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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2화 (33/120)

32화

“의원! 의원을 불러라!”

쾅, 하고 거세게 문이 걷어차이는 소리와 함께 가주의 외침이 저택에 퍼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로비로 나온 사용인들은 주인의 모습에 다들 경악했다.

리카르도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아르밀라를 안고 서 있었다.

짐승에게 목을 물어뜯기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목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드레스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실로 오싹한 광경이었다.

다 죽어 가는 여인을 피범벅이 된 채로 끌어안고 서 있는 대공이라니.

“뭐 하나. 어서!”

“예, 예!”

리카르도의 외침에 멍하니 있던 사용인들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는 눈살을 찌푸리고서는 검은 방으로 향했다.

대공이 움직이자 하인들이 허겁지겁 따라와 방문을 열었다. 리카르도는 침실 안으로 들어와 아르밀라의 가녀린 몸을 커다란 침대에 눕혔다. 하녀들은 대공이 대공비를 눕히는 동안 벽난로에 장작을 때고 침구를 정돈했다.

순식간에 방에 훈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공은 하녀들을 채근했다.

“장작을 더 넣어라.”

리카르도는 쌕쌕 숨을 몰아쉬는 아르밀라의 손발을 주물렀다.

손이 너무 찼다. 손도, 그리고 발도.

‘젠장.’

리카르도는 목까지 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켰다. 못 본 사이에 야윈 아르밀라의 몰골에도, 핏기가 가신 그녀의 모습에도 전부 다 화가 났다.

음식을 주지 말라고까지는 하지 말 것을. 평소에도 새 모이만큼 먹는데.

하지만 그때는 화가 너무 났다. 그의 지붕 아래에서 잘 지내게 해 줬더니 다른 놈을 홀린다는 게 괘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 넣었습니다, 전하.”

“더 넣어. 장작이 부족하다면 더 가져와라.”

“예.”

하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벽난로가 활활 불타오르도록 장작을 계속해서 넣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공의 침실은 찜통처럼 변했다.

리카르도는 그사이에도 쉴 새 없이 아르밀라의 손과 발을 제 손으로 비비며 문질렀다. 그는 틈틈이 문을 돌아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의원은 왜 안 오는 거지?”

“전하! 의원이 왔습니다!”

리카르도의 조급함이 목소리를 키우려 할 때였다. 나시르가 다급히 외치며 문을 열었다. 그가 방 안의 후끈한 열기에 당황하는 사이 리카르도가 일어났다.

“어서 치료해라.”

의원은 대공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진료 가방을 열었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는 아르밀라의 몰골에 놀란 눈을 했다.

검은 침대에 붉은 머리카락을 해초처럼 풀어 헤치고 누워 있는 아르밀라는 죽은 자 같았다.

목에 칭칭 감긴 검은 천은 진득한 피로 절여져 있었고, 드레스는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죽음의 강에서 억지로 건져 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가쁜 숨이 아니었더라면, 시신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뭐 하나?”

뒤에서 들려오는 대공의 음성에 의원은 곧 정신을 차렸다. 하얀 목에 감긴 검은 천을 풀자 길고 깊게 파인 흉터가 드러났다.

“마력으로 지혈은 했다.”

리카르도는 의원의 뒤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

치료를 지켜보는 대공의 존재감에 의원이 손을 벌벌 떨었다. 그는 아르밀라의 상처를 살피고서 공손히 말했다.

“다행히 보이는 것만큼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급소는 피했기 때문에, 연고를 바르면 금방 아물 겁니다.”

“출혈이 심했는데.”

“전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출혈이 많다고 무조건 큰 상처는 아니라는…….”

“설명은 됐으니 마저 치료해.”

리카르도는 이마를 짚으며 의원을 재촉했다. 의원은 아르밀라의 목에 연고를 바르고 조심스럽게 깨끗한 붕대를 감았다.

진료를 하면서 그녀의 몸 상태를 체크하던 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켜고 치료를 지켜보던 리카르도가 불쑥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지?”

“맥이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그것이…….”

의원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아르밀라를 말없이 보았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한결 야윈 가냘픈 여인을 보던 그가 이내 침음했다.

그동안 비토레가에서는 일반적인 귀족 가문처럼 주치의를 두지 않았다. 선대 대공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서부터였다.

현 대공은 상처가 나도 방치하고, 아파도 의원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의원도 대공저에는 걸음하지 않았다.

그랬던 대공이, 이 여인을 위해서 벌써 여러 번 의원을 찾았다.

의원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대공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직감했다.

“뭐냐고 물었다. 문제가 있나?”

