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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1화 (22/120)

21화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옷을 벗었다. 옷이 차례로 욕실 바닥에 떨어지자, 그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욕조로 몸을 틀었다.

보기 좋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그 아래의 두꺼운 허벅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직였다.

“이리 와.”

멍하니 리카르도를 바라보던 아르밀라의 귀에 낮은 음성이 퍼졌다. 어느새 욕조에 앉은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욕조까지 걸어가던 그녀가 주춤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리께에 걸쳐져 있는 치맛자락을 밟은 탓이었다.

몸을 웅크린 아르밀라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리카르도를 유혹하기는커녕, 엉거주춤하게 걷다가 넘어질 뻔하기나 하다니. 얼마나 우스울까.

‘창피해.’

아르밀라는 수치심에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가 뜸을 들이는 사이, 촤악, 하고 물소리가 났다.

그리고 젖은 발이 욕실 타일을 밟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아르밀라에게로 리카르도가 다가왔다.

단단한 손이 말없이 아르밀라의 팔뚝을 잡고서 그녀를 일으켰다. 리카르도는 거침없이 아르밀라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아!”

찢어발겨진 치마에 아르밀라가 안타까운 탄성을 뱉었다. 그녀가 넝마가 된 치마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자, 리카르도가 날렵한 턱을 거머쥐었다.

“나랑 있을 땐 나만 봐.”

“하지만, 드레스가…….”

“드레스가 왜 필요하지?”

리카르도는 눈을 가늘게 좁히곤 다른 손으로 아르밀라의 허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벗고 있어. 매번 벗기기도 귀찮으니까.”

리카르도는 일방적으로 말하고서 몸을 숙였다. 당황한 아르밀라가 반박하려는 찰나, 그녀의 목덜미가 뜨거운 입에 갇혔다.

리카르도는 다른 손으로 아르밀라의 허리를 움켜쥐고서 부드러운 목덜미를 괴롭혔다.

아르밀라는 단단한 팔뚝을 붙잡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저, 전하. 읏……!”

리카르도는 시선을 내려 아르밀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제 모습이 얼마나 창피한지 알고 있어 아르밀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음란한 몸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금세 솔직해지는 몸이 부끄러웠다. 아까 넘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놓아주고서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르밀라와 달리,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데도 부끄러움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앉아.”

리카르도의 눈은 마치 피식자를 앞에 둔 맹수 같았다. 아르밀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옮겼다. 걸을 때마다 온 세상의 열기가 제게로 옮겨붙은 듯한 기분에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서.”

리카르도는 인내심이 닳은 것처럼 아르밀라를 재촉했다. 욕조까지 몇 걸음인가 남았을 때, 그의 손이 뻗어 왔다.

“아……!”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에게 이끌려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리카르도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제 몸을 겹쳤다.

그녀의 시야가 새하얗게 번졌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품에 안겨 몸을 파르르 떨었다.

“흣…….”

쾌락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숨을 돌릴 새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매고 그녀를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이내 아르밀라의 교성이 욕실을 가득 채웠다. 아르밀라가 눈물이 섞인 비명을 질러도 리카르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미친 듯이 그녀를 탐했다.

“시, 싫어. 이렇게는 싫어요!”

헐떡이며 신음을 지르던 아르밀라가 리카르도에게 애원했다. 그를 보지도 못하는, 누구에게 안기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거부감이 들었다.

무자비하게 안는 걸 견디는 건 그게 리카르도이기 때문인데, 쾌락을 느끼고 열락에 빠지는 건 그 상대가 리카르도이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그를 볼 수 없다.

무섭고, 수치스러웠다.

아르밀라는 수치심과 버무려진 쾌락의 열기 속에서 간절히 애원했다.

“전하, 아, 저, 전하를…… 보고 싶어요. 전하…… 흣!”

“가만있어.”

하지만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부탁을 묵살했다.

아르밀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비참했다.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창부 같지 않은가.

사랑이 없는 관계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전하, 제발……!”

아르밀라는 절박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호소는 리카르도에게 닿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손등 위로 흘렀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욱더 거세게 아르밀라를 몰아붙일 뿐이었다.

“으읏!”

