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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0화 (21/120)

20화

“고마워, 루체. 음, 흠!”

루체에게 감사 인사를 하던 아르밀라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감싸 쥐었다.

목을 가다듬어도 목소리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밤새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질러 댄 탓이다.

“잠깐만요.”

루체는 아르밀라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고서는 다시 몸을 홱 돌려서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어푸어푸, 하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게, 세수부터 하고 있으란 뜻 같았다.

“이렇게 이렇게, 하고 계세요. 루체가 물 가져올게요!”

“으응.”

아르밀라는 루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조심스레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바르게 서자 허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꾹 참았다. 주인도 없는 방에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어서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

몸을 가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아르밀라는 바닥에 놓인 옷을 보고서 경악했다.

아르밀라의 드레스와 리카르도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격렬했던 밤을,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밤을 암시하듯이.

* * *

“저는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나시르는 팔짱을 끼고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도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불평을 들었다.

“명색이 북부의 주인인, 대공 전하의 혼인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혼인식도 없이, 약식으로 치르시다뇨?”

“그럼 어떻게 할까.”

신전에 다녀오는 동안 쌓인 서류를 살피던 리카르도가 고저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꽂혀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얼마 전 결혼한 새신랑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가 있습니까? 두란테 백작이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요. 게다가 황제 폐하의 허가도 없이…….”

“내 혼인에 왜 황제의 인가가 필요하지?”

나시르의 입에서 황제가 거론되자, 리카르도가 펜을 탁 놓았다. 그는 날이 선 눈으로 보좌관을 보며 말했다.

“대공가의 일은 가주인 내가 결정한다.”

“하나 신하 된 도리로, 아니. 그 이전에, 황실이 주선한 왕녀와의 정략혼이 마무리된 지 얼마 안 되었잖습니까.”

나시르는 근심이 가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 레나토의 주인이 이런 식으로 혼인을 하시다뇨.”

“이게 뭐 어때서?”

리카르도는 의자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까지 처리한 서류를 나시르에게 넘겨주고서 권태로운 얼굴로 말했다.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은 산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왕녀와의 정략혼이 파기되자마자 몸이 달아 혼인을 한 거다. 호사가들이 달려들기 딱 좋은 이야기 아닌가.”

까다로운 분쟁의 해결책이라도 내놓는 듯한 어투였다.

“다만 북부의 소문이 수도까지 퍼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서두른 거다. 이런 소문이 있다면 황실에서도 막무가내로 혼인을 무효화시키지 못할 테고.”

“그렇다 해도…….”

주군의 설명에 나시르는 이마를 짚었다.

“아르밀라 님은 무슨 죕니까.”

“오지랖이 과하군. 네가 왜 아르밀라를 신경 쓰지?”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여태껏 차분히 대답하던 것과는 달리, 리카르도가 살벌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공비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리카르도의 경고에 나시르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것이었다.

누가 감히 바라보아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 * *

리카르도와 혼인을 한 후 아르밀라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사용인들에게 ‘대공비 전하’가 아닌 ‘아르밀라 님’이었으며, 새 옷이나 장신구가 생기지 않았다. 지내는 곳이 대공의 침실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개의치 않았다.

대접을 받으면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사용인들에게 ‘비전하’라고 불린다면 비전하답게 저택을 관리해야 한다. 화려한 드레스로 옷장을 꽉 채우게 된다면, 그것들을 입고서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대공비로서 화려한 파티를 주관하고 황실에 인사를 가고, 사교계 인사들과 인맥을 쌓아야 할 터.

하지만 아르밀라는 그걸 능숙히 해낼 자신이 없었다. 파티 초대장을 쓰는 법도, 연회에 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시르가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터.

실수를 저질러서 리카르도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혼인을 후회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르밀라의 걱정을 아는 건지, 다행히도 대공비를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레나토 자체가 하나의 외딴섬인 양, 대공의 혼인이 발표되었는데도 누구도 저택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지금까지처럼 지내고 있었다.

물론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처우를 받았다.

