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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7화 (38/120)

37화

“주군?”

검은 방을 지키고 있던 에치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오늘 아침에 황궁으로 떠났던 주군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여긴 어떻게…….”

“열어라.”

고저 없는 음색이 복도에 서늘히 퍼졌다. 눈바람을 몰고 온 것 같은 주군의 위압감에 에치오는 그만 굳어 버렸다.

원래도 대공에게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는 전장에서 적을 베어 버릴 때와 같은 살벌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누군가 죽여 버릴 것 같은.

리카르도의 앞에 선 에치오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켜라.”

리카르도는 동상처럼 굳어 선 에치오에게 냉랭히 말하고서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잡은 순간,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레나토 지역을 벗어나려던 때에 들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금 그를 휩쌌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레나토를 떠나 수도로 가는 길목의 숲에 있어야 했다.

수도를 에워싸고 있는 숲은 몸통부터 이파리까지 모두 붉은색을 띠는 엘다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게 물든 숲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리카르도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 붉은 방의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검은 그림자에 잡아먹힌 스산한 붉은 방과, 천장에 매달려 힘없이 흔들리는 여인의 몸.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모습이, 리카르도의 시야에 퍼졌다.

리카르도는 애써 그 장면을 무시하며 말을 달렸다. 붉은색을 볼 때마다 그를 괴롭히는 악몽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붉은 숲이 가까워질수록 목을 매고 고개를 떨군 여인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다른 이의 것으로 바뀌어 갔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아르밀라의 얼굴로.

빌어먹을 환영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급기야 리카르도는 그것을 더 무시하지 못하고 말 머리를 돌리게 되었다.

뒤에서 나시르가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확인만 하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아르밀라가 살아 있는지만, 확인하고.

“주군, 잠시만…….”

리카르도는 에치오를 무시하고서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텅 빈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랏빛 눈동자가 빠르게 방을 훑고서 침대로 향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침구를 본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드레스 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드레스 룸과 욕실까지 확인하고서 나온 리카르도는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그의 걸음은 붉은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군!”

“가주님!”

리카르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쫓아왔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복도를 가로질렀다.

쾅!

발로 문을 걷어찬 리카르도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살벌한 기운을 뿜는 눈으로 붉은 방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 데도, 없다.

“어딜 갔지?”

리카르도의 잇새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같은 음성이 비어져 나왔다. 목소리를 쥐어짜 낸 그가 눈을 돌려 에치오를 노려보았다.

“대답해라, 에치오.”

리카르도를 뒤따라온 에치오는 흠칫하였다. 그는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축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 여자가…… 협박을 했습니다. 보내 주지 않으면 목을 긋겠다고…….”

“……하.”

에치오의 변명을 듣던 리카르도가 피식 웃었다. 그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싸늘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 아하하하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고요한 붉은 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핏빛의 방에 우뚝 선 그가 눈을 빛내며 웃는 모습은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섬뜩했다.

“전하……!”

뒤늦게 저택에 당도한 나시르가 다급히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잘게 웃을 뿐, 나시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당장 사냥견을 풀어라. 그리고 기사들을 모두 산으로 보내라.”

한참을 웃던 리카르도가 웃음을 뚝 그치고서 입을 열었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명을 내리고서 에치오를 보았다.

“그리고 에치오, 너.”

“잘못했습니다, 주군!”

대공의 날카로운 눈길에 에치오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시르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리카르도가 그의 목을 벨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르밀라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지?”

“예?”

“여길 떠나기 전에, 뭐라고 말했느냐고 물었다.”

에치오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던 그의 얼굴이 더없이 차분했다. 너무도 차분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에치오는 아름다운 대공의 얼굴을 보다가 홀린 듯이 대답했다.

“제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고맙다, 라…….”

리카르도는 에치오의 말을 곱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금방 잡혀 올 텐데.”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어투였다. 리카르도는 에치오를 스쳐 지나가며 무심히 내뱉듯 말했다.

“에치오 고프레도는 기사단장직에서 파면하고 일반 기사로 강등한다. 귀 얇은 놈에게 검은 늑대 기사단을 맡길 순 없지.”

리카르도는 에치오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서 말을 이었다.

“다만, 대공비를 잡아 오면 기사단장으로 복직시켜 주겠다.”

