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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8화 (39/120)
  • 38화

    아르밀라가 도망친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리카르도와 기사들은 설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아르밀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녀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르밀라가 사라지자 리카르도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잠조차 자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지만,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 아르밀라가 정신을 잃었을 때도 그랬으니까.

    다들 대공의 변화에 두려워하면서도 조만간 괜찮아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대공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밀라의 행방이 계속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리카르도는 황폐해져 갔다.

    그렇게 이틀, 사흘, 일주일……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설산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으며 창가에 맺힌 물방울이 꽁꽁 어는 한파가 이어졌다.

    수도에는 봄이 왔다지만 레나토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사람이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추운 겨울.

    저택의 사람들은 다들 아르밀라가 얼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감히 대공의 앞에서 입 밖에 내지 못할 따름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대공의 음산한 음성에 나시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리카르도는 집사의 목에 검날을 갖다 대며 성마른 눈으로 말했다.

    “다시 지껄여 봐라.”

    파올로는 사색이 되어 굳었다.

    조금 전 하인에게 지시를 내리던 그는 ‘시체 하나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고 투덜댔다.

    가주가 저택을 비웠다고 생각하고서 입에 올린 얘기였다. 대공비가 사라진 이후로 리카르도가 산에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사실, 파올로에게는 짜증이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는 아르밀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비로서 적합하지 않은 여자가 검은 방을 떡하니 차지한 것이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여자 하나를 찾겠다고 비토레가의 모든 사용인이 총동원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택의 살림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정식 대공비를 찾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집사로서 불평을 조금 말했을 뿐인데.

    하필 그것을 가주가 들어 버렸다.

    파올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잘, 잘못했습니다, 가주님!”

    “잘못했다고만 말고. 다시 말해 봐.”

    파올로는 덜덜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 가주님…….”

    파올로는 변명거리를 찾아 진땀을 흘렸다. 그는 대공 옆의 보좌관에게 간절한 호소의 눈길을 보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시르가 깊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멀쩡히 살아 있는 내 아내를 두고 시체라고 지껄였다.”

    “하지만 파올로는 선대 때부터 비토레가를 모셔 온 집사입니다. 벌을 내리시더라도 이건 아닙니다. 제발 검을 거두십시오. 이런 건 전하답지 않으십니다.”

    “나답지 않다고?”

    리카르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그답지 않은 건, 훨씬 전부터였다.

    제가 싫다고 도망친 여자를 잡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어설픈 연극을 하겠다는 핑계로 그녀와 굳이 잠자리까지 가졌을 때부터.

    아니, 그녀에게 충동적으로 청혼을 했을 때부터.

    아르밀라의 일이라면 리카르도는 이성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였다. 심장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그에게 종용했다.

    어서 그녀를 찾아 다시 품 안에 가두라고. 그녀를 다시 가지라고.

    요즘 리카르도의 신경은 더없이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눈을 감으면 여지없이 붉은 방의 환영이 떠올랐다. 아르밀라의 시신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리카르도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불길한 상상을 떨쳐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집사가 아르밀라가 죽은 게 사실인 양 함부로 지껄였다. 리카르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답지 않은 건 자네야. 언제부터 보좌관이 내 결정에 주제넘게 끼어들었지? 다들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니 본보기가 있어야겠군.”

    리카르도는 낮게 뇌까리며 눈을 빛냈다. 집사의 목에 겨누어졌던 검날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목보다는 혀를 잘라 내는 게 나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파올로. 자네의 혀를 잘라 모두에게 보여 줄까?”

    “히익!”

    “주군!”

    리카르도가 손목을 꺾어 검을 완전히 틀려던 때였다. 에치오의 다급한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리카르도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검을 내렸다.

    “운이 좋군. 과연 선대부터 살아남은 자다워.”

    리카르도는 집사에게 비아냥대고서 에치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에치오는 아르밀라가 사라진 후로 일반 기사로서 눈산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는 기사단의 누구보다 열성을 다해 임했다. 새벽조와 오후조, 두 개로 나뉜 수색대 모두에 참여할 정도였다.

