였다. 그런 그녀가 눈산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까.

    리카르도는 재킷 안쪽에서 아르밀라의 팔찌를 꺼냈다. 그것을 시린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팔찌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후회로 물든 눈물이 눈꺼풀에 맺히다, 뺨을 타고 흘렀다.

    “아르밀라…….”

    부르튼 입술 사이에서 애탄 음성이 비어져 나왔다.

    아르밀라, 나는 왜 너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을까.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널 외롭게 한 것일까.

    결국 네가 나를 떠나도록.

    팔찌를 쥔 리카르도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눈을 뜬 그는 입매를 허물어뜨리면서 웃었다. 굵은 눈물을 흘리는 자의 웃음이 더할 나위 없이 서늘하였다.

    그때부터였다.

    리카르도의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 * *

    “좀 어떠신가?”

    파올로는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온 나시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에게 목숨을 협박당한 이후로 그와 독대하는 것이 두려워진 탓이었다.

    “좋지 않습니다.”

    나시르는 착잡해하며 대답했다. 황궁으로 가던 길에 돌아온 일로 리카르도는 황실파에게 트집을 잡혔다. 무슨 꿍꿍이로 행선지를 바꿨냐는 것이다.

    거기다 그 후로 1년이 다 되도록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리카르도에 대한 의혹은 커져만 갔다.

    “조만간 저 혼자서라도 황궁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없으면 여긴 어떡하라고!”

    파올로는 질겁을 하며 외쳤다.

    대공비가 사라지고서 1년째. 레나토는 부쩍 피폐해졌다.

    대공의 의연함 아래, 혹한 속에서도 질서를 지켰던 자들은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었다.

    그들을 다스려 줄 대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국경 지역 순찰도 멈췄으며, 영지를 돌보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오로지 대공비를 찾는 것뿐이었다.

    아르밀라의 도망으로 인한 문제는 레나토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현재 레나토의 모든 기사가 대공비를 찾고 있기에, 레나토를 지킬 인력이 부족해졌다. 그리하여 아달베르토에 파견했던 기사들은 모두 돌아와야 했다.

    이로 인해 아달베르토령의 두란테 백작도 무척 심기가 불편해져 있다. 이대로라면 그가 다음 분기에 곡식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평온하다 못해 고요했던 레나토는 지금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저는 레나토를 위해서 가려는 겁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최대한 빨리…….”

    콰앙.

    “손님이 왔는데, 왜 집사가 마중을 나오질 않지?”

    나시르가 파올로를 달래던 때였다. 본관의 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나시르는 제 눈을 의심하였다. 황실에 있어야 할 황태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환영 인사는 그게 단가?”

    발레리오는 나시르를 보며 느른하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까닥하자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황태자 호위대가 로비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발레리오는 양옆으로 도열한 호위대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대공이 하도 오지 않기에, 내 직접 폐하의 칙명을 가지고 왔네.”

    발레리오가 걷는 길 끝에 서 있던 나시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황태자에 대한 예를 갖췄다.

    “비토레가의 보좌관, 나시르 조아키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런, 나시르.”

    발레리오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나시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받아 가는 호위대의 기사에게 눈짓을 해 주고서 말했다.

    “오랜만이라고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건가? 아카데미에선 안 이랬잖아.”

    “그때는 함께 수학하는 동기였으니까요.”

    나시르는 덤덤히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정중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공 전하를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그럴 거 없네.”

    발레리오는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려는 나시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발레리오는 당황하는 나시르에게 옅게 웃어 주며 말했다.

    “함께 가지. 사촌을 만나는 데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욘 없잖아?”

    “……그러시지요.”

    나시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발레리오를 보다가 대답했다. 그는 몸을 틀어 황태자에게 길을 터 주고서는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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