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남자에게 찰싹 붙어서 얘기하던 아르밀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가 비틀하자, 리카르도는 재빨리 다가가 붙잡았다.
“전하……?”
리카르도의 품에 안긴 아르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를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에 공포가 일렁였다. 그녀의 시선을 읽은 리카르도는 턱을 당겨 물었다.
“내가 반갑지 않은가?”
“아뇨, 그게 아니라.”
아르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웃음과는 사뭇 다른, 억지웃음이었다. 그 미소가 리카르도의 화에 부채질을 했다.
“따라와.”
“아……!”
“아르밀라 님!”
리카르도에게 붙잡힌 아르밀라의 몸이 바람을 맞는 꽃처럼 흔들리자, 놀란 피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피터의 음성에 리카르도가 몸을 천천히 틀었다. 아르밀라를 걱정하는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화가 났다.
겨우 이깟 놈이 아르밀라의 곁에 붙어 있어서.
리카르도조차 보지 못한 아르밀라의 미소를 독차지해서.
피터를 노려보던 리카르도의 손이 검을 찾았다. 그가 허리에 매고 있던 장검을 쥐자, 아르밀라가 다급히 외쳤다.
“전하!”
“왜.”
“피, 피터는 죄가 없어요. 화내지 마세요.”
“……이놈의 이름까지 알고 있나?”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서늘한 음성이 아르밀라에게 꽂혔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오면 대화를 나누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터에게 불똥이 튀게 둘 수는 없었다.
“정원사예요. 전하께서 신경 쓸 것 없는.”
“내가 신경 쓸 것 없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는 벌벌 떨고 있는 피터를 흘끗 보다가 아르밀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제 품에 가두고서 피터에게 경고했다.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라.”
“예, 예! 전하!”
피터는 명을 받자마자 바닥에 낮게 엎드렸다. 그가 시선을 땅에 박은 동안, 무거운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피터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동관 온실 옆의 작은 별관으로 끌고 왔다. 별관 창에서 바로 보이는 커다란 새장처럼 생긴 온실에는 왕녀의 장례식을 위해 공수해 온 백합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리카르도는 달리듯이 걸어가 아르밀라를 침대에 던지듯이 눕혔다.
“흣, 전하……!”
아르밀라가 시트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한 순간, 그녀의 입이 리카르도에게 잡아먹혔다. 리카르도는 얄팍한 등허리를 손으로 받치고서 뜨겁게 혀를 섞었다.
리카르도의 거친 행동에도 아르밀라는 그를 밀어 내지 못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두툼한 혀가 아르밀라의 입 안을 훑고, 그녀의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 한파를 닮은 차가운 남자인데도, 키스만은 뜨거웠다. 그의 열기에 아르밀라의 가슴 한편이 저려 왔다.
이토록 뜨겁게 그녀를 원하면서도 다정하게 굴지 않는 그의 냉정함이 서운해서. 그리고 그녀와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비정함이 야속해서.
“하아…….”
아르밀라의 입에 뜨거운 숨이 가득 차자 리카르도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시트를 짚고서 아르밀라를 천천히 뒤로 눕혔다.
그러면서 그녀의 치맛자락으로 손을 뻗었다. 아르밀라는 불안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오면…….”
“안 와.”
좀처럼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르밀라의 턱을 리카르도가 거머쥐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촛불의 빛을 받아 이채를 띠었다.
겁에 질린 아르밀라를 뚫어지게 보던 리카르도가 불현듯 눈을 반으로 접었다. 악마같이 매혹적인 미소였다.
“차라리 누가 오면 좋겠군. 네가 내 것이라는 걸 보여 주게.”
짙은 소유욕을 실은 혼잣말에 아르밀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는 조용히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설레지 마.
이런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이 사람은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이용해 소문을 내려는 것뿐이잖아.
대공이 대공비에게 푹 빠졌다는…….
“아!”
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밀라는 눈을 번쩍 떴다.
“집중해.”
