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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9화 (40/120)

39화

콰직.

푸른 검날이 억센 가죽을 꿰뚫었다. 정확히 급소를 노린 검이 자비 없이 마수의 심장을 도려내었다.

리카르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몇 마리째인지 모를 마수를 도륙 냈다.

‘이놈도 아니군.’

리카르도는 마지막 숨을 쉬는 마수를 발로 차고서 검을 뽑아내었다. 이어 검을 휙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고서 긴 다리를 움직였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서 피로 물든 검을 들고 선 그는 마치 사신 같았다.

리카르도의 등 뒤에는 마수의 사체가 즐비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찾아 눈을 빛냈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마수의 우두머리가 있을 것이다.

아르밀라로 배를 채운 고약한 마수가.

산짐승을 잡아먹는 보통의 마수와 달리, 우두머리는 사람을 잡아먹는다. 만약에 아르밀라가 우두머리에게 잡아먹혔다면, 그 마수의 배를 갈라 보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흔적을.

이소타 협곡의 하류에 도착한 리카르도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마수를 죽였다. 우두머리를 유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리카르도가 검에 묻은 붉은 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대가 흔들렸다.

리카르도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사람의 몇 배나 되어 보이는 거대한 개체. 마수의 우두머리가 리카르도의 앞에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리카르도는 무심히 말하며 검을 다잡았다. 그와 대치하듯이 선 마수가 잔뜩 성난 울음소리를 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달아나고도 남을 섬뜩한 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네놈이 아르밀라를 죽였나.”

리카르도는 차분한 얼굴로 검을 든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상체를 살짝 낮추고 발을 틀었다.

검을 세워 자세를 잡은 리카르도가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가기 전에 작게 중얼거렸다.

“하긴, 마수에게 물어 봤자 소용없나.”

자조적으로 말한 리카르도가 땅을 딛고서 내달렸다.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가 우두머리의 눈을 향해 검의 위치를 잡았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리카르도의 몸이 마수의 위로 내려앉았다.

쓸데없는 동작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리카르도의 검이 마수의 눈을 꿰뚫었다. 리카르도는 포효하며 몸부림치는 마수의 몸 위에서 버티며 깊숙이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을 빼낸 그는 마수의 눈동자, 눈과 눈 사이, 발목, 그리고 심장을 차례로 공격했다.

마수의 급소를 찌른 리카르도는 우두머리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검을 멈추지 않았다.

쿵!

이내 마수의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가차 없이 휘두르던 검을 아래로 떨궜다.

마수의 몸에서 뛰어내린 그가 붉게 물든 검을 응시할 때였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기사들을 이끌고 당도한 에치오가 황급히 외쳤다.

리카르도의 안전을 살피려던 에치오는 협곡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수십 구의 사체가 드넓은 협곡에 널브러져 있었다.

만약 마수가 인간이었다면 리카르도는 잔혹한 살인마였다. 그렇게 일컬어도 될 만큼 마수들을 죽인 방식이 잔인하였다.

게다가 개체 수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마수의 사체를 치우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릴 것 같았다.

에치오를 따라온 기사들은 마수들의 사체를 보고서 당황했다.

그들은 대공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건 일찍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서 전장에 나섰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의 대공은 실로 어두운 밤과 차가운 검의 지배자다웠다.

하지만 이건, 이런 건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혼자서 마수 무리를 싹쓸이하다니.

“주군……?”

깔끔하게 급소만 공격당한 마수의 사체를 살피던 에치오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도가 우두머리의 사체를…….

“주군!”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에치오의 부름에도 리카르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우두머리의 배를 갈라 내장을 헤집었다.

무서우리만치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피가 튀고, 검은 머리카락이 눈보라 속에서 찰랑였다. 죽은 마수를 해부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광기를 띠었다.

“찾아야 해.”

“주군,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다른 기사들도 놀라며 리카르도에게 달려들었다. 대공은 자신을 만류하는 기사들을 뿌리치고서 마수의 내장을 꺼내어 갈랐다.

기사들은 모두 경악했다.

지금껏 마수 사냥을 하면서 누구도 이런 짓을 했던 적은 없다.

마수의 내장을 파헤치다니.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찝찝하기만 한 일 아닌가.

“주군, 그만하십시오!”

“이거 놔라!”

보다 못한 에치오가 리카르도의 팔을 붙잡자, 그가 뿌리치며 외쳤다.

“찾아야 해!”

“대체 뭘 찾으시는 겁니까!”

