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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8화 (19/120)
  • 18화

    아르밀라는 불안한 눈으로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저녁이 목에 넘어가질 않아 식사는 건너뛰었다. 리카르도도 밀린 정무 때문에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침실을 찾고서부터 초야가 시작된다.

    아르밀라는 제발 리카르도가 아주 늦은, 그러니까 어둠이 짙게 내린 밤에 나타나길 바랐다.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모습을 그가 볼 수 없도록.

    “많이 기다렸나?”

    하지만 아르밀라의 바람이 무색하게 문이 곧 열렸다. 그녀가 검은 방에 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둡군.”

    겨울이라 해가 짧은 탓에 방엔 옅은 그림자가 퍼져 있었다. 리카르도는 가져온 등잔을 침대맡에 내려놓았다. 그가 침실의 초에 불을 하나씩 켜자 방이 점차 밝아졌다.

    아르밀라는 제 몸에 진 그림자가 점차 옅어지자 식겁하며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벌써 자려고?”

    아르밀라가 이불 안에서 꼼지락대자 리카르도가 무심히 물었다. 아르밀라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는 몸을 웅크렸다.

    “불 꺼 주시면 안 될까요?”

    “왜?”

    아르밀라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 우물쭈물했다. 그녀가 뜸을 들이자 리카르도는 마저 남은 촛대를 밝히고서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걸 좋아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대답을 하던 아르밀라는 침대가 출렁이자 화들짝 놀랐다.

    리카르도가 침대에 앉았다.

    “아니면?”

    이윽고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아르밀라의 귓전에 바로 울렸다. 큼지막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맡을 짚고, 마치 위에서 안듯이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에게 몸을 붙였다.

    “말해 봐.”

    “전…… 저는…….”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어떡해.’

    할 수 있다면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을 찾지 못한 아르밀라는 이불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잡았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좀처럼 얼굴을 꺼내질 않자, 리카르도가 다른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날 피하지 마라.”

    “아……!”

    이불이 확 걷히고, 아르밀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리카르도는 오렌지빛 조명에 비친 신부를 훑듯이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겁에 질려 있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머물렀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새하얀 살결의 여인은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노을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검은 시트 위에 굽이치고, 하얀 피부 위로 얇디얇은 시폰 드레스가 걸쳐져 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목, 그리고 일자를 그리며 튀어나와 있는 빗장뼈. 그 아래로 길게 뻗어 있는 두 다리.

    속옷을 입기는 했으나, 아르밀라가 몸을 비틀면서 교묘하게 중요한 부위를 비켜 가리고 있었다.

    아르밀라는 그것도 모르는지 시트를 얌전히 쥐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켜자 가슴이 한 번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 모습에, 낮게 앓는 소리가 리카르도의 성대를 울렸다.

    “다시 한번 묻겠다.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깊게 잠긴 목소리가 아르밀라의 마음을 울렸다. 리카르도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치맛자락 사이에 드러난 하얀 허벅지로 향하려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내게만 충실하지 못할 거라면 여기서 접어.”

    “……전하께서는요?”

    “뭐?”

    “전하께 다른 여인이 있나요?”

    아르밀라의 질문에 리카르도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아니.”

    리카르도의 대답에 아르밀라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떨림이 설렘으로 바뀌는 데는 그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저도요.”

    아르밀라는 환한 미소를 짓고서 리카르도에게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상체를 내려 아르밀라에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은 순간, 아르밀라의 심장이 쿵쾅댔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추위는 온데간데없이 열기가 확 올랐다.

    리카르도의 혀가 그녀의 입 안에 들어오고, 혀가 얽혔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혀를 감고서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르밀라는 부끄럽다는 사실조차도 잊고서 그에게 매달렸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온몸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워지고 저도 모르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 전하…….”

    리카르도의 입술이 잠시 떨어진 찰나, 아르밀라가 흥분에 젖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백했다.

    “사랑해요.”

