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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9화 (30/120)
  • 29화

    “그게 언제인가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절망스러운 대답뿐이었다. 아르밀라는 문에 붙어 눈을 감았다. 그때, 열쇠가 짤랑거리고 루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돼요, 부인? 열쇠도 여기 있잖아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니.”

    부인이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열쇠를 루체가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부인은 루체를 달래다가 아르밀라를 향해 말했다.

    “의원을 불러 드릴 순 있습니다. 다른 곳은 어떠십니까. 달거리는 정상적으로 하고 계신가요?”

    부인의 질문에 아르밀라가 눈을 떴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아뇨. 한 적 없어요.”

    “안 하셨다고요? 그 안에 계신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부인은 말끝을 흐리다가 아르밀라에게 다시금 물었다.

    “아까 토할 것 같다고 하셨죠. 실제로 토하시진 않았나요?”

    “네. 토하지는…… 우욱!”

    부인에게 답하던 아르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가녀린 몸이 들썩이며 또다시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아르밀라가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서 호흡을 가다듬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부인이 말했다.

    “이상하군요. 제 딸아이가 임신했을 때와 같은 증상이에요. 하지만 아르밀라 님이 아이를 가지셨을 리는 없는데.”

    “맞아요, 그럴 리는 없죠.”

    아르밀라는 부인의 추론에 허탈해했다.

    임신이라니.

    이런 얘기가 오갔다는 것만으로도 리카르도가 식겁할 일이다.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단속하지 않았던가. 꾸준히 약을 챙겨 먹고, 언제나 마지막에는 아르밀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던가.

    ‘아냐, 딱 한 번…….’

    아르밀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떨리는 손길이 조심스레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리카르도는 별관의 침실에서 아르밀라를 안을 때는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그 직후에 필사적으로 흔적을 지워 내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만약 아이를 가졌다면, 그랬다면…….

    ‘죽일 거다.’

    리카르도의 경고가 아르밀라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 돼.’

    리카르도의 매서운 눈길을 떠올린 아르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임신의 가능성을 깨달은 순간, 기쁨과 공포가 동시에 아르밀라를 덮쳐 왔다.

    심장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뛰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임신을 한 걸까?’

    아르밀라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상태를 하나씩 되짚었다.

    두 달 동안 멎은 달거리, 희미한 음식 냄새에도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

    아가피아에 대해서 알아봤을 때, 임신에 대해서도 함께 공부했다. 그녀의 증상은 임신 초기 증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생긴 거구나.’

    그동안은 붉은 방의 음산함에 압도되어 자신의 상태를 냉정히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찬찬히 돌이켜 보니, 모든 증상이 임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는가 싶을 만큼.

    아르밀라는 납작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넋을 잃고서 자신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러 드리겠습니다. 아르밀라 님?”

    “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인은 침착한 어조로 다시금 말했다.

    “당장 의원을 불러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뇨!”

    “예?”

    “의원은, 안 불러 주셔도 돼요.”

    아르밀라는 서둘러 말했다.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으면 리카르도는 주저 없이 유산을 시킬 거다. 그의 협박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다.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형형히 빛나던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아르밀라는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 내어 말했다.

    “여기 오래 있느라 힘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알겠습니다.”

    부인은 잠시간의 공백을 두고서 대답했다. 갑자기 돌변한 아르밀라의 태도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녀는 루체에게 잔소리를 이었다.

    “파올로에겐 내가 말해 둘 테니, 내일부터 네가 검은 방을 청소하렴.”

    루체에게 명을 내린 부인이 열쇠가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지자 아르밀라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망쳐야 해.’

    아르밀라는 배를 감쌌던 한 손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을 수많은 생각이 뒤엎었다. 불안, 환희, 초조, 공포,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잔인함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죽일 거라면, 그녀는 그의 곁을 벗어나야만 했다.

    “루체, 아직 거기에 있어?”

    “예, 아르미라 님. 뭐 갖다 줄까요?”

    루체의 순진한 음성을 들은 아르밀라는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패닉에 빠질 순 없었다. 언제 리카르도가 복귀할지 모르니, 그가 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열쇠가 필요해.”

    “무슨 열쇠요?”

