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방을 둘러보던 아르밀라는 맥없이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침실에서 쓰러진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그나마 옷은 제대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안겨진 몸은 치료받지 못했다.
그 탓인지 처음 사흘간은 고열에 시달려 끙끙 앓았다.
똑똑.
“아르미라 님!”
숨죽이고서 웅크리고 있던 아르밀라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문에 바짝 붙어 긴박하게 말했다.
“루체? 루체야?”
“네. 이따가 먹을 거 가져올게요. 오늘은 안 아파요?”
다정한 속삭임에 아르밀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루체가 없었더라면 진작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깨어나고서 어찌나 놀랐는지.
처음 아르밀라는 여기가 레나토인지조차도 알지 못해서 벌벌 떨었다. 리카르도가 자길 버린 건가 싶어서 겁에 질렸었다.
너무 놀라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굳게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쥐구멍처럼 작게 부서진 문틈에 매달려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루체가 찾아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루체는 서투른 말솜씨로 아르밀라에게 정황을 알려 주었다.
그 덕에 아르밀라는 여기는 ‘붉은 방’이며, 리카르도가 그녀를 이곳에 가둬 두라고 명했고, 그는 산으로 마수를 잡으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리카르도는 무척이나 화가 나서 아르밀라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도 주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탓에 아르밀라는 루체가 몰래 쥐구멍으로 전해 주는 작은 빵과 물로 연명하게 되었다.
“고마워, 루체.”
아르밀라의 인사에 루체가 문 건너편에서 히힛,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밀라는 루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붉은 방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리는 아이다. 그런데도 아르밀라를 돕겠다는 일념으로 용감하게 움직여 주는 것이 고맙고 또 기특했다.
“이따가 또 올게요!”
루체는 키득거리다가 멀리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후다닥 사라졌다. 거친 남자의 발걸음에 아르밀라는 문에 바짝 기대 귀를 기울였다.
“꼴좋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었지? 꺼지라고.”
대뜸 들려온 건 불친절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아르밀라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에치오.
검은 늑대 기사단장은 아르밀라를 줄곧 못마땅해했다. 결혼 후에는 전처럼 대놓고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그녀를 죽일 것처럼 쏘아보곤 했다.
아르밀라는 루체가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릎을 모았다.
에치오는 지금 무척 고소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놀림거리를 제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아까 몸종이랑 속닥거리는 거 다 봤는데!”
아르밀라가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문밖에 선 에치오는 막무가내였다.
“빌어먹을, 너 때문에 주군께서 날 저택에 두고 떠나셨다고. 뭐 같은 년 때문에 내가 저택에 처박힌 신세가 됐다 이거야!”
쾅!
욕설을 내뱉던 에치오가 문을 세게 걷어찼다. 그 바람에 문에 기대고 있던 아르밀라가 앞으로 엎어졌다.
문 안쪽에서 털썩, 하고 사람이 주저앉는 소리가 나자 에치오가 피식 웃었다.
“살아는 있나 보네.”
챙강.
바닥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몸을 일으키려던 아르밀라는 반사적으로 쥐구멍을 바라보았다.
작은 구멍 너머로 단검이 보였다. 그때, 에치오가 그것을 차서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 같으면 지금 깔끔히 죽는 쪽을 택하겠어. 붉은 방 안에서 죽는 두 번째 대공비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아르밀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단검을 바라보았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감시하라고 에치오를 저택에 남겨 둔 걸 텐데. 그는 그녀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나를 왜 이렇게까지 싫어해요?”
“귀하신 분이 드디어 입을 여셨네.”
에치오는 서러움에 복받친 아르밀라의 질문을 비아냥으로 받아쳤다.
“네가 진짜 대공비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꼴도 보기 싫고, 너 때문에 요즘 주군께서 변하신 것도 짜증 나거든. 날 두고 토벌을 나가시다니, 이게 말이 돼?”
아르밀라는 에치오의 불평을 들으며 단검을 들었다. 검집에서 검신을 빼자, 날카롭게 벼려진 푸른 검날이 드러났다.
“대공이 정부한테 홀려서 대공비 자리에 앉혔다는 소문이 무성하다고. 덕분에 우리 기사단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됐어. 내 주군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젠장.”
