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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7화 (18/120)

17화

아르밀라는 천천히 상황을 이해했다.

루체의 겉모습은 성인이지만, 속은 아직 아이인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그래서 루체에게 서슴없이 매질해 댄 걸 테고.

우는 루체를 바라보던 아르밀라의 시야에 바닥에 흩어진 장작들이 들어왔다.

‘이걸 내게 갖다 주려다가 비앙카에게 걸린 거구나.’

아르밀라는 일단 장작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그러자 울고만 있던 루체가 훌쩍이면서 돕기 시작했다.

“이, 흑, 이거, 줘요. 루체 일이에요.”

아르밀라는 루체에게 장작을 건네주고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루체를 향한 고마움과 더불어 묘한 동지애가 일었다.

루체도 이곳에서 미움을 받는 존재였으니까.

아르밀라처럼.

아르밀라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로, 루체가 놀라지 않게끔 조용히 물었다.

“그렇구나. 루체 일이라는 게 뭐야?”

“본관 청소. 계단 반짝반짝하게.”

“그리고?”

“하얀 방에, 히끅, 장작이요.”

루체는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장작들을 꼬옥 끌어안았다. 아르밀라는 루체가 품에 안은 장작에 시선을 꽂은 채 말했다.

“그건 비앙카가 하지 말라고 했다며. 아무도 안 시켰잖아.”

“그, 그래도. 해야 해.”

“왜?”

“오, 오늘 너무 춥잖아요. 아르미라 님도 추워. 추우면 감기 걸려. 아파.”

아르밀라는 루체의 말에 울컥했다. 루체의 느릿한 설명을 듣는 동안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도 아르밀라를 걱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를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르밀라는 루체에게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다정한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아르밀라의 품에 안겼다.

“어……?”

영문도 모르고 안긴 루체가 버둥대며 아르밀라를 밀치려 했다.

“때리지 마요, 루체 아파…….”

“응, 루체. 안 때려.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요? 왜요?”

아르밀라의 대답을 들은 루체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아르밀라는 그녀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루체는 착한 사람이니까.”

“루체 착해요?”

“응, 루체는 참 착해.”

“헤헤.”

아르밀라의 다정한 칭찬에 루체가 헤실 웃었다. 눈에는 눈물방울을 달고서 좋다고 웃는 해맑은 모습에 아르밀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루체, 이제 일어나자. 장작 가지고 나랑 같이 하얀 방에 갈까?”

아르밀라는 소매를 끌어당겨 루체의 인중을 닦아 주었다. 하얗게 말라붙은 콧물을 슥슥 닦아 주자, 루체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같이 가요? 왜요?”

“내가 그 방에 머물거든.”

아르밀라의 대답에 루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루체는 아르밀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럼 언니가 아르미라 님이에요?”

“아르미라가 아니라, 아르밀라.”

“아르미라.”

루체는 입술을 우물대며 아르밀라를 따라 말했다. 루체를 일으켜 주던 아르밀라는 발음이 어눌한 루체의 대답에 풋 웃어 버렸다.

“그래, 내가 아르미라야.”

“우와!”

루체는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아르밀라는 장작을 잔뜩 껴안은 채로 발까지 구르는 루체를 보다가 그만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르미라 님, 왜 웃는 거예요? 루체도 알려 줘요!”

환하게 웃는 아르밀라에게 루체가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루체가 그럴수록 아르밀라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아르밀라는 웃으며 눈을 찡그렸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서 웃어 본 적이 처음이라서.

이렇게 순수한 호감을 보여 주는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이라서.

“루체를 만난 게 좋아서 웃은 거야. 루체, 앞으로 잘 부탁해.”

아르밀라는 웃음에 딸려 나오려 하는 눈물을 닦고 루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밀라의 하얀 손을 바라본 루체가 제 치마에 손을 슥슥 닦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자, 북부의 서늘한 추위 속에서 따뜻한 체온이 서로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때.

“여기 있었군.”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서늘한 음성을 들은 순간 아르밀라의 온몸에 있는 세포가 바짝 긴장했다. 저벅저벅, 남자가 묵직한 체중을 실어 눈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르밀라.”

아르밀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잇새에서는 하얀 김만이 퍼져 나왔다.

“가, 가주님!”

아르밀라보다 빠르게 반응한 건 루체였다. 루체는 아르밀라의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알아보고서 안고 있던 장작을 바닥에 쏟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루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리카르도의 검은 그림자가 아르밀라의 위에 드리워졌다. 아르밀라는 루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이 날씨에?”

