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르밀라는 긴 정적 끝에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가 봐.”
“다신 이런 일로 귀찮게 하지 마세요.”
콧방귀까지 뀐 비앙카는 아르밀라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고서는 몸을 홱 틀었다.
“조만간 버릇을 고쳐 놓겠습니다.”
비앙카의 버르장머리에 기막혀하던 부인이 아르밀라에게 말했다. 아르밀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의 버릇이 어떻건, 큰 관심도 없었다.
비앙카가 알려 준 사실이 가져온 충격에 비하면, 그 어느 것도 대단치 않았다.
아르밀라가 고개를 떨구자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루체에게 향했다.
“루체 너, 붉은 방 당번을 빼먹었다지? 대공비 전하의 몸종이어도 네가 맡은 구역은 해야지. 파올로가 화가 났어. 네가 매번 그곳만 안 맡으려고 든다고.”
“집사님이요?”
아르밀라의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루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아르밀라의 소매를 꼬옥 붙잡고서 간절히 말했다.
“저 거기 청소 안 하면 안 돼요? 거긴 너무 무서워요, 부인.”
“안 돼.”
“하지만…… 붉은 방에서는 귀신이 나온단 말이에요…….”
“루체!”
부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하던 루체에게 엄격히 외쳤다. 그녀는 저택을 가리켜 보이며 다시금 말했다.
“그런 헛소리에 휘둘리지 말랬지. 어서 들어가서 청소하렴!”
“히잉, 네에.”
루체는 입술을 쭈욱 내밀고서는 마지못해 아르밀라를 놓았다. 아르밀라는 루체가 터덜터덜 걸어가며 멀어지는 동안에도 아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르밀라가 생각해도, 리카르도가 그녀와의 아이를 원치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았다.
아르밀라는 비토레가의 후계를 낳기에는 부족한 여자다. 심지어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게다가 둘의 결혼은 길어야 1년이다.
그런데도, 아르밀라는 그와의 아이를 원했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간절해졌다.
리카르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 레나토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랑의 결실이 갖고 싶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르밀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부인을 말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정이 가득한 시선에 아르밀라는 울고 싶어졌다.
동정을 받는 삶은 이제 그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동정이라도 없으면 살 수 없다.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는 건 동정심 때문이었으니까.
* * *
레나토의 저택은 저택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와도 같았다.
하지만 마냥 삭막한 요새는 아니었다. 겨울이 유독 길고 지독한 탓에, 커다란 온실이 저택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정원사들은 레나토 출신으로 혹한기에도 꽃을 틔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약초학책을 쓴 식물학자보다도 더 박식했다.
“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아르밀라는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회색 머리의 청년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던 청년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고서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르밀라 님?”
“정원사 피터, 맞나요?”
아르밀라는 피터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요즘 비앙카에게 들은 풀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밀라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리카르도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아르밀라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손 놓고서 체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한없이 깊은 우울에 빠질 것 같았다.
아르밀라는 우선 나시르에게 약초학 서적을 빌려 밤새 읽어 보았다.
비앙카가 허세를 부린 것이길 바랐으나,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아가피아는 레나토에서도 나는 풀이다. 하지만 그 용도에 대해서는 자케트에서만 연구되었다.
그 사실에 침울해져 있는 아르밀라에게 카타리나 부인이 자케트 출신의 정원사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아르밀라는 품에 안은 책을 꽉 쥐며 피터에게 말했다.
“피터는 자케트에서 왔다고 들었는데요.”
“예, 예. 맞습니다!”
피터는 허겁지겁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비앙카와 비슷한 억양을 가진 피터의 대답에 아르밀라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피터가 아르밀라 님을 뵙습니다.”
피터는 흙이 묻은 손을 내밀다가 허둥댔다. 아르밀라는 우왕좌왕하는 그의 모습에 눈을 접어 웃었다.
“풋, 네. 반가워요, 피터.”
