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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6화 (17/120)
  • 16화

    제국의 북쪽 끝에 위치한 레나토의 추위는 매섭기로 악명 높았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바람이 거셌다. 바람에 섞인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싼 아르밀라는 추위에 빨갛게 곱은 손을 호호 불었다. 한낮인데도 감당하기 어려운 추위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리카르도가 혼인을 공표하고 지난 한 달간, 아르밀라는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치사하잖아.’

    아르밀라의 이가 추위에 딱딱 부딪쳤다.

    한파 추위가 한창인데, 방에 장작을 안 넣어 주다니. 지난 한 달간 당한 심술 중에서 이게 가장 원초적이고 유치했다.

    ‘빨리 식을 올렸으면.’

    차라리 식을 올리면 이런 취급은 덜할 텐데. 아르밀라는 파들파들 떨며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신전에서 혼인 허가서가 당도하지 않았다.

    아르밀라가 청혼을 승낙하자 리카르도는 신전에 기별을 넣어 혼인 허가서를 받겠다고 했다.

    약식으로 신청한다 해도 한 달은 걸린다고 하기에, 혼인은 한 달 뒤 허가서가 도착하는 날에 치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 딱 한 달을 채웠다.

    하지만 폭설로 길이 막혀서인지 혼인 허가서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리카르도가 직접 나시르와 함께 신전으로 갔다.

    가주가 저택을 비우자, 사용인들은 실컷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동안은 리카르도의 눈치를 보아서 장작은 가져다 놓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다.

    아르밀라는 이불을 모아 쥐며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이렇게라도 하니 추위가 조금은 잊히는 것도 같았다.

    “후으…….”

    방 안에 있는데도 입에서 하얀 김이 난다. 아르밀라는 숨을 내뱉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협탁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나 역시, 종이 울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장작이…… 마구간 쪽에 있었지?’

    아르밀라는 시간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지는 추위에 장작이 있는 위치를 떠올렸다.

    하인들이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직접 가져오면 된다.

    보아하니 오늘은 아예 식사도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따뜻하게라도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아르밀라는 옷장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단단히 겹쳐 입었다.

    * * *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마구간으로 가던 아르밀라는 창고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으허어엉…….”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소리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였다.

    ‘누구지?’

    귀를 기울이자, 어떤 여자가 서럽게 우는 듯했다. 아르밀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헝! 허어엉!”

    창고 가까이 간 아르밀라는 자신이 본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뒷문 앞에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행태가 범상치 않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것 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우는 모습까지.

    성인 여자의 행동이, 마치 대여섯 살짜리 어린아이 같았다.

    “히끅! 끅! 흐엉!”

    이내 딸꾹질까지 하며 우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다.

    우는 하녀를 지켜보던 아르밀라는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레나토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었다. 가끔 표정을 보인다 해도, 경멸하거나 비웃는 게 다였다.

    그런데 저렇게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아직 사용인 교육을 안 받았나? 아니면 수습 하녀인 걸까?’

    하녀를 훔쳐보던 아르밀라는 잠시 고민했다. 울고 있는 사람을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토의 사용인들은 아르밀라를 싫어한다. 그래서 성급히 다가가기도 난감했다.

    “루체! 어디 있어, 루체!”

    추위 속에서 고민하던 아르밀라는 비앙카가 달려오는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말자.

    저 하녀가 아르밀라의 도움을 반길지, 아닐지도 모르는 마당에, 비앙카와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르밀라는 빨개진 코를 훌쩍이고서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찰싹!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닥치라고 했지! 그새를 못 참고 또 울어 대?”

    “흐엉, 아, 아파아!”

    “이 멍청한 게! 너 안 일어나? 그만 울고 빨리 본관으로 오라니까! 정신을 못 차리지?”

    “그만!”

    비앙카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간 순간, 아르밀라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양팔을 벌려 하녀를 막아서며 비앙카를 쏘아보았다.

    “그만해!”

    “이게 누구실까.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웬 행차람.”

    아르밀라를 본 비앙카가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회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사용인들 사이의 일이에요. 가던 길 가세요.”

    “하지만…….”

    “네 갈 길 가라고.”

    비앙카는 눈을 홉뜨며 경고했다. 따르지 않으면 아르밀라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태세였다.

    아르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앙카는 일반 하녀와 달랐다. 다른 하녀들은 레나토 출신이지만, 그녀는 자케트에서 왔다.

    비앙카는 자케트의 난민이었다.

    자케트와 맞닿은 아달베르토령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휩쓸린 피해자.