리카르도는 눈을 좁히고서 엎드려 있는 하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 그는 다시 아르밀라를 바라보았다.

“따라와.”

리카르도는 짧은 명을 던지고서 몸을 돌렸다. 아르밀라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뜻을 읽고서 조용히 전율했다.

리카르도가 돌아왔다.

혼인 허가서를 가지고서.

* * *

벽지마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던 아르밀라의 방과는 달리, 대공의 집무실은 포근했다.

집무실에 들어온 리카르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나시르에게 눈짓을 했다.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아르밀라를 발견하고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군요, 아르밀라 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축하드립니다.”

쭈뼛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온 아르밀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르밀라에게 여러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은근한 경멸을 담은 시선 하나하나가 따가운 바늘이 되어 박히는 것 같았다.

아르밀라는 처연한 얼굴로 조용히 제 팔을 쓸었다. 그런 그녀에게 또 하나의 바늘이 꽂혔다.

“축하받을 기분이 아닌가 보군.”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속을 파고들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고서 나시르에게 손을 까닥했다.

“신전의 혼인 허가서입니다.”

나시르에게 서류를 건네받은 리카르도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르밀라의 어두운 표정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집무실에 감돌았다.

리카르도가 허가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서 아르밀라를 향해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라. 강제하지 않아.”

주눅이 들어 있던 아르밀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그녀와 리카르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옭아맬 것같이 집요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내 후보야 또 구하면 그만이다.”

그 순간, 아르밀라의 머리에 비앙카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비앙카 말대로 단순히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다. 생애 최고의 행운이다.

리카르도를 원하는 여자는 많다. 비단 비앙카가 아니더라도, 왕녀의 장례식에 왔던 여자 귀족들도 조문에는 별 관심 없이 리카르도를 훔쳐보기에 바빴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아르밀라도 리카르도를 원했다. 그의 곁에 당당히 있고 싶었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감히 원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에게 청혼했다.

기적이었다.

아르밀라는 그 기적을 걷어차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말했다.

“전하께선 제게 청혼하셨죠.”

“그랬지.”

리카르도는 건조하게 대답하고서는 펜을 들었다. 그는 혼인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서 아르밀라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르밀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홀린 듯이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서명해.”

아르밀라는 떨리는 손으로 리카르도에게 펜을 받았다. 그리고 수없이 연습하고 혼자서 곱씹었던 이름을 혼인 허가서에 써 넣었다.

‘아르밀라 비토레’라는 이름을.

* * *

리카르도와 아르밀라가 혼인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 레나토에 이를 공표하는 벽보가 붙었다.

두 사람의 혼인식은 이걸로 끝이었다. 리카르도가 전 약혼녀의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다가 아르밀라의 신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다.

“결국 자리를 꿰찼네. 대단해.”

“쉿, 입조심해. 이젠 대공비 전하잖아.”

“비전하는 무슨.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대공의 침실인 검은 방에 앉아 있던 아르밀라는 문 너머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눈을 질끈 감았다.

초야.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혼인식을 마치고, 아르밀라는 몸치장을 했다. 약식이어도 혼인은 혼인이니 초야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르밀라는 자신의 몸시중을 들어 줄 하녀로 루체를 골랐다. 그 덕에 또 바늘에 찔리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아르밀라는 남녀 간의 밤에 대해서 어떤 조언도 구할 수 없었다. 보통 친정에서 그런 교육을 받아 올 테지만, 아르밀라에게는 친정이 없다.

카타리나 부인은 검은 방이 어디인지를 알려 주는 것으로 제 임무는 다 끝났다는 양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아르밀라는 짙은 고동색의 가구들에 둘러싸여, 드넓은 침대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어야만 했다.

초야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는 하늘하늘한 시폰 재질이었다.

아니, 이게 드레스라고는 할 수 있을까.

루체의 도움으로 몸을 씻고 나온 아르밀라는 준비된 드레스를 보고 기겁했다.

어깨와 윗가슴이 훤히 드러나도록 깊이 파여 있는 데다가, 여러 겹으로 된 치마는 풍성한 치맛단이 무색하게 안이 다 비쳐 보였다.

게다가 속옷은 또 얼마나 선정적인지.

몸의 중요 부위를 레이스로 겨우 가릴 수 있는 속옷이 입다가 찢어지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추워…….’

아르밀라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었다. 대공의 방은 따뜻하게 불을 때고 있지만, 워낙 얇게 차려입은 탓에 한기가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추위가 아니었다.

누가 볼까 남사스러운 이 꼴을, 다른 사람도 아닌 리카르도에게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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