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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1화 (32/120)
  • 31화

    아르밀라는 걸음을 멈추고서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도망쳐야만 해.’

    리카르도에게 잡힌다면, 아이를 무사히 낳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이를 낳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르밀라는 그렇게 둘 순 없었다.

    간절히 원했던 아이다. 기적으로 잉태된 생명이다. 이 아이를, 허무하게 빼앗길 순 없었다.

    아르밀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입에서 퍼져 나온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아르밀라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아르밀라.”

    아르밀라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지금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음성이 퍼졌다.

    아르밀라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몸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자신을 응시하는 집요한 시선에, 아르밀라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여기에 있었나.”

    심연처럼 깊은 시선으로 아르밀라를 보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아르밀라는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숨을 몰아쉬었다. 멀리서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득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리카르도를 외면해 고개를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 왔다.

    “드레스가 엉망이군.”

    리카르도는 평온한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아르밀라가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와 그녀가 저택에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공포가 엄습해 왔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면 덜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멋대로 성을 나가다니.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지?”

    리카르도의 커다란 손이 아르밀라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내 것이라고 했을 텐데. 그새 잊었나?”

    이런 건.

    비아냥과 조롱이 섞인 분노는, 견디기 힘들었다. 거침없는 추궁에 아르밀라의 심장이 난도질당한 듯 욱신거렸다. 아르밀라는 철없이 리카르도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아르밀라는 씁쓸함을 담아 말했다.

    나를 보내 달라고.

    그러나 늘 그렇듯,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애원을 묵살했다. 리카르도는 놓아 달라고 부탁하는 아르밀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그녀와 입을 맞췄다.

    “흐읏…….”

    배려라고는 없는 키스에 아르밀라의 몸이 반응했다. 아르밀라는 이 와중에도 리카르도를 원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리카르도의 뜨거운 혀, 그의 욕망에 굴복하려 드는 이 얄팍한 의지에 화가 났다.

    ‘더는 안 돼.’

    아르밀라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힘을 주고서 리카르도의 혀를 깨물었다.

    최초의 반항이었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리카르도는 입가에 맺힌 피를 닦으며 아르밀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기르던 개에게 물린 주인 같은 당혹감이 그의 눈에 스쳤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부탁이에요.”

    “제발, 저를 보내 주세요…….”

    아르밀라의 애원이 아스라이 퍼졌다. 그녀는 간절함을 가득 담아 빌었다. 애원이 통하지 않으니, 설득이라도 하려 했다.

    사실상 정부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며, 어차피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강조했다.

    스스로 그걸 입에 올려야 하는 게 더없이 비참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에도 리카르도는 끄떡없었다. 그는 아르밀라의 애원을 강아지의 재롱이라도 보는 양 굴었다.

    “반항은 이만하면 됐어. 돌아가자. 여기서 더 하면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으니까.”

    그의 대답에, 아르밀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다.

    어째서 당신은.

    내 얘기를 듣지 않는 걸까.

    나는 정말, 당신의 침대를 데우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에 불과한 건가.

    그래서 나와의 아이도 원하지 않은 걸까?

    이대로 리카르도에게 잡혀가면 아이는 지워야 한다. 그리고 아르밀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다시 그에게 안겨야 한다.

    대체 언제까지?

    자문하던 아르밀라가 쓰게 웃었다.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주군의 흥미가 떨어지면 그때 울지나 마.’

    당신이 내게 질리길 기다리며 살고 싶지 않아.

    언제 버림받을지, 그것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아.

    아르밀라는 보디스에 숨겨 왔던 에치오의 단검을 꺼냈다. 그녀가 단검으로 리카르도를 겨냥하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그가 피식 웃었다.

    “무서워 죽겠군.”

    아르밀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의 반항은 어린아이 장난 같을 테니까. 그래서.

    “아르밀라!”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젠장, 검 내려놔!”

    아르밀라는 검을 쥔 손을 바짝 목에 댔다. 그러자, 그녀의 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하얀 살결이 갈라지고 피가 나자 리카르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그러다 다친다고!”

    “다가오지 마.”

    이제야 당신은 나를 제대로 보는구나.

    아르밀라는 씁쓸함을 느끼며 리카르도를 쏘아보았다.

    “다가오면,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 거야.”

    “알았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리카르도는 두 손을 들어 항복한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제길, 내가 알았다고 했잖아. 그 빌어먹을 검 내려놔.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날 보내 줘.”

    “…….”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요청에 침묵으로 응했다. 그의 반응에, 아르밀라는 쓰게 웃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르밀라에게 아직 질리지 않았다. 이렇게 쫓아온 걸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오기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버리기도 전에 멋대로 제 손을 벗어나려는 장난감을 용서할 수 없다는 오기.

    어쨌거나, 리카르도는 제대로 된 대공비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아르밀라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거나, 아르밀라에게 질리거나. 그 둘 중 하나의 상황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제 손으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터.

    ‘하다못해 당신이 가식적으로 굴기라도 했다면.’

    아르밀라는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리카르도의 시선에 서글퍼졌다.

    차라리 거짓으로라도 사랑을 속삭여 주었다면.

    네가 진정한 대공비라고, 1년이 지나도 널 사랑할 거라고. 너와 아이를 낳고 싶다고. 거짓으로라도 말해 주었다면.

    진실을 외면하고 기꺼이 그에게 안겼을 텐데.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노력을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젠장, 아르밀라!”

    아르밀라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상처가 더욱 깊어지자, 리카르도가 성마른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검을 내려놔라.”

    아르밀라는 흐린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길게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만 내려놓으면, 도망치려 한 것도 다 용서해 주겠다. 네가 갖고 싶은 건 다 사 주겠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그런 건 필요 없어.”

    아르밀라는 체념하며 웃었다. 그녀는 손목을 틀어 검을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다.

    “잠깐…….”

    리카르도에게 잡혀가, 그의 손에 아이를 억지를 지우게 되느니. 또다시 모두에게 손가락질당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느니.

    여기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안 돼!”

    푸욱.

    푸른 검이 하얀 목을 깊이 찔렀다.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아르밀라는 비로소 자유가 된 해방감에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안 돼, 안 돼!”

    리카르도는 절규하며 아르밀라를 붙잡았다.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꾹 눌렀다.

    “젠장!”

    리카르도의 눈에 붉게 핏발이 섰다. 그녀의 몸이 급속도로 식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이 가팔라졌다. 리카르도의 심장이 펄떡이며 그의 온몸을 두드렸다. 믿을 수 없었다. 아르밀라의 생명이 그의 손을 빠져나가려 하다니.

    “절대로, 허락 못 해.”

    리카르도는 짓씹듯이 말했다. 그는 망토를 주욱 찢어 아르밀라의 목을 칭칭 감았다.

    “절대로, 내 허락 없이 죽을 순 없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잇새로 주문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보랏빛이 손 아래에서 퍼졌다. 리카르도는 집요하게 주문을 외웠다.

    아르밀라의 두통을 치료해 주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집중력을 발휘해 온 마력을 쏟아부었다.

    “읏…….”

    얼마나 지났을까. 아르밀라의 고운 미간이 찡그려지고 미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한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손을 거두자, 아르밀라가 숨을 헐떡였다.

    리카르도는 신중히 아르밀라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피가 멈췄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그는 아르밀라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눈길을 성큼성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날 벗어날 순 없어, 아르밀라.”

    절대 널 놓아주지 않을 거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안고 눈길을 나아가며 무시무시한 경고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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