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리카르도는 문득, 아르밀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라는 리카르도밖에 없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며 매달리는 아르밀라.
절박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는 아르밀라.
그리고 끝내, 그를 바라보며 맑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답지 않군.’
리카르도는 생각을 황급히 지웠다. 아르밀라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게 당혹스러웠다.
굳이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심지어 전혀 엉뚱한 순간에조차 아르밀라가 생각났다.
에치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릴 때라든가, 텐트에서 몸을 뒤척일 때라든가.
사람이 우는 게 뭐 별일이라고 그게 마음에 박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물은 유약함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데.
‘저택에만 있더니 나태해졌나.’
리카르도는 오른팔에 길게 난 흉터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간 몸이 굳지 않도록 훈련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실전은 엄연히 다르다.
오늘 아침에 마수에게 빈틈을 허용해 버린 건 그래서였을 터.
그래,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르밀라나 저딴 교지 때문이 아니라.
리카르도는 매서운 눈으로 테이블 위의 교지를 보았다. 오늘 아침이 밝자마자 리카르도에게 날아온 황금색 종이에는 기가 막힌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현 대공비와의 결혼은 인정할 수 없으니, 내년 봄에 줄리아 아달베르토와 혼인하라는 황명이었다.
‘별 같잖은.’
리카르도는 피식 웃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몸이 단 두란테가 황제를 회유했겠지.
그는 황제가 리카르도를 세골린데의 왕녀와 맺어 주자 귀족 회의까지 열었다. 명목이야 제국의 위상이 떨어지는 혼담에 대한 반대였지만 그 속내야 훤했다.
두란테의 검은 속내를 모르는 건 황제뿐일 터.
제국의 지배자가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형태도 없는 가치에 눈이 멀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같잖은 미사여구로 리카르도를 구워삶으려는 ‘아버지’의 편지가 없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리카르도는 벽난로에 교지를 주저 없이 내던지고서는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등장한 자는 나시르였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미간을 좁혔다.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등 뒤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너 혼자 들어오지?”
“예?”
난데없는 질문에 나시르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곧 그가 손을 짝 하고 마주 치며 말했다.
“그분께서는 지금 동관 온실에 계실 겁니다.”
나시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리카르도는 유독 나시르가 아르밀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불쾌해했다.
그래서 나시르는 그녀의 이름 대신에 ‘그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가 대공비 전하라고 부르면 아르밀라가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다.
나시르의 대답에 리카르도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두꺼운 가죽 허리띠로 동여맨 탄탄한 허리를 손가락으로 톡, 톡 치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모르나?”
“종소리가 안 들렸을까요?”
리카르도의 진지한 태도에 덩달아 심각해진 나시르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가 저택을 잠시라도 비우면 안절부절못했다. 그건 레나토에 왔을 때부터 변함없었다.
아르밀라의 그런 행동은 결혼을 하고서 더욱 유별나졌다. 오늘같이 며칠간 저택을 떠났다가 돌아온 날에는 집무실 앞을 서성이다가 나시르와 함께 슬쩍 들어오곤 했는데.
“아마 유리온실로 가셨나 봅니다. 동관 유리온실은 워낙에 구석에 있어서 종소리가 거기까지 닿지 않…… 전하?”
아르밀라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던 나시르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벽난로를 응시하며 앉아 있던 리카르도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도는 급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초조함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그 덕에 나시르는 엉겁결에 집무실에 홀로 남았다. 그는 들고 왔던 서류도 내려놓지 못하고서 주군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 * *
비앙카는 집무실 문이 열리자 기둥 뒤로 숨었다. 이어서 주저 없이 올곧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비앙카는 떨리는 마음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하녀 유니폼의 옷깃을 내려 가슴이 더 드러나도록 한껏 내밀었다.
“전하!”
비앙카가 가슴을 모으려는 찰나, 검은 망토가 곁으로 휙 지나갔다. 비앙카는 허둥대며 멀어지려는 사람을 붙잡았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녀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았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동관을 향해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전하, 저 비앙카예요!”
비앙카는 재빨리 달려가며 외쳤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녀를 상관하지 않았다. 비앙카는 자신을 완벽히 무시하는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대공은 모든 여자를 본체만체한다. 하지만 비앙카에게만은 조금 달랐다. 자케트인으로서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곤 했지만, 비앙카는 믿지 않았다.