리카르도는 진득한 시선으로 아르밀라를 보며 말했다. 머리 장식이 빠지고 치맛자락은 엉망으로 풀어 헤쳐진 그녀와 달리, 그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아르밀라는 정욕에 달아오른 눈동자로 몸을 겹쳐 오는 그를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정말로 나에게 푹 빠진 거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집중하라고 했지.”
“흐읏!”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며칠 안 했다고 그새 달라졌군.”
“아, 니에요.”
아르밀라는 가늘게 숨을 내쉬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저는 똑같…… 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아르밀라의 대답을 들은 리카르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거칠고, 자비 없이 아르밀라를 안았다.
아르밀라가 누운 침대의 시트가 뒤로 밀리고, 그녀의 눈앞에 불빛이 번쩍였다.
“다른 놈이 확인해 줬나? 내가 저택을 비운 사이에?”
“아, 아니, 아! 아!”
아르밀라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 품을 파고드는 리카르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리카르도가 크라바트를 푸는 것이 보였다. 그도 여유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길게 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결 고운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지만, 그때뿐이었다. 끝없이 자신을 탐하는 리카르도 때문에 또다시 흘러내렸다.
아르밀라는 가쁜 숨을 쉬며 리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밖에 모른다. 그가 다른 여자는 없다고 했으니까.
리카르도에게 여자는 아르밀라뿐이다.
그녀에게 그뿐이듯이.
그 사실을 생각한 순간, 아르밀라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향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입을 열었다.
“전하, 흣, 사랑해요.”
그녀의 고백에도 리카르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닿지 않는 고백을 연거푸 전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전하.
리카르도는 말없이 아르밀라를 안았다. 신음에 섞인 고백 사이로 거친 숨소리와 열기가 퍼졌다.
아르밀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죠. 당신은…….
“날 봐, 아르밀라.”
아르밀라가 눈을 감자 리카르도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입을 열었다.
“눈 똑바로 뜨고 날 봐. 네가 누구 것인지 봐!”
아르밀라가 눈을 뜨자 리카르도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거칠게 몰아붙여진 아르밀라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등이 하얗게 변하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그동안 리카르도와 관계를 맺으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묘한 느낌이 머리를 쳤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있는 아르밀라를 리카르도가 깊게 끌어안았다.
“큭!”
이성을 잃은 리카르도가 다시 한번 그녀의 품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르밀라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쾌락에 잠식되었다.
“읏!”
아르밀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는 엄청난 쾌락에 버거워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절대 못 놓아줘.”
아르밀라를 끌어안은 리카르도는 그녀가 자신을 밀어 내려 하자 낮게 뇌까렸다. 그는 그녀와 한 몸이라도 되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제 몸을 붙여 왔다.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집착에 사로잡힌 리카르도의 음성이 아르밀라의 귓가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한껏 끌어안았다. 아르밀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서 쾌락의 여운에 휩싸여 있었다.
“후으…….”
리카르도는 껴안고 있던 팔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리카르도와 떨어지자 아르밀라의 두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리카르도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한참 동안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상기한 그가 낭패 어린 얼굴로 말했다.
“젠장, 내가 무슨 짓을.”
“하아, 전하……?”
아르밀라는 아득한 정신을 겨우 끌어모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리카르도를 향해 말을 하려는 때, 그가 돌연 얇은 발목을 쥐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라도 해야 해.”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다란 손가락에 숨을 들이켰다.
이미 관계는 끝났는데 손을 뻗어 오다니. 리카르도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려는 걸까?
‘아니야.’
아르밀라는 불길함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다. 리카르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흥분에 젖어 있던 사람 같지 않게 심각한 얼굴이었다.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같이 창백한 낯빛으로,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읏.”
예고도 없이 다가온 손길에 아르밀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팠다. 리카르도가 평소에 부드럽게 그녀를 안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는데.
‘뭐지?’
이유 모를 오싹함이 아르밀라를 덮쳐 왔다. 아르밀라는 불안함을 애써 밀어 내며 리카르도를 불렀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