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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3화 (24/120)

23화

하지만, 그게 다였다. 대공 부처의 후계 문제는 하녀장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아르밀라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전 괜찮아요, 부인.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알겠습니다.”

부인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히자 아르밀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비참했다.

리카르도에게 내쳐졌을 때보다, 그에게 무시당했을 때보다도 더.

아르밀라는 눈물방울이 흘러나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리카르도와의 아이를 원했던 건 그녀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으니까.

그러나 리카르도는 아니었다. 그는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다.

아르밀라 몰래.

아르밀라는 눈을 뜨고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연고가 발라진 붉은 흉터를 보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리카르도에게 아르밀라는 아내가 아니다. 정략혼을 피할 도구이자, 쾌락을 위한 인형이다.

아르밀라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더 괴로운 건,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리카르도를 떠나지 않는 이상 그가 원하는 대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세상은 그가 전부였기 때문에.

“흑…….”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애처로운 흐느낌이 퍼져 나왔다. 넓은 침실에 홀로 앉아 우는 아르밀라를 달래 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검은 밤을 눈물로 보냈다.

* * *

리카르도가 마수 토벌을 위해 사냥을 떠나게 되었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 불쑥 떠났다가 불쑥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니까.

“잘 다녀오세요.”

아르밀라는 비참한 심경을 숨기고서 리카르도를 배웅했다. 그녀의 맑은 미소를 본 리카르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재중에 일이 생기면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리카르도는 나시르에게 명을 내리고서 안장을 올린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긴 다리로 가볍게 말에 올라탄 그를 보며,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삐를 틀어쥔 리카르도의 검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에 나부꼈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리카르도의 보라색 눈동자가 아르밀라에게 머물렀다.

“왜 그런 얼굴이지?”

“……네?”

아르밀라는 무심코 제 얼굴을 만졌다. 손에 닿는 피부가 유난히 거칠었다. 요즘 밤에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아르밀라는 눈을 내리깔고서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뇨, 그냥…….”

“그냥?”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럴 거다.”

리카르도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아르밀라의 인사를 흘려 넘겼다.

사실, 아르밀라는 이 며칠간 리카르도에게 몇 번이고 말하려 했다.

나도 이제 안다고.

그러니, 나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그러나 리카르도에게 목소리를 높이기에 아르밀라의 용기는 한없이 작았고,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기에 그는 너무도 바빴다.

그래서 기사단과 함께 말 머리를 돌리는 그의 뒤에서, 그녀는 초라하게 서 있어야만 했다.

“얌전히 있어.”

인형처럼, 가만히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듣고서.

“흥, 또 누구는 한동안 놀고먹겠네.”

리카르도가 떠나고, 그를 배웅하러 나왔던 사용인들이 제자리로 하나둘씩 돌아갔다.

아르밀라는 그들이 다 저택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루체와 함께 가만히 서 있었다.

추위에 몸이 떨려 올 때쯤, 들으란 듯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아르밀라를 공격했다.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있는 비앙카가 보였다.

비앙카는 코웃음을 치고서는 아르밀라 옆의 루체에게 말했다.

“너도 이 여자처럼 노닥거릴 셈이야? 따라와.”

“아르미라 님…….”

루체가 우물쭈물하며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에 처연함이 가득 찬 것이, 주인을 바라보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자비도 없이 루체의 팔을 낚아챘다.

“이 여자한테 붙어 있어 봤자 콩고물 떨어질 것도 없어. 고용 결정권도 뭣도 없는 껍데기뿐인 대공비라고.”

비앙카는 차갑게 웃었다. 아르밀라는 거기에 반박하지 못하고서 주먹을 쥐었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아르밀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노선을 정하지 못해 대부분 못 본 척하곤 했다.

하지만 비앙카만은 달랐다. 그녀는 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었다.

“대공비는 무슨. 알고 보면 천민 출신일 게 뻔한데.”

“기다려.”

아르밀라는 루체를 끌고 가려는 비앙카를 막아섰다. 그녀는 숨을 작게 들이쉬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루체는 내 몸종이야. 대공비의 몸종을 왜 네가 부려?”

