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따뜻한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느낌.
몸의 긴장이 풀리는 포근하고 따스한 공기에 둘러싸여 있던 아르밀라가 눈을 움칠했다.
“……라벨?”
찬란한 금발의 사내가 아르밀라의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아르밀라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미청년의 걱정이 가득한 초록색 눈동자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한 청년의 얼굴을 마주한 아르밀라의 눈가가 슬픔과 감격으로 일그러졌다.
“아실 오빠…….”
“정신이 들었구나!”
아실은 아르밀라의 손을 덥석 잡으며 울먹였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손 아래에서 아르밀라의 팔찌에서 퍼졌던 것과 같은 빛이 환하게 퍼져 나왔다.
‘아, 그래…… 그랬지.’
아르밀라는 익숙한 마법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다.
아르밀라는, 아르밀라가 아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미라벨 에티에네트.
세골린데의 왕녀였다.
미라벨은 작년 겨울, 아르칸젤로의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과 혼인을 치르기 위해 레나토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길목에서 마수를 만나는 사고를 당했다.
“네가 살아 돌아오다니. 이건 기적이야.”
아실은 여동생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감수성이 풍부한 그는 자신과 꼭 닮은 미라벨의 금발을 어루만지며 울컥했다.
“내 보호 마법이 풀렸다는 건 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거겠지? 비토레 대공이 백합 펜던트를 돌려보냈을 때 짐작은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빠…….”
미라벨은 아실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서 아실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날 어떻게 찾은 거야?”
“타라 숲에 쓰러져 있었어. 루이즈가 또 스테렌 샐러드가 먹고 싶다고 해서 소피가 버섯을 따러 갔었거든. 거기서 널 발견했대.”
쌍둥이 누나의 이름을 입에 올린 그가 피식 웃고서는 덧붙였다.
“루이즈의 고집이 도움이 될 때도 다 있네.”
“루이즈 언니는 어디에 있어?”
“소피를 데리러 갔어. 너 깨어날 때 됐다고 해서 아까 갔는데…….”
“나 왔어!”
때마침 침실의 크림색 문이 활짝 열리고, 금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시녀를 이끌고 온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아실을 밀어 내고서 미라벨의 손을 부여잡았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내 동생.”
아실과 똑같이 생긴 이목구비에 선이 더 가느다란 얼굴을 한 루이즈가 눈썹을 모았다.
“미라벨, 너…….”
루이즈는 눈을 찡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는 듯했다.
“너, 흠, 네가 죽었다 살아와서, 정말로…….”
“그냥 울어, 그게 더 흉해.”
“시끄러워, 아실.”
루이즈가 아실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루이즈의 뒤를 따라왔던 시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녀는 미라벨과 눈이 마주치자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흐윽, 미, 라벨 왕녀님!”
“소피…….”
미라벨은 오열하는 소피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슬피 우는 까닭을 아는 탓이었다.
소피의 동생인 사라는 미라벨과 함께 아르칸젤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수에게서 살아남지 못했다.
아르칸젤로로 향하던 길. 미라벨이 자신이 아끼던 백합 펜던트를 사라에게 선물해 주었을 때, 마수가 마차를 공격했다.
레나토에서 왕녀의 시신으로 모신 것은 미라벨이 아니라 사라였다.
미라벨은 죄책감을 느끼며 소피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소피.”
미라벨은 무거운 마음으로 소피에게 잘못을 구했다.
“사라를 지켜 주지 못해서, 사라와 함께 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미라벨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소피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미라벨을 껴안으며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왕녀님이라도 살아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한지 몰라요.”
소피의 충정 어린 말에 미라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라와 소피는 레옹틴 백작가의 영애로, 미라벨의 어릴 적 놀이 동무였다. 그래서 이들이 미라벨의 시녀가 된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라벨이 아르칸젤로로 가게 되었을 때 이들은 서로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레옹틴가의 영애를 모두 데려갈 수는 없기에, 동생인 사라만 미라벨을 따라갔다.
