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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2화 (23/120)

22화

“경사라니, 무슨?”

“그건 폐하께 들어 보십시오.”

두란테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서는 등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발레리오는 혀를 차고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레리오는 두란테가 왜 그토록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콰앙!

“어떻게 그 녀석이! 다른 것도 아니고!”

발레리오는 노기가 등등한 황제의 고함에 얼굴을 굳혔다. 그는 손을 뒤로 모아 선 자세 그대로 황제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았다.

“길에서 주워 온 계집과 혼인을 해? 그것도 황실의 인가도 받지 않고?”

발레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침실로 들어오기 전, 시종장이 다급히 레나토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발레리오는 제가 접한 소식을 믿기 힘들었다. 리카르도가 사랑에 빠져 황실도 무시하고 혼인을 하다니. 그가 아는 리카르도는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사랑에 눈먼 리카르도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정부로 들인 것도 아니고 대공비라니! 어찌!”

하지만 놀란 것과는 별개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제를 보는 건 조금 즐거웠다. 또 한편으로는 늘 평온한 황제를 흥분케 만드는 리카르도가 부럽기도 했다.

“그러게요. 대공비를 많이 사랑하나 봅니다.”

발레리오는 태평한 낯으로 황제에게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보랏빛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외쳤다.

“이는 무효다!”

“이미 초야까지 치렀다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아니 돼!”

“어째서요? 대공의 혼인은 황실이 가타부타 말할 문제는 아닙니다.”

발레리오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진정하십시오, 폐하. 누가 보면 대공이 폐하의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그 입 다물라!”

“누가 듣는다고요.”

발레리오의 말대로였다. 드넓은 침실에는 그와 황제 단둘뿐이었다. 시종장조차 이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다.

“경망스럽기는. 네가 리카르도의 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제국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것을…….”

발레리오는 혀를 차는 황제의 한탄에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는 아버지를 노려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저 말고 대공이 황태자가 되었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자가 또 있는 것 같고요.

이렇게 덧붙이려던 발레리오는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자객에게 습격받았다고 해 보았자, 인덕과 신망이 부족하다는 얘기나 들을 게 뻔하다.

‘어쩌면 황태자위를 대공에게 넘기라고 하실지도 모르지.’

발레리오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 황제의 꼴이 우스웠다. 리카르도가 겨우 사랑 때문에, 그깟 사랑 때문에 혼인했다며 방방 뛰다니. 황제야말로 그 사랑 때문에 황후와 황태자를 배신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어떻게 사랑을 폄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의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좋은 핑계는 없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내년 봄에 두란테의 딸이 데뷔를 하는 대로, 리카르도와 혼인을 시키겠다.”

“이미 레나토에는 대공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계집은 정부로 두면 되지!”

쾅!

황제가 다시금 협탁을 내리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겨우 일어서서 걸어 다녔던 자 같지 않은 힘이었다.

‘이래서 두란테가 왔었군.’

그제야 발레리오는 상황이 파악되었다.

호시탐탐 제 탐욕을 채울 기회를 엿보던 늙은 구렁이가 또다시 황제에게 독을 주입했다.

수십 년 전, 선대 대공에게 음모를 속삭였던 그 혀로.

‘내가 가망이 없으니 리카르도에게 제 딸을 붙이려는 거로군.’

발레리오는 절대로 두란테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냉대 속에서 자라야 했던 데 그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까. 두란테도 그 사실을 알고 빠르게 노선을 정한 것일 터.

‘지긋지긋한 악귀 같으니.’

발레리오는 후원을 구경하며 싱글벙글 웃던 두란테를 떠올리다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모략을 꾸미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뭐, 굳이 내가 알 필욘 없지.’

발레리오는 얼굴을 펴고 곧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왔다.

리카르도를 위해 두란테와 맞설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리만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카르도는 두란테와 마찬가지로 유력한 용의자였다.

