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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30화 (31/120)
  • 30화

    아르밀라는 초조해하며 루체를 기다렸다.

    ‘빨리 와야 하는데.’

    이쪽 복도에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다 해도, 오도카니 서 있는 건 불안했다. 아르밀라는 복도의 장식용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나가서 어떻게 해야 하지?’

    루체를 기다리는 동안 아르밀라의 불안이 몸집을 키웠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도망을 결심했으나, 막상 나가려 하니 막막했다.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래서 리카르도에게 버림받는 걸 두려워했던 게 아닌가.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기에.

    하지만 이젠 그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 무엇이든 쥐어짜 내서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만 했다.

    아르밀라는 초조한 눈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훑었다. 그녀는 리카르도가 장만해 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공비의 것이라기에는 초라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곳곳에 들어간 레이스나 보석은 고가품이었다. 이걸 떼어 내서 팔면 제법 돈이 될 것 같았다.

    ‘그거라도 가져갈까?’

    옷차림을 살피던 아르밀라의 생각이 문득 에치오에게 받은 단검으로 뻗었다.

    기사단장이 넘긴 단검은 우아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무기의 값어치가 정확히 어떤지는 몰라도, 세공이 섬세한 만큼 값이 높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르밀라는 슬며시 기둥 밖으로 나와 붉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단검을 챙겨 보디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붉은 방은?”

    “지시하신 대로입니다.”

    문득, 아르밀라의 귀에 리카르도와 나시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르밀라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둥 뒤로 숨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며 슬금슬금 벽에 붙어 움직였다. 발소리가 커지는 만큼 커져 가는 공포에 울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발을 옮겼다.

    드디어 아르밀라의 손끝에 그녀가 애타게 찾던 문손잡이가 걸렸다. 아르밀라는 재빨리 문을 잡아당기고서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복도 중간에 있는 문은 하인 전용 출입구다. 아르밀라는 그 출입구의 문에 기대 숨을 가다듬었다.

    ‘침착해, 아르밀라. 할 수 있어.’

    아르밀라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 출입구에서 뻗어 있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사용인들이 죄다 가주를 반기러 나간 건지, 평소라면 시끌벅적할 통로가 고요했다.

    아르밀라는 신속히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의 모든 곳으로 통하는 계단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루체가 길을 자주 헤맨 탓에, 아르밀라가 그녀를 위해 하인 출입구의 약도를 그려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어렵지 않게 저택의 뒷문을 향해 갈 수 있었다.

    아르밀라는 뒷문을 열고서 나와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맡는 신선한 공기에 가슴을 크게 들썩이던 그녀가 양팔을 감쌌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아르밀라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게 아닌가 하는 강렬한 추위에 아르밀라는 이를 악물었다.

    얼어 죽더라도, 가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

    아르밀라는 사용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뒤로하고서 산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진짜 도망은 지금부터다.

    여기서 잡히면 도망을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잡혀선 안 돼.’

    아르밀라는 비장하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산을 향해 발을 옮겼다. 바람의 장막을 헤쳐 나가는 초록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리카르도는 붉은 방으로 직행했다. 그는 저택 앞에 도열한 사용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가주에게 무시당한 하인과 하녀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시를 해서가 아니다. 그를 에워싼 분위기가 더없이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혼인하고 나서 이토록 살얼음판 같은 때가 있었던가.

    그들은 부디 가주의 분노가 대공비에게만 쏟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여자의 쓸모란 그런 것이니까.

    “붉은 방은?”

    리카르도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나시르에게 물었다. 리카르도를 맞이하러 나왔던 그가 주군의 첫마디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지시하신 대로입니다.”

    나시르의 대답을 듣고서야 리카르도의 몸을 에워싸던 날카로운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그는 지금 더없이 초조했다.

    원래는 한 달 정도만 산에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마수의 우두머리를 좀처럼 잡기 어려워, 시간이 지체되었다.