그랬는데.
결국 사라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거기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미라벨 왕녀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아래에 묻혔다.
미라벨은 차마 그것까지는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였다.
지금 미라벨 왕녀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레나토에 퍼져선 안 된다. 그리되면 최악의 경우, 비토레 대공과의 혼담이 다시 논의될 수도 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와의 모든 접점을 없애야 했다. 그래야 배 속의 아이를 무사히 낳아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괜찮을까?’
소피를 토닥여 주던 미라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구한 건 기적이다. 몸에도 자잘한 타박상 빼고는 큰 상처가 없었다. 아실이 마법으로 치료를 해 준 덕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는 무사할까.
미라벨은 소피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실을 바라보았다. 소피가 우는 모습에 숙연해져 있던 아실은 동생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미라벨,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네 몸의 상태에 대해선 알고 있어?”
아실의 질문에 루이즈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상태라니?”
“왕녀님, 어디 아프신 건가요?”
미라벨에게 안겨 있던 소피도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미라벨은 시선을 떨구고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임신했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되면 크게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이걸 비밀로 할 순 없었다. 혼자서 몰래 출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미라벨에게는 지금 가족의 도움이 간절했다.
그녀는 곧,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어. 아기는 안전해?”
“아기라뇨?”
“뭐? 너 임신했어?”
루이즈와 소피가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미라벨은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아실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실은 깊은 한숨을 쉬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는 안전해. 중간에 고비는 있었지만, 지금은 무사해.”
아실의 얘기에 루이즈와 소피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미라벨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행이네.”
“그게 다야? 말 좀 해 봐. 대체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애 아빠는 누구고?”
성격 급한 루이즈가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을 했다. 미라벨은 그녀의 질문에 쓰게 웃었다.
루이즈가 이런 질문을 할 거란 건 예상했다. 해서 그게 크게 곤란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세골린데고, 미라벨은 ‘아르밀라’가 아니라 고귀한 왕녀다.
레나토에서는 임신을 밝히면 대공의 손에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더는 아니다.
다만.
“기억나지 않아.”
아이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행방불명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임신을 했다는 건 기억하지만, 나머지는 몰라.”
“어떻게 그래?”
미라벨의 대답에 루이즈가 경악하며 물었다. 하지만 미라벨은 결심한 대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건 외부에 발표하지 말아 줘. 적어도 이 아이를 잘 낳아서 무사히 키우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고 싶어.”
“하지만, 국민들한테는 공표를 해야지. 다들 네 죽음에 얼마나 슬퍼했는데.”
“내가 임신한 채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르칸젤로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잖아. 부탁해, 루이즈 언니.”
“……알았어.”
사랑하는 동생의 요청에 루이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미라벨이 억지를 부렸다 해도 루이즈는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미라벨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루이즈는 여섯 살 터울의 동생에게 약했다.
그녀는 미라벨이 태어났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했다. 그건 아실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즈는 미라벨의 금발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게 어디야. 그거면 됐지. 걱정 마. 만약에 어머님이 뭐라고 하시면 내가 다 막아 줄게.”
“고마워.”
미라벨은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니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에 목말라 있던 아르밀라는 죽었다.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밤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라벨은 아르밀라의 기억을 차가운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레나토에 묻어 놓았다.
그녀는 그 기억을 절대로 다시 꺼내 보지 않을 셈이었다.
어차피 리카르도도 아르밀라를 곧 잊을 테니까.
아르밀라가 도망친 걸 알면, 그는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르밀라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을지 모른다.
미라벨은 그 씁쓸한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아르밀라일 때는 그에게 잊히는 게 두려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리카르도가 하루빨리 자신을 잊어 주었으면 했다.
미라벨은 새소리가 들려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초록으로 물든 환한 정원을 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겨울이 계속되는 레나토에 갇혀 있던 황폐한 삶은 끝났다.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