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리카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던 행동을 마저 이어 갈 뿐이었다.
“아악!”
아르밀라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외침은 이내 비명이 되었다. 리카르도는 귀를 때리는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의 흔적을 없애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전하, 대체 왜!”
“가만있어.”
리카르도에게서는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그의 행위에 아르밀라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
“흣!”
차츰 리카르도의 눈이 묘한 광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르밀라는 밀려오는 무력감과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전하! 전하, 제발!”
아르밀라가 다리를 바동거리고 외쳐도 리카르도는 멈추지 않았다. 이내 눈물로 뿌옇게 변한 시야 때문에 그녀는 흐릿하게 보이는 리카르도를 눈동자에 담았다.
“조용히 해. 저택 사용인들을 다 부르고 싶지 않으면.”
“흐윽!”
아르밀라는 좌절하며 흐느꼈다.
리카르도가 이렇게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 이전에도 여러 번 했던 행위였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번은 힘겨웠다.
아르밀라에게서는 절대 후계를 보지 않겠다는 리카르도의 결연한 의지가 그녀를 괴롭혔다.
절대로 너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그 의지가.
“이쯤이면 됐겠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탈진할 때가 되어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침대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아르밀라를 흘끗 보고서는 손을 털었다. 이어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옷매무새를 갈무리했다. 그러고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리카르도는 냉정하게 말하고서는 몸을 틀었다. 아르밀라는 자신을 침실에 남겨 두고서 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하.”
아침 숲을 채우는 새소리처럼 맑은 목소리가 침실에 퍼졌다. 아르밀라의 부름에 리카르도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뿐. 그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리카르도는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왜.”
“제가 싫으세요?”
“아니.”
“그럼…….”
아르밀라는 흘러내린 드레스를 끌어모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에 리카르도가 커다란 몸을 천천히 틀었다.
눈물 자국이 선연한 뺨에 리카르도의 시선이 닿았다. 동정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눈길이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지독한 절망감에 아르밀라의 가슴이 선득해졌다.
지겹게 여겼던 동정도, 그에게서는 받지 못한다.
당연하다. 리카르도가 내내 말하지 않았던가. 아르밀라는 그의 소유물일 뿐이라고.
아르밀라는 용기를 쥐어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지는 게 싫으신 건가요?”
“그게 왜 필요하지?”
“왜냐뇨?”
아르밀라는 황망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맺힌 속눈썹이 팔랑였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거래에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요.”
아르밀라의 항변에 리카르도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르밀라는 간절히 그를 바라보며 호소했다.
“저는 전하를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우리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대공비로서 비토레가의 후계를 전하께 안겨 드리고 싶어요.”
“내가 네게 너무 잘해 줬나 보군.”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노려보다가 차게 웃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리카르도의 싸늘한 말에 아르밀라가 숨을 들이켰다. 누가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아르밀라는 드레스를 모아 쥔 손에 힘을 주며 헐떡였다.
“제가, 부족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누구도 내 아이를 가질 순 없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비수 같은 말을 쏟아붓던 리카르도의 음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르밀라와 눈을 맞췄다.
“죽일 거다.”
서늘한 협박에 아르밀라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아르밀라는 비참함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하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다시 토벌을 나가야 한다. 너는 그동안 얌전히, 아니지.”
리카르도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는 아르밀라의 턱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 말을 어긴 것처럼 너는 또 다른 놈을 유혹하고 있겠지. 다음번에는 웃음이 아니라 침대를 데울지도 모르겠군.”
“전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글쎄. 어떨까.”
리카르도는 차갑게 웃었다. 그는 아르밀라를 바라보면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의 부정의 증거를 꾸역꾸역 낳는 게 여자야.”
“전 아니에요!”
“상관없어.”
리카르도는 단박에 잘라 말했다. 그는 그녀를 위에서부터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난 믿지 않는다.”
리카르도의 단호한 말에 아르밀라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르밀라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넓은 등을 보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맑은 물방울이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동안, 무거운 발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시르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동관의 정원사를 해고해라. 그리고 당분간 대공비를 붉은 방에 가둬. 내가 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도 못 만나게…….”
나시르에게 지시를 내리는 리카르도의 음성이 멀어졌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가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아르밀라는 아랫배를 감쌌다. 배 속이 욱신거렸다.
“흑, 아파…….”
아르밀라는 몸을 수그리고서 인상을 썼다. 리카르도와 대화하는 동안에는 꾹 눌러 참고 있던 통증이 한 번에 밀려왔다.
“윽…….”
아르밀라는 신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추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곳은 침실인데, 따뜻하게 데워진 곳인데 춥다니.
아르밀라는 콜록, 작게 기침을 하고서 몸을 움찔했다. 몸을 움직이자 리카르도와 몸을 겹쳐서 생기는 몸살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전신에 흘렀다.
아르밀라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서 테이블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시야에 하얀 백합이 어른거리다가 이지러졌다. 아르밀라는 짙은 후회에 젖어 눈을 감았다.
리카르도. 나의 주인, 나의 남편.
당신을 사랑하지 말 걸 그랬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의지하지 않았다면.
아니,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모든 것은 너무 늦었다. 아르밀라는 이미 리카르도를 만났고, 그에게 의지하였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 *
“대체 뭘 했길래 갇힌 거래? 차라리 내치시지. 어휴, 붉은 방이라니.”
“그러게. 거긴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쉿! 조용히 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 어서 가자.”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빠르게 작아졌다. 수다를 떨던 하녀들이 걸음을 재촉한 모양이었다.
넋을 놓고서 문에 기대앉아 있던 아르밀라가 눈을 떴다. 생기가 사라진 초록색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르밀라는 힘없이 무릎을 모았다.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이제 익숙했다. 원래부터 아르밀라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으니까. 그 내용이 질투, 시기에서 경멸과 동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르밀라는 퀭해진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그녀는 지금 소문으로만 듣던 ‘붉은 방’에 있었다.
붉은 방은 선대 대공비가 쓰던 방이다.
하지만 이 방은 더 이상 저택에서 ‘대공비의 방’이 아니었다.
루체가 말했듯이, 붉은 방은 레나토에서 귀신이 나오는 방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아르밀라도 붉은 방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을 떴을 때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레나토 저택의 다른 방처럼, 붉은 방도 이름에 걸맞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러나 꾸며져 있다고 하기에는 불길한 구석이 많았다.
우선은 벽부터가 그랬다. 액자가 붙어 있던 흔적이 네모나게 나 있는 벽지는 누군가가 긁어내려 했던 것처럼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벽지 위로는 붉은 페인트가 뿌려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핏자국같이 섬찟했다.
벽을 응시하던 아르밀라가 불현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시선이 쇠창살이 빼곡한 창문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에는 흡사 감옥처럼 날카로운 창살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어지러워…….’
덜컹거리는 창문과 그 앞의 찢어진 붉은 커튼을 보던 아르밀라가 눈을 찌푸렸다.
다른 방들은 그래도 포인트가 되는 색과 크림색이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는데, 여기는 온통 붉은색이라서 눈이 다 아팠다.
게다가 가구도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침대는 스프링이 나가 있고, 의자는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거울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사방에 붉은빛이 반사되어 더 정신이 없었다.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미치게 만들고 싶었다면 아주 적절한 장소를 고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