‘둘이 서로 부딪치다가 자멸하면 딱 좋겠군.’

언제 얼굴을 찡그렸냐는 듯, 다시 평온해진 발레리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았다.

* * *

핏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기대 있는 아르밀라는 예쁜 인형 같았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초록색 눈동자의 인형.

“아직 안 주무셨군요.”

문이 조용히 열리며, 중년 여인의 음성이 인형을 일깨웠다. 공허한 시선으로 눈보라가 흩날리는 검은 창밖을 응시하던 아르밀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부인이 여긴 웬일이세요?”

“루체가 하도 부탁을 해서요. 무릎을 다치셨다죠?”

아르밀라는 부인의 얘기에 상황을 파악했다. 카타리나 부인은 인정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훌륭한 관리자였다.

하녀들의 능력을 잘 파악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부인이 싫지 않았다.

“네, 들어오세요.”

부인은 작은 함을 들고서 침실로 들어왔다. 구급약품이 들어 있는 상자인 듯했다. 부인은 침대 옆의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의원은 됐다고 하셨다고, 저라도 가서 돌봐 달라고 루체가 칭얼대더군요.”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며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상자를 열고서는 아르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네, 감사해요.”

아르밀라는 부인의 눈짓에 이불을 걷었다. 살며시 잠옷을 들추자 바닥에 쓸려 까진 무릎이 나타났다. 새하얀 피부에 난 붉은 흉터가 도드라졌다.

부인은 상처를 보고서 미간을 살짝 좁혔다. 괜히 눈치가 보인 아르밀라는 치마를 올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전하를 모시다가 실수를 했어요. 제때 물러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넘어진 거예요.”

“물러나다니요?”

연고를 꺼내 솜에 바르던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아르밀라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전하를 모실 때 말이에요.”

“네?”

부인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르밀라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침묵 속에서 침실의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아르밀라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서 더듬더듬 말했다.

“마지막에 제가 전하를, 전하에게서 빨리 몸을 떨어트려야 하잖아요?”

“마지막에 말입니까?”

부인의 얼굴이 더 묘하게 변했다. 별 희한한 얘기를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르밀라는 그녀의 반응에 눈을 좌우로 굴렸다.

잘못 말한 걸까. 쓸데없는 얘기를 꺼낸 게 아닌지 후회되었다.

“저는 가주님께서 초야를 안 치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치르셨죠.”

한참 동안 말없이 아르밀라를 지켜보던 부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뭐라도 좀 알려 드릴걸,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제 딸아이를 시집보낼 때처럼요.”

아르밀라를 주시하던 부인의 눈에 온기가 돌았다.

“괜찮으니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아르밀라 님. 전하와 관계를 가질 때, 어떻게 하시는지.”

부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스쳐 지나가다시피 한 미소였지만, 아르밀라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숨을 들이켰다.

“전하께서는 늘 막판에 저를 밀어 내셨어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요…….”

“무슨 그런 소리를. 그런 게 아닙니다, 아르밀라 님.”

부인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아르밀라의 얘기를 잘랐다. 그녀는 갑갑함을 어쩌지 못하고서 말했다.

“아이를 낳는 데는 씨가 필요합니다. 남자의 씨가 여자의 안에 심어져야만 하지요.”

“네?”

“그러니 마지막에 전하께서 그러신 건, 아마도…….”

부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아르밀라는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서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아이를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초록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차가운 리카르도의 미소, 여체를 탐하던 거친 손길을 떠올리던 아르밀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카르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니까. 그가 그녀를 원하니까.

그러니, 언젠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아르밀라가 리카르도를 닮은 아이를 가지면.

그녀가 대공가를 이어 갈 후계자를 낳으면, 리카르도도 이혼하자는 말은 꺼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어쩌면 좋죠……?”

아르밀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묻자,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부인은 말없이 아르밀라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서는 약상자를 닫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다시 사무적인 어조로 돌아온 부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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