아르밀라는 두 손으로 리카르도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허벅지는 제대로 손에 잡히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리카르도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어떻게든 그를 느끼고 싶어서.

“큭!”

인형처럼 안겨 있던 아르밀라가 리카르도의 허벅지를 잡자 리카르도가 돌연 낮은 신음을 흘리고서 그녀를 앞으로 밀쳤다.

“비켜.”

“아!”

리카르도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아르밀라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나뒹굴었다. 그녀를 밀친 리카르도가 거칠게 숨을 쉬고서 자신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후으…….”

그제야 아르밀라는 그가 쾌락의 끝자락에 다다르기 직전에 일부러 자신을 밀쳐 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가운 현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느꼈다.

‘아냐, 난…… 괜찮아.’

아르밀라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찢어진 드레스를 주웠다. 정신없이 굴려진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들어와.”

만족에 젖은 부름에 아르밀라는 움찔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옷가지를 줍는 사이에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따뜻한 욕조 안에서 아르밀라를 부르는 리카르도라니.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르밀라의 좌절을 더 깊게 만들기만 했다. 이런 취급을 받고 바로 좋아라 하며 달려갈 만큼 그녀는 속이 좋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까진 무릎을 움직여 문으로 향했다. 만약에 그가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더 붙잡아 준다면.

돌아가리라.

끝내 리카르도에게 모질지 못한 아르밀라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아르밀라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도는 그녀를 더 찾지 않았다. 마치 그걸로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 * *

황궁 복도를 걷는 중년의 사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그는 하인에게 일러 마차를 대령하라고 한 뒤에, 느긋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마치 이 황궁이 제 것이라도 된 양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제가 한발 늦었군요.”

창 너머로 후원을 감상하던 사내, 두란테가 굵직한 청년의 음성에 눈을 움칠했다. 몸을 틀어 상대방을 확인한 그가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강녕하셨는지.”

“덕분에.”

발레리오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두란테가 황제를 만나러 왔다기에, 무슨 모사를 꾸미려는지 들으려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한발 늦어 버렸다.

두란테는 백작이지만 공작 못지않은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아달베르토령은 아르칸젤로 제국의 유일한 곡창 지대였다.

풍요와는 거리가 먼 제국에서 추수가 가능한 논밭을 가지고 있다는 건 커다란 권력이었다.

거기다 두란테 백작은 만만치 않은 야심가였다.

그는 황제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친우였으며, 선대 대공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두란테는 이런 관계를 출세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했다.

두란테는 귀족회의 원로이며, 아달베르토령은 레나토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두란테는 황실과 대공가 모두와 손을 잡고 있었다.

발레리오는 황태자 앞에서도 허리를 깊이 숙이지 않는 두란테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아달베르토에 기쁜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럴 일이 뭐 있겠습니까. 폐하의 병세가 나아지시는 것 같아 기쁜 것이지요.”

“요즘은 가끔 산책도 하십니다. 이대로라면 백작 영애의 데뷔 파티에도 걸음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발레리오의 얘기에 기분 좋게 웃던 두란테의 입꼬리가 떨렸다. 황태자에게 딸을 들이대려 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것을 떠올린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인자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아달베르토가의 무한한 영광이지요.”

“내년 봄 일을 벌써부터 의논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허허.”

두란테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화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를 옆에 두고서도 없는 것처럼 대하는 그의 태도에도 발레리오는 의연했다.

“그럼.”

발레리오는 시간을 더 끌지 않고 두란테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그가 황제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두란테가 입을 열었다.

“황궁은 따뜻하군요.”

난데없이 던져진 화제에 발레리오가 몸을 틀었다. 그러자 두란테가 턱을 쓸며 말했다.

“레나토는 어찌나 춥던지. 그곳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왕녀의 장례식에 다녀오셨습니까?”

발레리오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레나토와 관련된 일이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증오해 온 자가 다스리는 땅.

발레리오에게 있어 레나토는 절대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왕녀의 장례식이라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자리에도 가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발레리오는 두란테의 대답을 기다리며 주먹을 쥐었다. 레나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아래로 훅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 발레리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두란테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례식은 지난 소식이지요. 그새 대공께 경사가 생겼는데. 그건 모르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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