“뭐가 어째?”

비앙카는 가당찮다는 듯이 웃고서는 아르밀라를 보았다.

“가주님이 대공비라고 해 주니까 진짜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넌 탕파 같은 거야. 가주님의 침대를 데우는 물주머니.”

노골적인 비유에 아르밀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필 리카르도의 속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얘기를 들어 더욱 당혹스러웠다.

아르밀라는 반박할 구석을 찾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리카르도에게 그녀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밀라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난 아냐. 난…….”

그렇지만, 이대로 비앙카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르밀라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 대공비야. 비토레 대공가의 핏줄을 이을.”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이다.

언젠가 들통날 초라한 거짓말이지만, 이것 말고는 그녀의 무기가 없었다.

“뭐?”

비앙카는 아르밀라의 반격에 잠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고서는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누가 뭘 해?”

아르밀라는 비앙카의 요란한 웃음에 크게 당황했다. 화를 내거나 비웃을 건 예상했지만, 이런 반응은 짐작 못 했다.

아르밀라가 황망한 표정을 짓자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비앙카가 숨을 크게 내쉬고서 말했다.

“꿈 깨. 넌 절대로 대공가의 후계자를 못 낳아.”

비앙카의 단호한 말에 아르밀라의 머리가 멍해졌다.

‘비앙카가 어떻게 그걸 알지?’

당황한 아르밀라의 시야에 카타리나 부인이 들어왔다. 집사와 얘기를 나누던 부인과 아르밀라의 눈이 마주쳤다.

아르밀라의 안색을 읽은 부인이 집사와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르밀라와 비앙카, 루체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가까워지는 사이에도 비앙카는 한껏 조롱을 담아 말을 이었다.

“씨가 없는데 어떻게 싹이 트고 꽃이 펴? 가주님이 얼마나 철저하신데. 내가 그분 약을 매일 준비한다고.”

“그게…… 무슨 얘기야?”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자세히 설명해 봐라. 나도 궁금하구나.”

“헉, 하녀장님!”

하녀장의 등장에 비앙카의 얼굴이 굳었다.

아르밀라는 부인의 등장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녀에게는 부인의 힘이 필요했다.

제국의 대공비가 한낱 하녀장의 권력을 빌린다니 누가 보면 웃을 일이다. 그러나 아르밀라에게는 그만큼의 권력조차도 간절했다. 그녀는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앙카가 전하께 매일 약을 드린다고 하네요. 부인은 알고 있나요?”

“약이라니요?”

카타리나 부인은 반문하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비앙카를 보았다.

카타리나 부인은 근엄한 어투로 비앙카를 추궁했다.

“이게 무슨 얘기지?”

“그건…….”

아르밀라가 대놓고 물어볼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비앙카가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

부인은 그녀가 변명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전하의 안위는 레나토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문제다.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전하께 약을 올렸다면 크게 경을 칠 일이야.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구나.”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전하께서 요청하신 일인데!”

비앙카는 억울해하며 외쳤다.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가피아라고, 자케트인만 아는 풀이에요. 즙을 내면 남성의 피임 효과가 있거든요. 그걸 달여 드리고 있어요.”

비앙카의 설명을 들은 아르밀라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했다니.

대체 리카르도는 어디까지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려는 걸까.

“민간요법에나 쓰는 걸, 의원도 아닌 네가 만들어 전하께 바쳤다고?”

“효과를 알면 무시 못 하실걸요.”

부인 앞에서 쩔쩔매던 비앙카가 돌연 아르밀라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아르밀라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결혼하시고서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저를 찾으셨거든요.”

약을 전달해 주기만 하는 거였을 텐데도, 비앙카는 은밀한 뉘앙스를 넣어 말했다. 아르밀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아르밀라는 턱을 당겨 물었다. 뻔한 수작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괴로웠다.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셨고, 저는 그 명에 따랐어요. 뭐 잘못됐나요?”

비앙카는 이제 완전히 기가 살아 목소리를 키웠다. 카타리나 부인은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아르밀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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