    결국 리카르도는 두 달이 다 되도록 우두머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러려면 산 중턱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장비가 부족했다.

    그는 무모하게 전진하기보다는 다시 때를 보자는 판단을 내렸다.

    예전이었다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우두머리를 잡아 왔을 터다. 한번 검을 뽑으면 그 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하는 리카르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를 기사단 모두는 알고 있었다.

    저택에 오자마자 황급히 붉은 방을 향해 달려가는 주군을 보며 기사단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주군은 대공비에게 미쳐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대공 본인뿐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기사단은 이제야 그를 실감하였다.

    리카르도는 토벌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분노를 쏟아 내려는 것처럼 마수를 잔인하게 도륙 내기까지 했다.

    토벌할 때 이성을 잃다니, 늘 냉정한 대공답지 않았다.

    지난 토벌에서는 심지어 마수에게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그의 기초적인 실수에 기사단 모두는 술렁였다.

    하지만 문제는 대공이 실수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대공의 정신이 대공비에게 팔려 있다는 데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텅 빈 붉은 방을 보는 리카르도의 전신에서 삭막한 위압감이 퍼져 나왔다. 나시르는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입을 합 다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시르.”

    “……죄송합니다.”

    리카르도의 서늘한 눈이 번뜩였다. 그는 방 입구에 우뚝 버티고 서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누구지?”

    듣는 이의 오금이 저려 올 정도로 살벌한 음성이 복도에 퍼졌다.

    “누가 대공비에게 문을 열어 줬나.”

    나시르는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게 당혹스러웠으나,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리카르도의 반응이었다.

    아르밀라를 붉은 방에 방치하라고 명했기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는 아르밀라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무서울 만큼.

    “하하하.”

    리카르도는 나직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더없이 섬뜩했다.

    나시르는 분노하는 주군에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긴 침묵 속에서 방을 둘러보던 리카르도가 돌연 몸을 홱 틀었다.

    “파올로!”

    굵직한 대공의 음성이 저택의 로비에 쩌렁쩌렁 울렸다. 가주의 복귀를 맞이해 만찬을 지시하던 집사가 재빨리 달려 나왔다.

    “예, 가주님!”

    “대공비가 사라졌다. 말을 준비해라.”

    “……예?”

    “귀가 먹었나?”

    집사를 내려다보는 리카르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당장에 말을 대령하지 않으면 파올로의 목을 벨 기세였다.

    파올로는 허둥대며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늙은 집사가 뛰어가는 모양새를 보던 리카르도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분노를 삭이는 주인을 지켜보던 나시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오늘 낮까지만 해도…….”

    “책임은.”

    리카르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냉기가 묻어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공비를 찾고 나서. 그 다음에 묻겠다.”

    나시르는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말을 대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도는 뚜벅뚜벅 걸어가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안장에 자리 잡은 리카르도가 고삐를 잡으며 파올로에게 명했다.

    “사냥견을 풀어라.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거다.”

    “예? 그렇게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당장 풀겠습니다!”

    당황하던 파올로가 황급히 대답했다. 리카르도는 매섭게 그를 쏘아보다가 말 허리를 발로 찼다. 히이이잉, 하고 검은 말이 앞발을 구르며 길게 울었다. 리카르도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랴!”

    말이 투레질을 하고서 눈을 박찼다. 회색 하늘 아래, 대공이 탄 말이 무서운 기세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밀라는 절박하게 뛰었다. 사냥개가 짖는 소리,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리카르도가 추적을 시작했다.

    그 사실이, 그녀의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웠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윽……!”

    아르밀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에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을 삐었다. 그 통증이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어서 가야 해.’

    지금은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다. 리카르도에게서 벗어나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래야 아이를 지킬 수 있으니까.

    아르밀라의 한 손은 아까부터 배를 감싸고 있었다. 추위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비록 발목은 비틀어지고 손끝은 빨갛게 추위로 얼어 갈지라도, 배만은 따뜻하게 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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