    두란테 백작의 요청으로 분쟁을 가라앉히기 위해 출정했던 리카르도는 당시 비앙카를 거두어 왔다.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데려왔을 때 사용인들이 놀라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건, 비앙카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분쟁으로 잃은 비앙카는 리카르도에게 자신을 거둬 달라고 읍소하였고, 결국 하녀로서 따라왔다.

    그렇게 하녀가 되었지만 비앙카는 다른 하녀들과는 조금 달랐다.

    가주가 직접 데려온 하녀, 즉 가주의 손을 탔을지도 모르는 하녀였으니까.

    매사에 무심한 리카르도는 여기에 대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비앙카의 오만 방자한 태도는 마치 그와 그녀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냈다.

    비앙카는 그 소문을 등에 업고 하녀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넌 나랑 다를 게 없어. 나보다 운이 아주 조금 더 좋은 거 가지고,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나대지 마.”

    비앙카는 못내 분하다는 듯이 뇌까렸다. 아르밀라는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분노에 움찔했다. 하지만 곧 뒤에서 들리는 애처로운 흐느낌에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내가 뭐라도 되어서 끼어든 게 아니야. 울고 있잖아. 그런데 왜 달래 주지는 않고 때리려고만 하는 거야?”

    “왜냐고?”

    비앙카는 훌쩍이는 하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하얀 방에 자꾸 장작을 가져다 놓으니까.”

    비앙카의 설명에 아르밀라는 숨을 들이켰다.

    본관의 방들은 각각 꾸며진 장식의 색에 따른 명칭이 있었다.

    대공의 방은 검은 방, 아르밀라의 방은 하얀 방, 그리고 붉은 방…….

    그러니까 비앙카는 지금, 하녀가 아르밀라에게 장작을 대 주었다는 이유로 때렸다는 거다.

    ‘하인들이 전하의 눈치를 보느라 내 방에 장작을 가져다줬던 게 아니구나.’

    아르밀라는 그동안 자신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등 뒤에서 울고 있는 하녀가 몰래 도와줬기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날 수 없다. 아르밀라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비앙카를 노려보았다.

    “나는 곧 대공비가 될 몸이야. 내 방에 장작을 가져다 놓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직 아니잖아?”

    비앙카는 당당했다. 아르밀라는 그녀를 쏘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아니긴 하지. 내일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뭐?”

    “내일, 전하께서 신전에서 돌아오시는 대로 식을 치를 거야.”

    아르밀라는 침을 작게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대공비에게는 사용인들의 고용 결정권이 있다지?”

    말을 마친 아르밀라는 눈을 빛내며 비앙카를 응시했다. 내일 대공비가 되면 바로 비앙카를 잘라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뜻밖의 공격에 비앙카가 움찔하며 반박했다.

    “너, 너 따위에게 전하께서 그런 큰 권한을 내어 주실 것 같아?”

    “글쎄? 어떨까.”

    아르밀라는 최대한 여유롭게 대답했다. 비앙카가 의심 못 하도록.

    비앙카 말이 옳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에게 권한을 위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얌전히 자리를 지킬 아내이니까.

    하지만 그걸 비앙카는 모른다.

    그러니 조금쯤 허세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내일 대공비가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일부터 할지 궁금하지 않아, 비. 앙. 카?”

    아르밀라는 일부러 비앙카의 이름을 천천히 한 음절씩 발음했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곱씹는 사람처럼.

    “흥! 루체, 너. 숙소에서 마저 얘기할 테니 그리 알아!”

    비앙카는 눈을 움찔거리다가 아르밀라의 뒤에 있는 하녀에게 협박을 했다. 그리고 아르밀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창고 뒤를 벗어났다.

    비앙카가 사라질 때까지 버티고 서 있던 아르밀라는 그녀가 완전히 멀어지자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려 더 서 있기가 힘들었다.

    “히윽, 윽, 흐윽.”

    아르밀라는 곁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울던 하녀가 지치지도 않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하얀 턱에 고인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던 아르밀라는 피식 웃었다.

    “루체라고 했지?”

    “네, 네…….”

    루체의 대답을 듣던 아르밀라는 미간을 모았다. 우는 모습도 아이 같더니, 말투도 꼭 아이 같았다.

    그 괴리감에 루체의 나이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루체를 관찰하던 아르밀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루체는 몇 살이야?”

    “루체는 여, 여섯 살, 흐윽, 엄마아…….”

    더듬더듬 대답을 한 루체가 다시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아르밀라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체구의 여자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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