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리카르도의 미소에 아르밀라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한때는 그가 웃는 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미소가 두렵기만 했다.
“드디어 깨어났군.”
깊게 울리는 묵직한 저음에 아르밀라의 몸이 흠칫했다. 리카르도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루만 더 늦게 깨어났다면, 의원의 목이 날아갔을 거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섬뜩한 말에 아르밀라의 마음이 선득해졌다.
잔인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했는지, 과거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을 정도로.
아르밀라는 루체에게 눈짓을 해서 나가 있으라는 신호를 주었다. 혹시라도 리카르도의 분노가 루체에게 튈까 두려웠다.
“아르미라 니임…….”
루체는 대공을 두려워하면서도 침대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르밀라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루체의 마음을 읽은 아르밀라는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난 괜찮아, 루체. 잠시만 나가 있어.”
“네에.”
아르밀라의 다독임에 루체가 마지못해 검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에도 리카르도는 서늘한 눈으로 아르밀라를 보았다.
장작이 타는 소리와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속에서, 아르밀라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리카르도는 이 방에 들어오고서 아르밀라에게서 눈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집요한 눈길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몸에 밴 굴종에, 그에게 매달려 잘못했다고 빌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말.
아르밀라는 이불을 쥐었던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리고 용기를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저는…….”
아르밀라가 운을 떼자 리카르도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르밀라는 매서운 시선 속에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곳을 나가고 싶어요.”
“그래서?”
리카르도는 태연히 대꾸했다. 아르밀라는 당황하며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이쯤에서 끝내. 재미없으니까.”
리카르도는 무심히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큰 체구의 사내가 침대에 앉자 매트가 출렁이며 아르밀라의 몸이 흔들렸다.
아르밀라는 중심을 잡기 위해 황급히 시트를 짚었다. 그사이, 그녀의 귀에 서늘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새 잊었나? 네 전부를 내게 주겠다고 했잖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르륵 손가락이 들어와 그녀를 움켜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처럼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넌 나의 것이다.”
“싫어!”
겁에 질린 아르밀라는 반사적으로 리카르도의 손을 내쳤다. 그녀의 반항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리카르도는 내쳐진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거두었다. 그러곤 아르밀라에게 기울였던 상체 역시 조용히 뒤로 물렸다. 집착이 서린 눈빛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난 네게 선택권을 줬다. 내 아내가 되겠다고 한 것도, 내게만 충실하겠다고 한 것도 너야.”
“거래였잖아요.”
“……뭐?”
리카르도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르밀라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원하는 걸 이뤄 드렸으니 이제 제가 원하는 걸 들어주세요.”
“넌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했어.”
“더는 아니에요.”
리카르도의 말에 아르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떠나고 싶어요. 떠나게 해 주세요.”
“안 돼.”
리카르도는 차갑게 잘라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르밀라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문을 벌컥 열자, 카타리나 부인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카르도는 의원을 향해 오싹하리만치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살펴라. 상태가 좋지 않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전하!”
당황한 아르밀라가 리카르도를 향해 외쳤다. 그녀의 간절한 청을 헛소리로 치부해 버린 리카르도가 몸을 틀어 시선을 돌렸다.
“거래는 네가 도망친 순간 끝났다. 내가 놓아주기 전까지 너는 내 아내야.”
리카르도는 선언하듯 말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아르밀라는 그의 넓은 등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깊은 절망에 빠뜨린 사람은 그대로 멀어져 갔다. 아르밀라의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 * *
의원은 아르밀라를 꼼꼼히 진찰했다. 아르밀라의 눈꺼풀을 까 보고, 그녀의 체온을 측정하던 그가 그녀의 손목에 둘렀던 진맥용 실을 풀고서 말했다.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독한 약을 썼으니 당분간 거동이 힘드실 겁니다. 보조제와 보양식을 꾸준히 드시면 곧 괜찮아질 테니 큰 걱정은 마십시오.”
의원은 진료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카타리나 부인에게 건넸다.
“이걸 주방장에게 전해 주십시오. 약을 먹는 동안에 환자가 피해야 할 식재료 목록입니다.”
“알겠습니다.”
종이를 받은 카타리나 부인의 시선이 아르밀라에게 스쳤다. 그녀는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아르밀라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아르밀라는 부인이 할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 것만 같았다.
분명, 부인은 아르밀라를 책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감히 가주의 뜻을 거슬러 행동하였으니.
그게 아니라면 또 동정이겠지.
씁쓸히 생각에 잠기던 아르밀라에게 의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 대공비 전하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우고 유스타키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고.”
아르밀라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했다. 우고는 하녀장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는지를 재차 확인하고서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그의 태도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나요?”
“알고 계셨습니까?”
“뭘 알고…….”
의뭉스러운 질문에 되물으려던 아르밀라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우고는 레나토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의원이다. 그가 그녀를 치료하면서 임신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우고는 지금, 아르밀라가 스스로의 상태를 알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질문에 숨은 뜻을 읽어 낸 그녀의 심장이 철렁였다. 아르밀라는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전하께 말씀하셨나요?”
“알고 계셨군요.”
아르밀라의 긴박한 질문에 우고가 고개를 가로젓고서 말했다.
“아직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어서요. 우선, 지금 품으신 아이가 전하의 씨가 맞습니까?”
“그렇다면요?”
“당장에 전하께 고해야지요. 레나토의 후계가 생겼으니, 경사가 아닙니까.”
“그럼, 그런 게 아니라면요?”
“그런!”
또 하나의 가능성을 가정하는 질문에 우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우고는 지난 일주일간 궁에 머무르며 아르밀라가 소문의 대공비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공이 혼인했다는 소문을 접했기에, 그는 일찍이 그녀가 대공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다만 아르밀라를 대하는 사용인들의 차가운 태도에 설마 했을 따름이다.
“대공비가 다른 이의 씨를 품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는 일입니다.”
우고는 공포에 떨며 말했다.
그는 대공비가 정신을 잃은 일주일 동안 대공이 그녀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공비를 향한 대공의 집착은 소문 그 이상이었다.
대공은 시도 때도 없이 대공비를 찾아왔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대공비가 깨어날 때까지 매일같이 우고를 닦달했다.
일주일째인 오늘까지 대공비가 깨어나지 않으면 우고는 대공의 손에 죽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독한 약을 써서 무리하게 깨운 것인데.
“전하께서 아시는 즉시 레나토에 피바람이 불 겁니다. 비전하도, 저도, 이 저택의 사람들 전부 다 죽을…….”
우고는 벌벌 떨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아르밀라는 침착했다. 우고의 반응을 살피며 그를 주의 깊게 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런 걸로 할게요.”
“예?”
“그러니 제가 임신한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밀라의 대답에 우고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세월의 주름이 잡힌 눈가를 문지르다가 입을 열었다.
“의원에게 거짓말은 안 됩니다.”
“살기 위해서라면요?”
아르밀라는 간곡히 우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배를 감싸 쥐고서 말했다.
“의원은 사람을 살리는 자잖아요.”
아르밀라는 간절함과 절박함을 담아 부탁했다.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그래야 저와 이 아이가 살 수 있어요. 부탁드려요. 우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요. 모른 척해 주세요. 제발…….”
의원에게 간청하던 아르밀라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흔들렸다.
여린 음성이 눈물로 젖어 가자, 우고가 난처한 얼굴로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제가 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하께서 알게 되시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 전에 해결될 거예요.”
아르밀라는 눈물을 닦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우고는 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삼켰다. 아는 만큼 위험해질 거라는 본능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의원의 침묵을 얻어 낸 아르밀라는 습윤한 눈동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비장한 시선이 산 너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