의원이 뜸을 들이자, 뒤에서 리카르도가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의원은 여인의 손목에서 재빠르게 손을 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제가 착각을 한 듯싶습니다.”

지금 짚은 맥이 맞는다면, 여인은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의원은 이 사실을 대공에게 바로 말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공에게 중요한 여인이 임신했다.

이는 레나토에 큰 파장을 가져올 일이었다.

그렇기에 의원은 대공에게 고하기 전에, 당사자인 여인에게 확인해야 했다.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그 이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된다. 그랬다간 목이 바로 날아갈 수 있으니까.

“전하께서 잘 지혈을 해 주신 덕에 쇼크가 오진 않았습니다. 치료를 했으니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려 보시지요.”

“언제 깨어나지?”

“그것은 말씀드리기가…….”

의원은 진땀을 흘렸다. 대공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지금이라도 침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의원으로서의 책무를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현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빨라야 보름…….”

“일주일.”

“예?”

단호한 선고 같은 말에 의원이 침을 삼켰다. 리카르도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일주일 안에 깨어나게 해라.”

“하, 하지만 이 상태에서 일주일 안에 깨어나시게 하는 건 무립니다. 너무 허약해져 있는 데다가, 맥도 약해서. 보름 안에도 힘들 것 같은…….”

“안 돼.”

리카르도는 의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하얀 얼굴의 여인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길어야 일주일이다. 내가 이 여자를 기다릴 시간은.”

“예…….”

서늘한 엄포에 의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자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보던 눈을 거뒀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전 넓은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이고, 무거운 음성이 침실에 퍼졌다.

“일주일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카르도는 침실을 나섰다. 아르밀라의 거친 숨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 * *

아르밀라는 누군가에게 쫓겼다. 도망을 가고, 또 도망갔다. 그러나 그녀를 쫓아오는 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왜 도망치는지도 모르면서, 마구 뛰었다.

결국 아르밀라는 무릎이 꺾여 넘어지고 말았다. 눈산을 나뒹구는 그녀의 위로 추적자의 그림자가 덮쳐 올 때, 눈이 번쩍 뜨였다.

“아르미라 님!”

아르밀라가 눈을 뜨자 루체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르밀라는 눈을 몇 번 천천히 깜박이고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와 루체의 눈이 마주쳤다.

“흐어엉, 아르미라 님!”

루체는 아르밀라의 손을 잡고서 그곳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아르밀라의 팔찌에 그녀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 사납구나, 루체.”

루체를 보던 아르밀라의 귀에 냉정하게 말하는 카타리나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은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에 수건을 적시며 말했다.

“어서 그치렴. 일주일 만에 겨우 깨어나셨는데, 너 때문에 아르밀라 님이 다시 정신을 잃으시겠다.”

“흐윽, 끅, 윽, 안 돼요, 그거는 안 돼…….”

아르밀라는 손을 들어 루체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통통한 뺨에 맺힌 방울진 눈물을 닦아 주자, 루체가 울컥하며 말했다.

“왜, 흑, 이제 일어나요. 너무 무서웠어요.”

“미안…….”

루체에게 대답해 주던 아르밀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목으로 무심코 손을 가져가니 꼼꼼히 매어진 붕대가 만져졌다.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카타리나 부인은 아르밀라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 주고서 일어났다. 루체는 훌쩍이면서도 아르밀라의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많이 다친 거 아니래요, 괜찮대요.”

“그래.”

아르밀라는 자신을 안심시켜 주려고 말하는 루체에게 대답하며 옅게 웃었다.

사실 방금 눈을 뜬 순간, 아르밀라는 좌절했다.

검은 방으로 돌아와 있다니.

발버둥을 쳤는데도 결국 붙잡혔다.

울고 싶었다.

리카르도는 분명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굴었으니까.

리카르도의 분노가 어떻게 쏟아질지 예상이 가질 않았다. 아르밀라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에 방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리카르도는 방에 없었다. 아르밀라의 시선을 따라서 방을 둘러보던 루체가 벌떡 일어났다.

“추워요? 불 더 세게 해 줄게요.”

아르밀라는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으려는 루체를 손짓으로 불렀다. 루체가 쪼르르 달려오자,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는…….”

“아, 전하께서는.”

“의외로군.”

루체의 명랑한 목소리와 리카르도의 깊고 굵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아르밀라가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선 리카르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찾아 줄 줄은 몰랐는데.”

리카르도는 고저 없는 어조로 말하며 아르밀라를 응시하였다. 삐딱한 자세로 문에 기대선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 순간, 리카르도가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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