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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5화 (36/120)
  • 35화

    “저를 정부로 삼으려는 남자를요?”

    아르밀라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씁쓸해하며 말을 이었다.

    “좋아한다면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또다시 여길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아?”

    아르밀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길 떠나서 찾아보려 해요.”

    “그동안 별의별 인생을 다 봐 왔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꽤나 기구하네.”

    에치오는 팔짱을 끼고서 낮게 말했다. 아르밀라를 바라볼 때면 경멸만이 가득했던 시선에 동정의 빛이 연하게 서렸다.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건데?”

    에치오의 질문에 아르밀라는 비로소 일이 잘 풀려 간다는 예감을 얻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밤, 모든 이가 잠들어 있는 깊은 시각.

    아르밀라는 밤이 새벽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 옆은 무척 드물게도, 비어 있었다.

    리카르도가 황궁으로 떠나기 전까지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한시도 아르밀라에게서 감시의 눈을 떼지 않던 그였지만, 영주로서의 책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르밀라는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리카르도를 생각하다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꾸 떨려 오는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이 밤이 지나면 리카르도가 황궁으로 떠난다. 그리고 아르밀라는 에치오의 도움을 받아 레나토를 뜬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해야 해.’

    아르밀라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긴장한 탓에 심장이 마구 펄떡이고 있었다.

    리카르도를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망을 쳤다가 잡힌 이후로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무섭게 집착했다. 그는 그녀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게 했으며, 방문 앞에는 기사들을 세워 밤낮으로 지키게 했다.

    이 상황에 또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아르밀라는 낮에 에치오와 나눈 계획을 차근차근 곱씹었다.

    리카르도가 저택을 나서면, 방을 지키는 기사들은 에치오가 기사단장의 지위를 이용해 돌려보내기로 했다.

    에치오는 아르밀라가 저택에서 나가는 것까지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고 나면 아르밀라는 설산을 헤쳐 나가야 한다. 설산을 벗어나면, 세골린데와의 국경 지역에 있는 수녀원에 몸을 숨길 것이다.

    예전에 에치오가 잘 안다고 말했던 수녀원이 바로 그곳에 있다고 했다.

    아르밀라는 수녀원에서 한파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세골린데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가정 교사 일을 하면 생계는 꾸릴 수 있을 터.

    아마도 출산은 수녀원이나 세골린데에서 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이 되었든 아르밀라는 레나토의 검은 성의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아기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가 없는 안전한 곳에서.

    ‘괜찮을 거야, 아가야.’

    아르밀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기운이 났다.

    그동안은 약에 절어 지내다시피 해서 뭘 먹어도 힘이 나지 않았는데.

    이대로라면 설산을 넘는 것도 가뿐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쾅.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던 아르밀라의 마음은 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에 꺼져 버렸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리카르도의 긴 그림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르밀라의 위에 드리워졌다.

    “……아르밀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르밀라는 눈을 감았다. 리카르도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이어서 부스럭거리며 옷가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킷과 셔츠를 벗은 리카르도가 비틀거리며 아르밀라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지자, 독한 알코올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아르밀라는 무심코 인상을 쓸 뻔했던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틀었다. 그녀가 리카르도에게 등을 돌리고 눕자, 커다란 손이 가냘픈 어깨를 거머쥐었다.

    “내게 등을 보이지 마.”

    리카르도는 나직이 말하며 아르밀라의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자신의 팔과 다리 사이에 아르밀라를 가두었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리고, 내 곁에만 있어.”

    술에 취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리카르도가 돌연 기척을 죽였다. 아르밀라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리카르도를 밀쳐 내지 못하고서 참고 있는 이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리카르도가 말없이 한참을 있자, 아르밀라의 신경에 날이 섰다. 손끝이 저려 온 그녀가 눈을 슬며시 뜨려 할 때였다.

    “……!”

    리카르도의 입술이 아르밀라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그는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을 부드럽게 핥고서, 다물린 잇새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으려 했다.

    “싫…….”

    “역시 깨어 있었군.”

    집요한 접촉에 아르밀라가 저항하려 하자, 리카르도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는 아르밀라가 입고 있는 잠옷의 어깨끈을 천천히 내렸다.