    에치오의 적극성에 놀란 나시르가 그렇게까지 해서 기사단장으로 복귀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치오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 멍청한 여자는 수녀원에도 못 갔어. 분명 산을 헤매고 있을 거야.’

    나시르는 에치오의 얘기에 그가 아르밀라에게 수녀원을 소개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수녀원에 당도하지 못했다는 참담한 사실도 함께.

    “주군! 허억, 여기 계셨군요!”

    에치오가 헐떡이며 리카르도에게 달려왔다. 리카르도는 어둑한 눈가를 쓸며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이, 이걸 보십시오!”

    에치오는 숨을 몰아쉬며 리카르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에치오의 손 위에 놓인 것을 본 리카르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곁에 있던 나시르와 파올로는 에치오가 내민 물건을 보며 기함하였다.

    에치오가 가져온 것은 붉은 피로 얼룩진 금빛 팔찌였다.

    아르밀라의 팔찌.

    리카르도는 고장 난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말없이 팔찌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의 팔찌는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팔찌가 빠졌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복도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시린 눈으로 팔찌를 바라보던 리카르도의 손에서 검이 떨구어졌다. 찰캉, 하고 검이 복도에 뒹구는 소리가 들렸으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

    적막을 가르고 메마른 음성이 새어 나왔다. 리카르도가 입술을 달싹이자, 에치오가 고개를 퍼뜩 들며 물었다.

    “네?”

    “어디서 찾았지?”

    “아, 그…… 협곡에서 찾았습니다.”

    “어느 협곡?”

    “그게…….”

    리카르도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던 에치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에치오의 손에서 팔찌를 거둬 가며 재차 물었다.

    “어느 협곡?”

    “이소타 협곡 하류에 있었습니다.”

    에치오의 대답에 나시르가 눈을 크게 떴다.

    이소타는 마수의 우두머리가 서식하는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주인을 잃은 팔찌가 발견되었다.

    이 팔찌의 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리카르도는 팔찌를 세게 쥐었다. 그것을 거머쥐면 아르밀라를 불러올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팔찌를 쥐고 있던 리카르도가 눈가를 움칠했다. 이어 커다란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고서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따라와라.”

    리카르도는 짧게 말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에치오는 주군의 검을 줍고서 그를 따라갔다.

    나시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돌리는 집사를 쓰디쓴 눈으로 바라보며 턱을 당겨 물었다.

    * * *

    “뭐라고요?”

    검은 늑대 기사단은 갑자기 내려진 명에 당황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대공비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마수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소타라고요?”

    교대조가 들어오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명령을 전달한 에치오를 향해 의심이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직 아르밀라 님을 못 찾았는데, 이소타라뇨? 지금 마수를 잡으러 가라는 겁니까?”

    “……아르밀라 님의 팔찌가 이소타 협곡에서 발견됐다.”

    에치오의 설명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질문을 던졌던 기사를 포함한 기사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 중 한 기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아르밀라 님은 마수한테…….”

    “시끄러워. 죽고 싶냐?”

    에치오는 기사의 입을 막으며 갑주를 챙겼다.

    에치오의 경고에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막았다. 아르밀라의 죽음을 입에 담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이는 레나토에 암묵적으로 퍼진 사실이었다.

    “젠장, 다들 일어나! 어서 가야 한다고!”

    에치오는 초조해하며 기사들을 채근했다.

    리카르도가 혼자서 이소타로 향했다.

    아직 새벽 교대조가 돌아오기 전이다. 오후조가 출발하려면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리카르도는 막무가내였다.

    대공이 홀로 마수가 득시글거리는 곳으로 갔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야 했다.

    “수다 떨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당혹스러운 소식에 얼어붙어 있던 기사단원들이 에치오의 재촉에 잽싸게 정비했다. 그들은 전쟁에 익숙한 자들답게 신속하게 갑주와 무기를 챙기고서 막사를 나섰다.

    에치오는 채비를 마친 기사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그리고 고삐를 잡아당기며 이소타로 향했다.

    부디, 주군이 이성을 잃지 않기만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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