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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6화 (37/120)

36화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니.

리카르도에게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을 이제 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아르밀라가 말없이 버티자 리카르도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는 그녀에게 뭔가 더 말하려다가 몸을 들썩였다.

“크읏, 아르밀라!”

리카르도는 한계에 도달했는지 목울대에서 쥐어짠 음성으로 아르밀라를 부름과 동시에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리카르도가 한동안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의 얼굴은 금세 금욕적인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르밀라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돌린 채로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래서야 내가 널 잊지 못하게 되겠군.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들다니.”

리카르도는 열기가 가신 목소리로 담백하게 말했다.

리카르도는 언제 그녀를 원했느냐는 듯이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르밀라는 시린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관계가 끝나면 용건이 끝났다는 양 구는 건 질릴 정도로 봐 왔다.

오늘 그가 평소보다 정성 들여 어루만져 주었다고 해서, 달라졌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있다면, 아르밀라가 그를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오늘도 리카르도는 그녀를 자신의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했다. 아르밀라는 자신의 쓰임새에 자조하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선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제가 없잖아요.”

“글쎄.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지.”

리카르도는 무심히 대답하고서는 욕실로 향했다. 다른 여인을 취하면 그만이라는 얘기를 하고서도 전혀 죄책감이나 미안함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 그런 것을 느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아르밀라를 정부 취급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밀라는 그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와의 마지막 밤이 지독히도 괴로웠다. 영영 잊고 싶을 만큼.

* * *

히이잉!

새벽 어스름 속, 말이 투레질을 하는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창가에 선 아르밀라는 숄을 추스르며 검은 말을 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리카르도가 떠나고 있었다. 황궁행이 꽤 길어질 것인지, 토벌을 갈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덤덤하게 그가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오늘 그녀는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일어나서 준비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버텼다.

그에게서 지난번처럼 얌전히 인형처럼 있으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르밀라는 그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아내가 아니다.

‘애초에 아내가 아니었지.’

아르밀라는 정부로 추락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자신을 정부로 전락하게 만든 남자가 성 밖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리카르도를 사랑했던 마음은 한번 식기 시작하니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를 향한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아르미라 님, 일어나셨어요? 가주님 방금 떠나셨어요.”

리카르도의 말이 성문을 넘어갔을 무렵이었다. 가주를 배웅하고 온 루체가 찾아와 말했다.

아르밀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순진무구한 하녀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체를 응시하던 아르밀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아.”

“배웅 못 해서 어떡해요.”

루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문을 힐끗 보았다. 검은 방의 문 앞에는 무장한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르밀라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는 루체에게 자상하게 말했다.

“난 괜찮아. 다시 눈 좀 붙일 테니 루체도 가서 쉬어.”

“그렇지만…… 아르미라 님 슬퍼 보여. 아픈 거예요?”

“멀쩡해.”

아르밀라는 루체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루체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내었다. 그녀는 아르밀라를 계속 돌아보다가 검은 방을 나갔다.

아르밀라가 탈출했다가 잡혀 온 후로 루체는 부쩍 그녀를 걱정했다.

루체의 눈에 아르밀라는 보호해 줘야 할 연약한 존재로 비치는 듯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데다가 한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프면 종, 이렇게 이렇게 해요!”

루체는 문을 닫기 직전에 하인 호출 벨을 흔드는 시늉을 하며 당부했다. 아르밀라는 루체의 염려 가득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말했다.

‘미안해, 루체.’

나시르에게는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지만, 루체에게는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별의 뉘앙스를 풍기면 루체가 엉엉 울어 버릴까 봐서였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르밀라는 울적해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이곳을 떠나는 데 유일한 미련이 있다면, 루체였다.

아르밀라는 부디 루체가 잘 지냈으면 했다.

그나마 요즘은 비앙카가 예전처럼 요란하게 나서지 않는 것 같아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뭐 해?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상념에 잠긴 아르밀라의 귓전을 에치오의 목소리가 때렸다. 어느샌가 방에 들어온 그는 허리를 한 손으로 짚고서는 발로 러그를 툭툭 쳤다.

“여기 지키는 놈들한테 의원을 데려오라고 했어. 그놈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빨리 나가야 하니까 어서 움직여. 짐은 다 챙겼지?”

“잠시만요.”

아르밀라는 에치오의 재촉에 드레스 룸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가장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고서 밖으로 나온 그녀는 비장하게 말했다.

“어서 가요.”

“이대로 간다고?”

에치오는 아르밀라의 손을 확인하고서 눈살을 구겼다. 장갑을 낀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장난해? 여태 짐 안 챙기고 뭐 했어.”

“그런 거 없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여기서 지낸 게 몇 달인데 짐이 하나도 없다고? 지금이라도 얼른 챙겨.”

“정말로 짐이 없어요.”

에치오는 아르밀라의 대꾸에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애초에 이곳에 빈손으로 왔다는 것을 떠올린 듯했다.

“이쪽으로 와.”

아래층의 인기척을 살핀 에치오는 아르밀라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에치오는 아르밀라를 2층에서 1층으로, 그리고 1층에서 지하로 안내했다.

그는 몹시 재빨랐다.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기만 해도 아르밀라를 저지하고서 그녀를 숨겼다.

중간에 몇 번 사용인들과 마주쳤지만, 에치오는 괜한 트집을 잡으며 그들을 내쫓았다.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걸 다들 아는지 그러려니 하고 그를 피해 갔다.

아르밀라는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에치오에게 도움을 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하에서 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비밀 출입구를 열어 준 뒤에 말했다.

“여긴 전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로라 극비야. 넌 여기 다시 올 일 없으니까 알려 주는 거야. 다시 오면 내가 죽여 버릴 거다.”

“지금 여길 도망치는 사람한테 할 협박은 아니지 않나요?”

“그런가?”

에치오는 통로를 걸어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통로는 사람 한 명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비좁았다. 두더지가 파 놓은 것같이 조악했으나, 의외로 제법 기능을 잘 하는 듯했다.

에치오가 발치에 걸리는 돌을 이리저리 차며 걷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튼튼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에치오는 아르밀라를 흘긋 보며 머쓱한 듯 말했다.

“그런데 정말 도망쳐서 잘 살 수 있겠어?”

“제 걱정은 마세요.”

“누가 네 걱정을 한다고.”

통로를 걸어가던 에치오는 툴툴대며 아르밀라의 앞에 놓인 큰 자갈을 치워 주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잘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빛의 테두리가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로 나가면 돼.”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망토를 꼬옥 쥐었다. 에치오는 그녀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서는 말했다.

“저기서부터는 알아서 가라. 남쪽으로 직진하면 수녀원이 나올 거야. 에치오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알아서 챙겨 주실 거다.”

에치오는 성큼성큼 걸어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빛이 쏟아지며 눈보라가 통로 안으로 밀려들었다.

아르밀라는 바람에 뒤로 넘어가는 망토의 모자를 붙잡고서 에치오에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기사단장님이 검은 방을 지키세요. 나중에 전하께 들키면 제가 자해하면서 협박했다고 하세요. 그럼 어느 정도 책임을 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네 걱정이나 해.”

아르밀라는 퉁명스레 말하는 에치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에치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해요. ……에치오 님.”

아르밀라의 감사 인사를 듣는 에치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평소보다 한결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멀리 가라. 되도록 멀리 가서, 다신 돌아오지 마.”

아르밀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설산의 압도적인 풍경을 눈에 담은 그녀가 망토를 여미고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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