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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4화 (35/120)
  • 34화

    아르밀라는 착실히 우고의 지시에 따랐다. 헛구역질이 나도 참고 음식을 먹고, 쓴 약도 거침없이 삼켰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회복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리카르도도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르밀라가 깨어나고서 그녀의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으려던 그가 황궁행을 결정한 것도 그래서인 듯했다.

    “더는 칙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아르밀라를 찾아온 나시르는 난처해하며 설명했다.

    그는 칙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리카르도를 무척 곤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려 주었다.

    “이 이상 버티다가는 반역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황실에는 레나토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있어서요.”

    “나시르 님도 함께 가시나요?”

    “예,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셔서 저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르밀라는 나시르의 대답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도망칠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차였다.

    제법 체력이 돌아왔으니, 리카르도가 황궁으로 향하면 바로 저택을 떠나면 될 성싶었다.

    ‘드디어.’

    아르밀라는 안도했다.

    리카르도는 지난 토벌에서 마수의 우두머리를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그가 조만간 다시 산으로 향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포식자의 눈으로 아르밀라를 감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르밀라는 점점 초조해졌다.

    납작했던 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회복을 핑계로 리카르도와 잠자리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리카르도도 수상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리카르도에게 넌지시 마수 토벌에 대해 물어봐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황궁에 간다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시르 님도 떠난다니 더 잘됐네.’

    저택에 감시하는 눈이 하나라도 더 준다니 다행이다. 아르밀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시르에게 말했다.

    “언제 출발하시나요?”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갈 겁니다. 실은 지난주에 떠났어야 했는데, 가주님께서 계속 미루셔서 이제야 가게 되었지요. 아르밀라 님께 상황을 잘 설명해 주라고 하시더군요.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시라고 전해 달라 하셨고요.”

    나시르는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곡식 창고에 문제만 안 생겼다면 직접 설명해 주러 오셨을 겁니다. 가주님께서는 아르밀라 님을 많이 아끼시니까요.”

    “네.”

    아르밀라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주군을 감싸는 게 뻔한 말에 딱히 감흥이 일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아끼지 않는다.

    아르밀라를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건 단순한 고집 때문이다.

    감히 대공의 뜻에 반해 그를 떠나려 했으니까. 그게 괘씸해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려 드는 것뿐.

    아르밀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많이 고마웠어요. 건강하세요.”

    나시르는 아르밀라의 인사에 고개를 갸웃했다. 묘한 여운이 남는 인사에 미간을 구긴 그가 아르밀라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였다.

    “나시르, 여태 여기 있었나?”

    갑자기 한 사내가 문을 벌컥 열고 등장했다. 대화를 나누던 나시르와 아르밀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꽂혔다. 졸지에 주목을 받은 에치오는 턱을 치켜들고서 퉁명스레 말했다.

    “아달베르토에 파견할 기사들을 뽑아 달라며. 내일 출발하기 전에 자네가 확인해야 기사를 보내든 말든 할 거 아냐.”

    “곧 가려던 참이었어.”

    나시르는 아르밀라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방을 나섰다.

    에치오는 나시르가 나가자 문을 닫고서 아르밀라를 보았다. 아르밀라는 나시르를 따라 나가지 않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같이 안 가시나요?”

    “누구 덕에 근신을 명받았거든. 제대로 못 지켰다고 주군께 한 소리를 들었지.”

    에치오는 불퉁하게 말하고서 얼굴을 와락 구겼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도망을 갈 거면 성공을 하든가. 이도 저도 아니게 굴긴. 근신 처분을 받은 보람이 없잖아.”

    “기사단장님은 제가 죽길 바라시는 게 아니었나요?”

    “네가 여기서 꺼지는 걸 바라는 거지.”

    에치오는 혀를 차고서 덧붙였다.

    “보아하니 곧 쫓겨날 것 같긴 하지만.”

    에치오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맡에 두고 앉으며 말했다.

    “독한 여자 같으니. 자기 목을 찔러?”

    에치오의 시선이 아르밀라의 목에 감긴 붕대로 향했다. 아르밀라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검을 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그걸 진짜로!”

    에치오는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짧은 머리를 벅벅 긁고서 갑갑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에치오는 아르밀라가 싫었다. 여우 같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하겠다고 주군을 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르밀라가 제 발로 저택에서 도망쳤다. 심지어는 리카르도에게 반항을 하다가 자해까지 했다.