대공도 비앙카에게 마음이 있다. 다만, 비앙카가 난민이라서 곁에 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에게만 은밀히 아가피아즙을 부탁하지 않았는가. 아르밀라와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걸, 비앙카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어째서인지 피터가 저택에 들어온 뒤로 부쩍 비앙카를 찾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하!”
리카르도를 목 놓아 부르던 비앙카가 씩씩댔다. 대공은 지금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하는 수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구색을 맞춰 주는 수밖에.
“아르밀라 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비앙카의 입에서 아르밀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리카르도가 우뚝 섰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비앙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비앙카는 리카르도의 눈길을 받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그의 앞에 섰다.
“전하, 마수 토벌은 잘 다녀오셨나요? 이번 토벌에 눈이 많이 안 내려서 정말 다행이에요.”
“본론만 말해. 아르밀라에게 무슨 일이 있나?”
리카르도는 비앙카의 인사를 자르고서 냉랭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비앙카는 서운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 여자만 찾으시네요, 늘.”
비앙카의 부루퉁한 말에 리카르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가 느른하게 눈을 내리깔자 비앙카의 마음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요염하게 어깨를 틀면서 빙긋 웃었다.
“글쎄, 그 여자가 전하와 저만의 비밀에 대해서 캐내려 하지 않겠어요? 자기가 진짜 대공비라도 된 것처럼 굴길래, 제가 아가피아즙에 대해 알려 줬죠. 쿡, 어찌나 놀라던지.”
비앙카의 고백에 리카르도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그는 비앙카를 보며 조소했다.
“입이 가볍군.”
“뭐 어때요, 산에서 주워 온 여자 따위. 그런 여자는 버리시면 되잖아요. 그 여자와 달리 저는 제 분수를 알아요. 전하께서 번거로우실 일 없게, 꾸준히 약을 먹고 있답니다.”
비앙카는 말을 마치며 보디스를 쭉 내렸다. 그녀는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고서 리카르도를 향해 다가갔다.
“귀찮게 구는 여자 말고, 전하를 위해 준비된 사람을 안으세요.”
“하. 분수를 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는데.”
리카르도의 냉소가 비앙카에게 쏟아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잡아채고서 들어 올렸다.
“아악!”
리카르도에게 머리채가 잡힌 비앙카가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귀가 찢어지도록 날카로운 비명에 옆 복도에서 일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뛰어왔다.
“이게 무슨!”
“헉!”
“세상에나, 이게 뭐야!”
사용인들은 제가 목격한 흉측한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윗옷을 벗고서 가주에게 붙잡힌 비앙카가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꺄아악! 전하! 전하! 아파요!”
“시끄럽군.”
리카르도는 비앙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허겁지겁 머리를 감싸던 비앙카는 자신을 에워싼 그림자를 보고 희게 질렸다.
“꺅! 뭘 봐!”
비앙카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사용인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히죽였다. 평소에 대공의 정부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꼴이 참 우스웠다.
“킥, 육탄전이라도 벌였나?”
“아르밀라 님이랑 너는 달라, 비앙카. 네가 이런다고 가주님이 널 품어 주시겠어?”
“닥쳐!”
비앙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아냥에 표독스레 반박했다. 그녀는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가주를 찾았다.
그러나 비앙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앙카를 내던진 리카르도는 그대로 동관으로 직행했다. 더러운 꼴을 보았더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르밀라를 보고 싶었다. 세상의 때라곤 묻지 않은 말간 얼굴을 보면 마음이 좀 맑아질 것 같았다.
나시르의 말대로, 아르밀라는 동관의 유리온실에 있었다.
다만 리카르도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웬 사내놈과 딱 붙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리카르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급기야 아르밀라가 활짝 웃자 리카르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그녀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웃는다 해도 어딘지 처연한 기운만 감돌았다. 저렇게 즐겁다는 듯이 웃는 꼴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르밀라가 웃는 얼굴을 보는 리카르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리카르도가 없는 곳에서 웃는단 말인가.
마치 리카르도가 없어도 행복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