“아르밀라…… 아르밀라가 살아 있다는 증거.”

리카르도의 대답에 에치오가 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수의 피로 얼룩진 주군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오싹했다. 리카르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에 없다면, 아르밀라는 죽지 않은 것이다. 마수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거야.”

핏발 선 눈에 물기가 어렸다. 리카르도는 기사들을 향해 망연히 말했다.

“내가 모든 마수를 죽였다. 그 덕에 우두머리를 유인해 냈지.”

리카르도의 시선이 천천히 우두머리의 사체로 향했다.

“이놈의 배 속에 흔적이 없다면, 아르밀라는 살아 있는 거야. 그런 거다.”

대공의 발언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은 리카르도가 우두머리를 완전히 도륙 내는 동안 조용히 침묵했다.

대공은 미쳐 있었다.

그의 광기는 대공비가 살아 돌아올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 * *

붉은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낙하하는 아르밀라의 뺨을 차가운 바람이 후려쳤다. 아르칸젤로 제국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바람마저도 그녀에게 매서웠다.

아르밀라는 공기의 저항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절벽이 높이 있다곤 생각했지만 낙하하는 끔찍한 이 느낌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르밀라는 정신을 잃었다. 혼절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리고 끝이 없는 것 같던 추락에 끝이 찾아왔다.

아르밀라의 몸이 높이 쌓인 눈 위로 풀썩 떨어졌다. 포근한 눈은 푹신한 쿠션 역할을 하며 그녀를 받아 주었지만, 경사진 언덕 탓에 몸이 데굴데굴 굴렀다.

아르밀라는 구르면서도 배를 감싼 손은 절대 풀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데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르던 아르밀라의 머리가 바위에 세게 부딪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밀라의 새하얀 이마에 붉은 피가 비쳤다. 가녀린 몸은 자잘한 상처투성이였다.

대지에 내려앉은 아르밀라의 몸이 고통에 경련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팔이 머리에 닿았다. 손이 이마를 스치자, 상처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에 닿았다.

그리고 그때.

팔찌에서 눈부신 빛이 퍼져 나왔다.

온기를 품은 것 같은 따스한 황금빛이 아르밀라를 부드럽게 에워쌌다.

빛은 가느다란 발목과 다리, 허리와 가슴까지 천천히 올라와 그녀를 감싸고서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빛은 루비처럼 새빨갛던 아르밀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였다.

이내 아르밀라는 찬란한 금발로 변했다.

원래 금발이었던 것처럼, 아르밀라의 모습에는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붉은 머리였을 때가 거짓이었지 않을까 싶게 자연스러웠다.

팔찌의 빛은 아르밀라를 금발로 돌려놓고서도 꺼지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밝은 빛은 마치 구조를 청하는 등불 같았다.

“흣…….”

빛에 에워싸인 아르밀라는 무의식중에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 포근한 것이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리카르도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비켜.’

차가운 남자의 음성을 떠올린 아르밀라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리카르도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다니. 말도 안 되는 착각이다.

리카르도는 따뜻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포근한 품을 내어 준 적도, 없다.

관계가 끝나기 무섭게 아르밀라를 밀쳐 내기만 했던 남자다.

그는 아르밀라가 아이를 배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은 남자였다.

끔찍하고 잔인한 남자.

곱게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아르밀라의 눈가에 맑은 물방울이 반짝였다. 눈물이 뺨을 가르고 흐르는 동안, 아르밀라의 정신이 다시금 아득해졌다.

아르밀라는 그렇게 다시 정신을 잃었다. 빛은 지치지도 않고 아르밀라를 감싸며 반짝였다.

“저게 뭐지?”

며칠 뒤.

국경의 숲을 찾아온 세골린데 왕가의 시녀들은 멀리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만 나는 스테렌 버섯을 따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밤이 어두워져 돌아가려는 찰나, 그들은 뜻밖의 기묘한 현상과 마주쳤다.

선명하지만 아련한 빛이 시녀들을 유혹하듯이 반짝였다.

“반딧불인가?”

“글쎄, 저쪽에 그런 건 없을 텐데.”

시녀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다가 희미하게 빛나는 빛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푸른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자 점점 빛이 선명해졌다.

빛에 이끌려 온 시녀들은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 경악했다.

“세상에……!”

그들이 상처투성이의 여인을 발견하자 빛을 발하던 팔찌가 덜그럭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녀들은 어느새 빛이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서 외쳤다.

“미라벨 왕녀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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