    에치오는 그동안 자신이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아르밀라는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길거리의 그런 여자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에치오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어떻게 할 셈이야? 주군께서 백작 영애와 혼인하실 때까지 버티고 있게? 오래 버티면 돈 몇 푼 더 받을 수 있을까 봐 그래? 그도 아니면 설마, 진짜 정부로 자리 잡으려고?”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에치오의 질문에 아르밀라가 얼굴을 구겼다. 그가 하는 얘기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작 영애와 혼인이라뇨?”

    “주군께서 황궁에 갔다가 오시는 대로 아달베르토 백작의 딸과 혼인하실 거라는 얘기가 돌던데. 몰랐어? 하긴, 알 턱이 없나. 여기 갇혀 있으니.”

    아르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에치오의 뒷말을 흘려 넘기며 조용히 경악했다.

    ‘혼인을 한다고?’

    아르밀라는 초야에 리카르도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백작가와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 아르밀라를 이용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백작가와 혼담을 주고받는다니.

    리카르도가 백작 영애와 혼인하면 아르밀라는 정말로 정부가 되어 버린다. 그녀의 아이는 빼도 박도 못하게 사생아가 된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부정당하는 것도 모자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탈력감이 들었다. 갑자기 배가 욱신거렸다. 마치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읏…….”

    아르밀라는 시선을 떨구며 몸을 웅크렸다. 식은땀이 나고 숨이 가빠 왔다.

    “아, 하아, 흣……!”

    “이봐, 갑자기 왜 그래?”

    아르밀라는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치는 느낌에 헐떡이다가 에치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황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가녀린 손을 뻗었다.

    “도와주세요.”

    “알았어. 의원을 불러올게. 젠장, 나랑 있을 때 쓰러지지 말라고!”

    “가지 마세요.”

    아르밀라는 방을 나서려는 에치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그를 저지하고서 간절히 말했다.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전하의 눈을 피해 도망치게 해 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기사단장님은 내가 싫잖아요. 사라졌으면 하잖아요.”

    아르밀라의 요청에 에치오가 침묵으로 응했다. 그녀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레나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잡힐걸.”

    에치오는 무심히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한 그가 짧은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고는 말을 이었다.

    “주군은 한번 목표한 건 절대 놓치는 법이 없으셔. 지난번에 마수의 우두머리를 잡지 못한 거야, 너한테 넋이 나가 계셔서 그랬던 거고.”

    못마땅한 눈으로 아르밀라를 노려보던 에치오가 이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넌 무조건 잡힐 거야. 참나, 무일푼이 어딜 간다고. 가도 금방 배곯아 죽을걸.”

    에치오는 아르밀라의 가는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팔찌를 내다 팔면, 뭐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팔찌를 뺄 수가 없어요.”

    “안 빠진다고?”

    에치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아르밀라의 손목을 거머쥐고서 팔찌를 힘껏 위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팔찌에, 이내 성질을 부렸다.

    “젠장, 마법으로 봉해 놓은 거잖아?”

    툴툴대던 에치오는 크게 한숨을 쉬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냥 이쯤에서 주제 파악하고 정부로 살지 그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쉽게 말하네요. 제가 기사단장님의 동생이라 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여기서 내 동생 얘기가 왜 나와! 넌 내 가족도 아니잖아!”

    에치오는 버럭 화를 냈다. 조금 전까지는 차분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발끈한다.

    종잡을 수 없는 에치오의 태도에 아르밀라는 이마를 짚었다.

    누가 용병 출신 아니랄까 봐, 성격이 불같아서 설득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에치오의 도움이 필요하다.

    리카르도가 에치오에게 근신을 명했으니, 그는 황궁행에 동행하지 않는다. 거기다 기사단장이니만큼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에 빠삭할 터. 그만 한 적임자는 없다.

    아르밀라는 길게 한숨을 쉬고서 인내심 있게 말했다.

    “제가 기사단장님의 가족이었다면 절대로 권하지 않았을 선택지잖아요. 저도 누군가의 가족이에요. 이곳을 벗어나 제 가족에게로 가고 싶어요.”

    “흠…….”

    진심이 가득한 아르밀라의 부탁에 에치오가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주군은 어떡하고? 넌 주군을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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