    “이 방의 열쇠.”

    “예에? 붉은 방 열쇠 말이에요?”

    루체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아르밀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루체. 나는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아니, 난 레나토를 떠나야 해.”

    “왜요? 아르미라 님 어디 가요?”

    아르밀라가 떠나겠다는 말을 하자 루체가 울먹이며 물었다. 아르밀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는 루체를 달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

    “쉬이, 루체. 울지 마. 착하지, 응?”

    “안 가면 안 돼요?”

    “나도 루체랑 같이 있고 싶어. 하지만,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날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살려면 도망쳐야 해. 도와줄 수 있지?”

    “아르미라 님은 죽으면 안 돼요!”

    루체는 깜짝 놀라며 문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문고리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르밀라는 녹슨 문고리가 흔들리자 깜짝 놀라며 바라보았다.

    “루체, 뭘 하는 거야?”

    “열어 줄게요. 기다려요!”

    “어떻게…….”

    아르밀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지는 밝은 빛에 눈을 찡그리는 아르밀라에게 루체가 덥석 달려와 안겼다.

    “죽으면, 안 돼요. 아르미라 님.”

    아르밀라는 눈을 찌푸리며 루체를 안아 주었다. 루체를 통해 붉은 방의 열쇠를 빼내 올 생각을 했지만,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루체가 이미 이곳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니.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루체가 여기 열쇠를 가지고 있어?”

    “파올로가, 집사 아저씨가 나한테 여기 청소하라고 했을 때요. 그때 줬어요. 나 이후로 여기 담당은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루체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열어 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흑, 그러면 쫓아낸다고 했는데. 가주님이 루체 혼낼 거라고 했는데. 그래도, 그래도. 아르미라 님이 죽는 게 더 싫어.”

    아르밀라는 루체를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하녀의 등을 토닥여 주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물어보면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해. 무조건 그렇게 우겨야 해. 알았지?”

    “으응…….”

    “고마워 루체. 절대로 못 잊을 거야.”

    “루체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루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난처해하며 루체를 보았다.

    “같이 가면 좋겠지. 하지만…… 너무 위험해. 루체는 저택에서 지내는 게 좋을 거야.”

    아르밀라는 씁쓸한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루체의 제안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루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아르밀라는 이제부터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 한다. 그 고생길에 루체를 동행시킬 순 없었다.

    “싫어요. 루체도 같이 가고 싶어요. 루체도 데려가요, 네?”

    같이 못 간다는 얘기에 루체가 아르밀라를 꽉 끌어안았다. 아르밀라는 보채기 시작하는 루체를 토닥이며 다정히 말했다.

    “미안해. 대신에 나중에 데리러 올게.”

    “……진짜?”

    “진짜.”

    “그럼 약속해요.”

    루체가 아르밀라를 슬며시 놓아주고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르밀라는 미소를 지으며 루체와 손가락을 걸었다. 루체는 입술을 모아 물고서는 눈을 쓱 닦았다.

    “아르미라 님…….”

    데엥—

    루체가 아르밀라에게 말을 더 하려는 때였다. 저택 본관을 관통하는 종소리가 널리 퍼졌다.

    검은 성의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리카르도의 복귀를 뜻하는 소리에, 아르밀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루체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마음이 요동쳤다. 루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들썩였다.

    “어, 어떡해요. 가주님 왔어!”

    “괜찮아, 루체.”

    아르밀라는 발을 동동거리는 루체부터 다독였다. 그리고 열린 붉은 방의 문을 닫았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붉은 방이 있는 2층 복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불길하단 이유로 사람들이 이쪽에는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전하께서 복귀하실 땐 다들 인사를 하러 저택 앞으로 나가잖아.”

    아르밀라는 드레스를 추슬렀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던 루체가 울상을 지었다.

    “지금 가려고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

    “하지만, 이대로 나가면 추운데.”

    루체는 두 손을 모으며 쩔쩔맸다. 아르밀라도 루체의 생각에는 동의했다.

    며칠째 폭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원의 나무가 꺾일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동사하기 십상이다.

    “기다려요. 망토 가져올게요.”

    아르밀라가 멈칫하자 루체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서 검은 방 방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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