“……고작 그것 때문에.”
아르밀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에치오의 이기적인 요구에 화가 났다. 기사단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끊으라는 요구를 하는 무신경함.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없는 당당함이라니.
“난 절대 안 죽을 거야.”
아르밀라는 검을 검집에 넣고서 말했다. 에치오는 코웃음을 치며 문을 다시 발로 찼다.
“맘대로 해, 난 분명 경고했다.”
주군의 흥미가 떨어지면 그때 울지나 마.
이죽거리며 덧붙이는 경고에도 아르밀라는 검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버텨 내리라는 다짐을 하며.
* * *
열이 다 내렸는데도 아르밀라의 몸은 한동안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환경 탓 같았다.
환경도 환경이거니와, 생활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아르밀라는 긴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려고만 하면,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리카르도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술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깊이 잘 수 없으니 깨어 있을 때도 몸이 나른했다.
사람이 수면에 이렇게나 좌우되는 동물이었나.
고작 잠을 못 잔 것으로 정신이 몽롱했다. 며칠 전부터는 머리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아르밀라의 컨디션은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니 당연했다.
아르밀라는 어깨를 주물렀다. 하루 종일 웅크리고 있는 탓에 삭신이 쑤셨다.
푹신한 침대에 눕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붉은 방의 침대에 누울 순 없었다. 먼지가 수북한 건 둘째 치고, 매트의 스프링이 푹 꺼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밀라 앞의 침대는 자리만 차지하는 흉물에 불과했다.
아르밀라는 흐린 눈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며칠째일까.
아니, 몇 주째인 걸까.
이제 웬만하면 리카르도가 돌아와 줬으면 했다. 돌아와서, 제발 이 방에서 꺼내 줬으면 싶었다.
리카르도를 그리워할 만큼 아르밀라의 상태는 나날이 안 좋아졌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증상이 더해지는 식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어제까지는 피로한 정도였는데 이젠 온몸이 너무 아팠다. 속까지 울렁거려서, 말도 하기 힘들었다. 삶에 대한 의지로 겨우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르미라 님, 많이 아파요? 수프 먹어요.”
“아냐, 루체. 괜찮…….”
루체에게 대답해 주려던 아르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헛구역질을 한 아르밀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수프 냄새에 섞인 방의 공기가 역하게 느껴졌다. 그 생각이 들고 나니, 붉은 방이 걷잡을 수 없이 불쾌했다.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오래된 페인트와 묵은 먼지 냄새가 아닌,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밀라의 자유는 리카르도에게 달려 있기에.
“아르미라 님? 아르미라 님! 왜 그래요!”
“하아, 루체…… 전하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신대?”
“그건 아무도 몰라요. 어떡해. 아르미라 님, 아파요?”
아르밀라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루체는 울먹이며 발을 동동거렸다.
“어떡해, 어떡해.”
“괜찮아, 루체…….”
아르밀라는 힘을 다해 태연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하지만 짧게 말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랫배까지 아팠다. 아르밀라는 배를 감싸며 숨을 느리게 쉬었다.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아르밀라는 식은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또다시 시야가 가물가물해져 오고 있었다.
“루체!”
아르밀라가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문밖에서 엄격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여기 와 있구나.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아르밀라는 카타리나 부인의 음성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쥐어짰다.
“부인!”
“어서 일어나렴, 루체. 파올로가 널 자르겠다고 벼르고 있어.”
카타리나 부인은 아르밀라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아르밀라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밀라는 헐떡이며 간절히 부인을 재차 불렀다.
“부인,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루체를 재촉하던 부인은 심상치 않은 음성에 말을 끊었다. 곧이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가주님의 명입니다. 이곳에서 근신하셔야 해요.”
“너무, 너무 아파요. 제발요…….”
“아프시다니, 어디가요?”
애절한 호소에 부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르밀라는 무너질 것 같은 몸을 문에 기대고서 힘없이 말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요. 제발 저를 여기서 꺼내 주세요.”
“…….”
“부인……?”
“죄송합니다, 아르밀라 님.”
아르밀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싶던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다시 평온한 어조로 돌아와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가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붉은 방에서 나오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