아르밀라의 미소에 바지에 손을 문지르던 피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르밀라를 먼발치에서만 봐 왔다. 우울하게 시선을 내리깔고서 있는 대공비에게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지금의 미소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활짝 웃으니 꽃이 만개한 것 같았다.
“피터?”
아르밀라는 피터의 넋이 나가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고서는 목청을 높였다.
“예!”
유리온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음성에 아르밀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반응에 피터의 목부터 얼굴까지 서서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말씀하십, 세요? 궁, 궁금한 거 있다고 하셨죠?”
“후후, 네.”
아르밀라는 횡설수설하는 피터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들고 온 책을 그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걸, 알고 있나 해서요.”
“자케트의 약초학책이네요!”
책을 본 피터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르밀라는 책장을 넘기는 피터를 보며 긴장했다. 그녀는 손을 모아 쥐며, 피터에게 할 질문을 정리했다.
피터는 비토레가의 정원사답게 박학다식했다. 그가 모르는 풀은 없는 것 같았다. 아가피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흙바닥에 뒹구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아가피아는 이렇게, 생긴 풀이에요. 즙을 내면 남성의 성…… 기능? 출산 기능? 그런 걸 저하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널찍한 이파리를 그리는 피터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익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밀라는 그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가피아의 약효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약효를 없앤다뇨?”
“아가피아즙을 먹고 있는 사람이 아이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르밀라의 질문에 피터가 순박해 보이는 눈을 끔벅였다. 그는 바닥을 나뭇가지로 툭툭 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즙을 그만 먹으면 되지 않나요? 효능은 일시적이라서 하루라도 건너뛰면 그만인데…….”
“하루도 안 빼먹고 먹는 경우도 있잖아요.”
“매일 아가피아를 마시면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요? 그런 사람이라면 아이가 싫은 거 아닌가요?”
아르밀라는 사리가 맞는 말에 난처해 입술을 축였다.
피터의 말대로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아가피아를 복용하지 않는다. 이걸 매일 챙겨 먹는다면 아이를 절대 갖고 싶지 않다는 거다.
‘전하의 뜻을 내가 존중해야 하는 걸까?’
아르밀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 리카르도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아르밀라 몰래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는 데에서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간절히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거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리카르도 몰래 알아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의 뜻에 반해 일을 꾸미는 건, 그가 아르밀라에게 한 짓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하와 얘기를 해 봐야겠어.’
아르밀라는 바닥을 꿇고 있던 무릎을 짚었다.
리카르도에게 밀쳐지며 다쳤던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다. 아르밀라는 피터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받아 바닥의 그림을 지웠다.
“아르밀라 님?”
아르밀라가 아가피아를 그린 그림을 지우자 피터가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피터 말이 맞아요. 제가 제대로 알아봐야 할 대상을 잘못 골랐던 것 같아요. 고마워요, 피터.”
말을 마친 아르밀라는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아르밀라가 휘청이며 중심을 잃자, 피터가 당황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와 아르밀라를 낚아챘다. 단단한 품에 안긴 아르밀라는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올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로부터 약 한 시간 전.
검은 말이 기사단을 이끌고서 검은 성으로 달려왔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고, 북관의 종이 길게 울렸다.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말에서 내린 리카르도는 에치오에게 기사단을 정비하라고 명한 뒤에 집무실로 향했다.
“피곤하군.”
리카르도는 검은 망토를 아무렇게나 던지고서 집무실의 기다란 소파에 기댔다.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은 그가 벽난로를 바라보며 길게 숨을 쉬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맞는 게 일상이었으나, 이번 토벌은 유난히 고되었다.
원인은 알고 있었다.
안락함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터.
리카르도는 결혼 후 안락한 침실에서 긴 밤을 보냈다. 보통 때라면 사흘에 한 번씩은 출정이나 토벌을 나갔을 텐데, 올겨울은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밀라와 최대한 몸을 겹쳐야 했으니까. 그녀의 교성이 되도록 많은 이들의 귀를 타고 흘러가야, 대공이 아내에게 흠뻑 빠졌다는 소문이 완성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