    리카르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아르밀라가 입을 벌렸다.

    리카르도는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잇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혀가 아르밀라의 입 안을 마구 헤집었다. 독한 위스키 향을 머금은 리카르도의 숨결이 아르밀라를 숨 막히게 해 왔다.

    술에 취한 자와의 키스이니 불쾌할 법도 한데, 이 와중에도 전혀 메스껍지 않았다.

    평소에 리카르도에게서 풍겨 오던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향이 위스키의 향과 어우러져 아르밀라를 에워쌌다.

    “읏…….”

    아르밀라는 쾌락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시트를 거머쥐었다. 술을 마신 것은 리카르도인데, 그녀가 취해 가는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능숙하게 아르밀라의 약한 곳들을 공략했다.

    입천장의 여린 살을 살살 긁던 그가 강하게 혀를 빨았다. 갈망이 서린 거친 키스에 아르밀라의 허리가 저릿해져 왔다.

    “아……!”

    순간 찾아온 강렬한 쾌감에 아르밀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입 안을 누비던 혀를 빼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당분간 보기 어려울 거다. 황궁은…… 머니까.”

    리카르도는 말을 마치고서 그녀의 품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니 날 잊지 못하도록 해 주지.”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의 목덜미를 머금고 힘 있게 빨았다. 집요한 움직임에 아르밀라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동안 리카르도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지 않고 아르밀라를 안았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오늘처럼 그가 공들여 그녀의 몸을 달구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다.

    온몸이 저려 왔다. 자꾸만 열기가 피어오르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하아…….”

    아르밀라의 잇새에서 나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속절없이 리카르도의 의도대로 그에게 녹아들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아르밀라의 신음에 리카르도가 만족스러운 듯 속삭였다.

    그녀가 달아날 수 없게 단단히 붙잡은 그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만, 흣, 그만하세요!”

    아르밀라가 놀라 소리쳤다.

    끝까지 가는 건 위험하다.

    임신 초기이니 이런 관계는 조심해야만 한다. 평소 제 마음대로 아르밀라를 안는 리카르도이기에, 더욱 멀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대로 가다간 리카르도에게 부푼 배를 들킬 수 있다.

    아르밀라의 배는 모르는 이가 본다면 과식을 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조금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예민한 그라면 눈치챌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알아챈다면 이 아이는 죽게 될 것이다. 제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하지 마세요.”

    겁을 집어먹은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밀어 냈다. 그녀의 강한 거부에 리카르도가 몸을 일으키고서는 물었다.

    “왜.”

    “아직, 회복이 덜 되었어요…….”

    아르밀라의 변명에 리카르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초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치의는 괜찮다고 하던데.”

    “제 몸이잖아요. 제가 더 잘 알아요. 아직은 안 돼요.”

    “그런가.”

    리카르도는 의외로 담백하게 뒤로 물러났다. 아르밀라는 몰래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리카르도는 지난번에 별관 침실에서 아르밀라를 험하게 안은 일로 그녀의 몸에 상처가 났다는 걸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답지 않게.

    “날 봐.”

    안도하며 옷을 추스르려던 아르밀라는 자신의 위에 걸터앉은 리카르도를 보고서 흠칫 놀랐다.

    달빛에 상체를 드러낸 리카르도가 탈의하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놀란 마음에 시선을 돌렸다.

    “날 보라고 했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그는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길게 내쉬며 아르밀라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를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그의 시선에 아르밀라의 입 안이 말라 왔다.

    조금 전 리카르도가 어루만지려고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게 흥분이 밀려들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원할 때는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취했다. 그래서 그가 혼자서 욕망을 해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르밀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리카르도를 지켜보았다.

    점차 숨이 거칠어지고, 넓은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쇳소리가 섞인 거친 음성에 아르밀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리카르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르밀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후으, 날 사랑한다고, 해.”

    리카르도의 반듯한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그는 쾌락의 끝에 다다랐는지, 더는 참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아르밀라를 재촉했다.

    “어서.”

    아르밀라와 리카르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아르밀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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