    아르밀라의 고백을 들은 순간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르밀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리카르도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와 몸을 겹치는 게 너무 황홀해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둘 게 있다.”

    부드러운 허벅지를 거친 손바닥으로 쓸던 리카르도가 천천히 말했다. 아르밀라는 몽롱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이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1년이면 될 거야.”

    아르밀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리카르도를 보았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뭐가요?”

    “네가 내 아내로 있어야 할 시간.”

    아르밀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1년이라니. 그의 아내로서 지내는 시간에 기한이 있단 말인가.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져 나갔다.

    “그,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거래라고 했잖아.”

    리카르도는 도리어 아르밀라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이뤄 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걸 이뤄 주는, 그런 거래.”

    차분한 설명을 듣는 아르밀라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추위가 새삼스레 찾아온 것 같았다.

    뼛속까지 시려 오는 추위에 아르밀라는 턱을 덜덜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원하는 것…….”

    “그래, 넌 레나토를 떠나고 싶다고 했으니 이 결혼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면 보내 줄 거다. 내가 지금 결혼을 해 버리면 두란테도 딸을 더 들이밀지 못하게 되지. 이혼을 한다 해도 상관없어. 재취 자리에 백작 영애를 보낼 순 없을 테니까.”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말을 들으며 인상을 썼다. 그의 말이 온통 암호 같았다.

    여기서 왜 백작 영애가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아르밀라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돼.”

    리카르도는 혼란스러워하는 아르밀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의 얼굴에는 몹시 드물게도 만족스러운 빛이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아르밀라는 절망스러웠다.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적당히 이용할 소문이 필요해서 아르밀라와 혼인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하지만 1년이라니.

    1년 뒤에는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니.

    아르밀라는 절박한 마음이 되어 리카르도를 붙잡았다.

    “저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전, 저는 전하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이혼할 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할 테니.”

    “그런 게 아니에요.”

    아르밀라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두툼한 남자의 상체를 끌어안으며 애절하게 말했다.

    “저는 전하를 사랑해요.”

    “…….”

    “저는 이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이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레나토를, 전하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눈물을 글썽이던 아르밀라의 여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리카르도는 낮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냉정하고도 평이한 말투. 뜨겁게 타오르는 아르밀라의 사랑을 단번에 얼려 버릴 것 같은 싸늘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르밀라는 얼어붙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르밀라는 떨리는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거잖아요. 전하의 곁에는 저만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불안하게 속삭이는 가녀린 음성에 리카르도가 미간을 모았다. 그는 아르밀라를 한참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밀라는 그의 대답에 안도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리카르도와 아르밀라의 입술이 다시 겹쳐지고, 서늘해졌던 방이 다시금 뜨겁게 달구어졌다. 아르밀라는 수줍어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뜨겁게 그의 키스에 응했다.

    열심히 혀를 굴리고, 몸을 맞붙였다. 리카르도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고 싶은 안쓰러운 몸짓이었다.

    “전하, 저를…… 전하의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

    혀가 섞이는 소리 사이에 가느다란 애원이 비어져 나왔다.

    아르밀라의 요청에 리카르도가 인상을 썼다. 그는 가냘픈 어깨를 붙잡아 아르밀라를 침대로 밀었다.

    “그래, 너도 동의했으니. 이제 넌 내 거다.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전부 다.”

    리카르도는 입고 있던 재킷을 거칠게 벗었다. 그러곤 크라바트를 풀고서 셔츠를 찢듯이 벗었다. 검은 바지 위에 받쳐 입었던 하얀 셔츠가 털썩, 떨어지고 거대한 사내의 몸이 아르밀라의 위를 덮었다.

    리카르도가 몸을 숙이자 빈틈없이 꽉 짜인 근육이 움직임에 맞춰 이완했다.

    넓은 가슴, 그리고 그 아래로 구역을 나눠 짜인 복근. 그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완벽했다. 아르밀라는 황홀함에 젖어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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