리카르도는 말을 마치고서 저벅저벅 방을 걸어 나갔다. 그가 복도와 로비를 지나자, 파올로를 위시한 사용인들이 눈이 마주칠세라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저택의 모든 방에 불을 켜라. 대공비가 돌아올 때까지 비토레가는 잠들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리카르도는 파올로에게 명을 내리고서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고삐를 말아 쥐고서 눈이 내리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저 산을 올랐다. 마수를 토벌하느라 야영을 했던 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여인 하나를 찾는 것쯤이야 손쉬운 일이다.

그러니, 떨 것 없다.

가죽으로 된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컹컹, 하고 사납게 짖어 대는 사냥견들이 대공의 주위를 에워쌌다.

리카르도는 사냥견을 거느린 기사들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대공비를 찾아라. 누구든, 대공비를 찾는 자에게는 거대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예, 주군!”

기사들은 대공의 명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리카르도는 기사들을 거느리고서 산을 향해 말을 달렸다. 산으로 달려가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음산한 핏빛을 띠었다.

* * *

“하아, 하아……!”

아르밀라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큰 언덕 하나만 넘으면 세골린데의 국경으로 들어선다. 그러면 바로 수녀원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고지를 앞에 두고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잘게 흩날리던 눈발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굵어졌다.

무릎까지 올라온 눈을 헤치고 가던 아르밀라는 바위를 짚으며 헐떡였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깔리면 잠자고 있던 마수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만 했다.

아르밀라는 동굴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남쪽으로 걸어가던 그녀의 몸이 거센 바람에 휘청하며 뒤로 넘어졌다.

“아!”

고통을 삼키며 몸을 일으킨 아르밀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느꼈다.

고작 바람에 쓰러지다니.

여기까지 오는데도 몇 번을 구르고 넘어졌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아르밀라는 배를 감싼 손을 놓지 않았다.

‘난 갈 수 있어. 갈 거야.’

아르밀라는 의지를 빛내며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번은 지난번과는 다르다. 지낼 곳도 알아 놓았고, 리카르도가 쫓아올 때까지의 시간도 벌어 놓았다.

그러니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만 하면 된다.

이건 앞으로 아르밀라가 헤쳐 나가야 할 수많은 난관 중 하나에 불과했다.

혼자서 아이를 낳고서 키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르밀라는 그렇게 되뇌면서 발을 옮겼다. 눈에 젖은 드레스 자락이 축 처지며 다리를 휘감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아……!”

눈길을 헤치던 아르밀라가 이번에는 앞으로 엎어졌다. 나뭇가지에 걸린 드레스가 원인이었다.

고개를 돌려 치맛자락을 빼내려던 아르밀라의 눈동자가 순간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크르르…….”

아르밀라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리 하나가 성인 남자만큼이나 거대한 마수가, 아르밀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아르밀라는 마수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렸다. 망토의 모자가 벗겨지며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허억, 허억,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르밀라의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턱까지 숨이 찼다.

방금 보았던 개체는 평범한 마수가 아니었다. 지금껏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마수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하필이면!’

아르밀라는 울고 싶었다.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고,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하고 싶었다.

“아악!”

정신없이 달리던 아르밀라의 발이 주륵, 하고 얼음에 미끄러졌다. 꽁꽁 얼어붙은 작은 웅덩이가 아르밀라의 발목을 잡으며 그녀를 넘어뜨렸다.

무릎이 시리고 아팠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벌떡 일어나 달렸다. 마수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허겁지겁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던 그녀가 아연한 얼굴로 우뚝 멈춰 섰다.

더 갈 곳이 없다.

아르밀라의 앞에 벼랑이 놓여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가파르고 높은 절벽의 끝에 다다른 채였다.

걸음을 옮기자 발치에 있던 자갈이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자갈을 바라보던 아르밀라는 이를 악물었다. 절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다.

“크르르릉…….”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마수의 우두머리가 천천히 아르밀라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절벽을 등지고 마수를 바라보았다.

마수는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마수에게 잡히면 사지가 찢겨 죽으리라는 건 명백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아르밀라는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양손으로 배를 감싸고서 뒤로 천천히 걸었다.

‘신이시여.’

아르밀라는 절박하게 기도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발을 옮겼다.

먹잇감을 놓친 마수의 울음소리 속에서, 아르밀라의 몸이 절벽 아래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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