그동안은 차가운 음식을 먹고, 냉수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바늘에 찔리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루체가 몸종이 된 덕에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리카르도가 말했던 대로, 대공비는 얌전히 저택에 있기만 하면 그만인 것 같았다.

“뭘 하고 있지?”

발코니에 앉아 있던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치오와 아침 훈련을 했는지, 듬직한 상체에 얇은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을 보고서 얼굴을 붉혔다.

“루체가 지도에 쓸 책을 가지러 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구?”

“제 하녀요.”

“그래.”

리카르도는 무심히 대답하며 셔츠를 벗어젖혔다. 아르밀라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수건으로 땀을 닦는 리카르도의 음성이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지도라는 거. 얼마나 완성됐나.”

“이제 절반 정도 됐어요.”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군. 쓸 만했으면 좋겠는데.”

반신반의하는 듯한 어투에 아르밀라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리카르도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갈수록 산에서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리카르도와 만났을 때부터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 그 외의 기억이 점점 존재감을 잃어 갔다. 지도를 그리는 데 책이 필요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걸 말할 순 없었다. 국경 지대를 아는 건 아르밀라의 몇 안 되는 쓸모였으니까.

“왜 대답이 없어.”

“아……!”

고민에 빠진 사이, 잘록한 허리를 큼지막한 손이 낚아챘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고서 내려다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내린 리카르도의 눈가에 그림자가 졌다. 그윽한 눈동자가 아르밀라를 주시했다.

“지도가 쓸 만하지 않다면 네가 쓸 만해지면 되잖나.”

“어떻게요?”

“몰라서 묻는 건가.”

리카르도는 헛웃음을 지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아르밀라의 몸이 공중에 떴다. 그녀를 가뿐히 들어 안은 리카르도가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긴 왜…….”

아르밀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실에 딸린 욕실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리카르도는 혼인 후, 아르밀라에게 검은 방에서 지내라고 명했다. 하얀 방에서 머무르겠다는 그녀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가 왜 그렇게 나오는지 궁금했다.

보통 귀족 부처들은 침실을 따로 쓴다. 부부가 한 방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금슬이 엄청나게 좋지 않은 한.

“우리 금슬이 좋다는 소문이 나야 하니까.”

“그게 전하께 중요한 건가요?”

“그래.”

리카르도의 무심한 대답에 아르밀라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이 결혼의 목적은 ‘대공이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데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 당사자인 대공은 사랑 따위는 믿지 않지만.

“뭘 생각하지?”

어느새 넓은 욕실로 들어온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의 턱을 거머쥐었다. 그는 입을 맞추며 그녀를 내려놓고서 옷을 벗었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서 그와 혀를 얽었다.

상관없다.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게 어딘가.

그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하아…….”

뜨거운 키스에 아르밀라의 잇새로 여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옷을 전부 벗고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리카르도가 보디스를 장식한 리본을 잡아당기자, 풍만한 가슴을 누르고 있던 옷깃이 벌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안고 있던 가느다란 팔을 옮겨 상체를 가리려 했다.

이미 그와 몸을 몇 번이고 겹쳤지만, 밝은 해가 떠 있을 때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리카르도에게 벗은 몸을 낱낱이 보이는 것이 창피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아무런 감상을 내비치지 않았다. 건조한 얼굴로 아르밀라의 치맛자락을 빠르게 풀어 헤칠 따름이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아르밀라는 벌거벗은 것과 진배없는 모습이 되었다.

“흐읏!”

아르밀라는 등에 닿는 선득한 냉기에 움찔했다.

리카르도의 손이 곡선을 그리며 등줄기를 쓸어내렸고, 이어 느릿한 눈길로 아르밀라를 훑어보았다.

“흥분했군.”

리카르도의 담백한 말에 아르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정한 자이지만,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의 눈길 한 번, 키스 한 번으로도 아르밀라는 쉽게 달아올랐다.

그래서일까.

초야 이후로 리카르도는 딱히 공들여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그때만큼 흥분하는 일도 그다지 없었다. 오로지 아르밀라만이 몸이 달아 그를 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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